본문 바로가기

걸어가는 길 - 산행기

눈폭탄 속 내변산에서 매창(梅窓)과 동행하다

눈폭탄 속 내변산에서 매창(梅窓)과 동행하다

 

온 누리는 하얗다. 여지없는 설국이다. 변산반도를 향하는 차창으로 눈발은 나비처럼 달라붙는다. 눈 폭탄은 언제까지 퍼부을 텐가!

오전10, 내변산골짝 깊숙이 사자동주차장에서 설토에 내렸다. 하얀산능선이 회색하늘에 실금 그은 것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눈발은 하염없이 나붓댄다.

 

눈 폭탄 속에서 살아남은 건 골짝물길이고 식성 좋게 눈발 삼키는 건 선녀탕 뿐이다. 하얀 산골짝에 물길만이 흑사처럼 꿈틀대고 있다. 그 뱀이 꿈틀대며 기어가는 소리가 세레나데처럼 감미롭다~! 이 낭만적인 외출, 얼마만인가!

어제 초저녁, 밤부터 눈이 많이 올 거란 일기예보를 듣고 나는 설국으로의 여행을 꿈꾸느라 산악카페서핑에 들었었다.

 

어찌 찾아낸 게 모인산악회의 내변산행이였다. 처음 접하는 카페 - 총무님께 전활 넣고 오늘 아침 동행한 건데 참으로 재수 억세게 좋은 셈이다.

설국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폭탄을 맞으며 산골짝을 걷는다는 행복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닌 것이다.

 

난 강아지라도 된 듯 골짝을 기웃대고 순백의 하얀 서기를 심호흡하느라 코 구멍평수를 최대한 늘리는 거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어릴 적 동심으로 빠져든다.

순백의 세상만큼이나 철부지였던 동심에 젖어든다는 것 또한 아무 때나 할 수 없는 풋풋한 낭만이다.

하늘을 향해 팽이 돌 듯 돌며 눈발을 입속에 받아 넣어도 차갑거나 싫지가 않다. 찬 솜사탕이 입술에서 녹는다.

 

산골짝이기에, 나 혼자기에 미친 강아지처럼 까불어대며 - 일상에서의 탈출, 세상으로부터의 일탈이 주는 자족감을 만끽하는 거였다.

해님도 회색구름 속에, 어지럽게 나붓거리는 눈발 속에 숨어 얼굴내밀기가 부끄러운가 보다. 이따금 여린 햇살만 그림자를 띄우다 거둬버린다.

수줍은 여인처럼 말이다. 문득 어느 여인이 생각났다. 조선의 삼대시기(詩妓)였던 매창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곳 부안이 낳은 걸출한 여류기생 이였다. 그녀의 고결한 시혼(詩魂)과 애잔한 거문고 운율은 한양까지 소문나서 뭇 남성들이 오금을 절이게 했었다.

그녀는 10대에 기적(妓籍)에 올라 19살에 유희경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데 한양 사는 님을 향한 시 한 수가 마치 오늘의 정취 속에 읊은 듯해서다.

 

하얀 배꽃이 비 같이 내리던 - 흰 눈발이 배꽃처럼 흩날릴 때 이별했던 유희경을 십수년간 그리워했던 연심이 절절 묻어나는 그 유명한 시가 떠오른 거였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배꽃처럼 흩날리는 눈발 속에 호반(湖畔)앞에 섰다. 하얀 설국을 자욱하게 분탕 칠하는 설화우(雪花雨)를 그대로 안고 있는 옥녀호반을, 오늘 같은 날에 매향도 여길 왔을 테다.

 

시심(詩心)이 심오했던 그녀가 이 빼어난 수묵화의 정취를 모른 채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그녀의 발자국을 더듬어보고 싶었다호반을 아장대며 400년 전의 그녀를 불러 동행한다.

유희경이 부안을 찾았을 때 매창이 시객(詩客)인 그를 향해 모른 채 하며유희경과 백대붕(白大鵬) 가운데 누구신지요?”라고 묻는다.

 

백대붕과 시의 쌍벽을 이룬 유희경은 예학(禮學)의 대가이기도 해 여태까지 기생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유희경이 매창과 잠시 담소를 나누다 그녀의 시심과 교우하게 된 바였다.

며칠간의 교우가 사랑으로 발전한다. 사랑은 참으로 어찌할 수가 없는 거여서 두 연인은 스물여덟 살이란 세대차도 뛰어넘었다.   그들이 불붙은 건 사유의 세계를 공감한다는 점 외에 천민출신이란 태생적인 아픔도 공유해서였다.

 

암튼 유희경은 당대에 시학과 예학에 오똑했던 고매한 자존을 딸 같은 매창 앞에서 거뒀던 거였다.

눈 폭탄세례는 그칠 줄을 모른다. 좁은 골짝이 눈에 갇혔다. 직소폭포의 울음소리도 거문고소리만치 가냘프다. 흰 물기둥만이 검은 절벽을 떠받치고 있다.

 

매창도 여길 와서 나처럼 한참을 서성댔을 테다. 아니 이화우 쏟아지던 날 폭포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폭포의 굉음에 공명했을지도 모른다.

폭포의 터울을 벗어났다. 나목마저 소복단장하고 눈 폭탄과 맞서는 평탄한 골짝을 검청색 물길만이 살아있는 듯하다. 또 하나 살아있는 건 눈 소리다.

 

눈 내리는-그들의 밀어를 새록새록 들을 수 있단 정적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낭만이다. 매창 이라면 멋진 시 한 수를 읊을 텐데~!

유희경이 누구던가. 창덕궁 옆을 흐르는 계곡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침류대(枕流臺)라 명명했다. 이수광신흠허균유몽인 등 당대의 명사들이 모여들어 담론의 장을 열었던 장소다.

허균은 그를사람됨이 청수(淸秀)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다.”고 평했다.

 

또한 조우인(曺友仁)당시 사대부들조차 예법에 관한 한, 유희경을 따라잡을 자가 드물었다고 할 만큼 유희경은 예법의 대가였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도 부안촌구석의 매창을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매창이 이미 유희경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유희경 또한 명성이 자자한 매창에 대해 알고 있었다.

 

유희경이 그녀에게 지어준 시 촌은집,증계랑(贈癸娘)>을 보면 알 수 있다.

남쪽 지방 계랑의 이름을 일찍이 들었는데 /시와 노래 솜씨가 서울에까지 울리더군 /오늘 그 진면목을 보고 나니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구나.”

이미 두 남녀는 만나기 전에 서로의 마음을 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관음봉삼거리에 닿았다. 푹푹 빠지는 설토에서 내소사로 직행하느냐? 로 머뭇대다 관음봉을 향한다. 네 분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 앞선다.

관음봉 오르는 바위 길은 된비알이다. 그 벼랑을 설국은 어떻게 펼쳐졌는지 자못 궁금하다. 시야가 트인 사방은 흩날리는 눈발로 쌍선봉과 옥녀봉이 가물가물하다.

흰색과 회색을 희미하게 금 그은 산 능선이 하늘과 땅을 식별하게 한다.

 

톱날 아이젠에 달라붙은 눈덩이가 성가셔 죽을 판이다. 눈덩이 털어내느라 나무에 발길질 하면 다소곳하던 나무는 진짜 눈 폭탄을 퍼부으며 보복하곤 한다.

순한 놈 괜히 건드려 앙갚음 당해 싸다. 담부턴 바위에 발길질 하며 눈덩이 털어낸다. 관음봉(424.5m)에 섰다. 시계는 온통 뿌옇다.

나무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반길 뿐이다. 정오를 막 넘겼다.

 

쌓인 눈을 치우고 점심 먹을 준비를 하는데 난 멀거니 구경꾼 노릇을 한다. 육포와 과자뿐인 내가 꺼낼 음식도 없어 배낭을 짊어진 체 아침에 준 가래떡을 꺼내 씹는다.

서ㅇㅇ샘도 예의 빵쪼각 꺼내들고 얼쩡대고, 세 분이 엉거주춤 서서 식사를 하며 자꾸 우릴 부른다. 설상천계(界)의 점심자리치곤 가장 심난한 기갈 채우기라.

 

부안에서의 짧은 연애는 불장난 아닌 사랑으로 지핀다. 둘은 헤어진 후 서로를 그리워하며 애절한 마음을 시로 남겼는데 유희경이 어느 날 매창을 연연하며 쓴 시다.

그대의 집은 낭주에 있고

내 집은 한양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볼 수 없으니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도 애가 끊어지누나.”

유희경이 매창을 그리워했듯이 매창 또한 유희경을 그리워했다.

 

이화우 흩날릴 때--’의 시는 이 무렵 매창이 유희경을 사모하며 지은 시였다. 그 천금 같았던 첫 만남이 있은 15년이 지나 두 연인은 다시 만났다고 유희경의 문집에 적혀있다.

정미(丁未: 1607)에 다행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라고.

재회의 시간은 넘 짧았었다. 함께 시정(詩情)을 교우했던 유희경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고, 두 연인들에겐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유희경이 상경한 3년 후인 1610년에 매창은 서른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급경사바위 길을 내려온다. 길 찾아 미끄럼 탔는지, 눈 위를 달렸는지 정신이 없었다. 날씨도 푸근하여 등거리 잔등이 땀으로 축축하다.

`그라스도 애물단지라 벗어 넣었다. 가까스로 안부에 닿자 이젠 세봉이 삼각뿔처럼 앞을 가로막는다.

 

잿빛하늘은 설사라도 났던지 눈발 쏟는 걸 멈추질 못하고 있다. 나무들은 눈 폭탄에 주눅 들어 고갤 숙이고 다소곳하다.

일단의 등산족들이 눈사람처럼 나타났다. 이런 땐 서로가 사뭇 반가운 모양이다. 인사도 입`서비스가 아닌 정감이 흐른다. 그들의 얘기소리가 유일한 울림이 돼 산릉을 타고 있었다.

 

눈발 쏟아지는 산릉에 서서 시간을 정지시켜 봐라. 모든 걸 잃어버렸음 싶다. 잊을 수만 있담 잊고도 싶다. 일상의 무거운 짐 놓고 가볍게 일어서 수 있음 얼마나 좋으랴!

매창은 썩 미인은 아니었든 듯싶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조관기행(漕官紀行)>엔 그저 그런 인물로 그려놨었다.

 

16017, 허균은 전운판관(轉運判官)으로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엘 왔다가 비가 많이 내려 부안에 머물게 되었고, 이때 매창을 만나게 되었다.

 

“23(임자).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 이귀(李貴)의 자)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허균의 조관기행(漕官紀行)>

 

세봉을 오른다. 땀이 속옷을 적셔 자켓까지 누습에 젖게 한다.   ‘고어텍스는 체온을 밖으로 발산시켜 쾌적한 상태를 유지시킨다,’ 고 선전하지만 맬짱 도루목 같다.

비싼 값만큼 사기당한 기분이 든 건 한두 번이 아니다. 매창은 무명 곰배바지 걸치고도 나와 마찬가지여서 어차피 젖은 옷을 세탁해 땀을 뺐으리라. 습한 고어텍스는 세탁 안해도 된다든가?

 

값싸고 위생적인 무명옷 - 그러고 보니 천지가 하얀 목화밭이다. 저게 전부 무명실 뽑을 목화라면 우린 눈 폭탄 아닌 돈벼락 맞은 게다.

어릴 적 목화밭이 그립다. 아니 목화꽃 피우기 전의 다래 맛이 그립다. 그 달짝지근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그립다.

천하의 한량이던 허균이 매창과 살을 섞지 않았음을 실토한 것은 절친 이귀의 여자여서도, 미인이 아니어서도 아니었다.

 

시담(詩談)을 나누다보니 그녀의 재능이 육체를 탐할 순 없는 고매한 경지여서 아끼고 싶어서였으리라.

허균은 나중에 부안에 내려와 우반동(愚磻洞)에 정사암을 세우고 홍길동전을 쓰면서 매창과 수 없이 시문을 나눴다. 후에 허균은 매창의 부음을 접하고 애도사를 썼다.

 

계생(桂生, 매창의 다른 이름)은 부안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介潔: 깨끗하고 굳음)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허균,병한잡술(病閑雜述)>

 

드뎌 세봉에 올랐다. 눈발이 뜸해지고 잿빛구름은 엷어진다. 날이 쬠 드는지 사위가 밝아졌다. 수많은 잔챙이 가지를 뽐내는 소사나무군락과 산죽떼거리는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안간힘을 쏟는 몸살기로 이따금 눈 다발을 쏟아내고 있다.

바위들은 두텁고 흰 무명이불을 덮고 깊은 겨울잠에 빠져있고, 소나무는 허리가 휠대로 휘어 곧 넘어질 자세다. 세봉 삼거리부터는 완만한 능선길이어서 긴장을 푼다.

 

이제부터 설국의 설경을 맘껏 즐기기로 했다. 줄곧 앞서가다가 멈춰서 나를 기다려주곤 하던 일행 네 분은 이젠 위험구역은 벗어났다는 안도감에선지 총총히 사라져버렸다.

매창은 허균과 명월암에도 올라 선()에 들기도 했던지라 유명한 내소사와 그 뒷산인 세봉과 관음봉에 안 왔을 리가 없다. 매창은 이쯤 어디에서 청련암을 관망하며 시상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시를 매개로 당대의 출중한 문인인 한준겸, 권필 등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던, 그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시기(三大詩妓)로 불렸던 고매한 기생 이였.

그녀를 기리는 부안읍 공원엔 그녀의 시비(詩碑)가 몇 개 세워졌다.

취하신 님께 -이매창-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어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님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요.“

 

내소사일주문 앞에 섰다. 내소사에 참배하고 오겠다며 홀연히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한 참을 눈길 멈췄다. 그녀의 시혼(詩魂)은 산수자명(山水紫明)한 내변산의 정기에서 발아됐을 테다.

요즘도 참선(參禪)을 하는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려.” 한양에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안부편지 한 줄이다.

천하의 한량인 허균도, 천하에 예학의 거두인 유희경도 경애해마지않았던 그녀를, 그녀의 인품을, 그녀의 고결한 시혼의 그림자나마 동행해 봤다.

배꽃마냥 흩날리는 눈꽃 난분분하는 내변산에서-.

2014.12.13     

              * 신병주 건대 사학과 교수의 '매창'을 참고함.

 

 

 

 

 

 

 

 

 

 

 

 

 

 

 

 

 

 

 

 

 

 

 

 

 

 

 

 

 

매창(梅窓, 1573~1610)은 조선 중기 전북 부안의 기생이었다.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시기(詩妓)라고 불렸다.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과 주고받은 연시(戀詩)는 오늘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유희경은 1532년 부안에 내려왔다가 매창을 처음 만났으나 헤어졌다. 그러나 2년 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매창과 이별하게 되었다.

그 때 매창의 나이는방년 21세. 유경은 매창의 가슴에 깊은 정을 남겼다. 그 정은 매창의 시심으로 피어났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부안읍내 성황산 서림공원 입구에 있는 매창의 '이화우' 시비

흔히 ‘이화우’라는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매창의 여러 시 가운데 유일한 한글시조다.

매창은 봄날 흩날리는 배꽃을 보고 이를 ‘이화우(梨花雨)’

라고 표현했다. 하늘이 준 재주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표현이 아닐까. 아마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듯한

한시 한 편이 더 있다.

東風一夜雨(동풍일야우)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니

柳與梅爭春(유여매쟁춘)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對此最難堪(대차최난감)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건

樽前惜別人(준전석별인) 잔 잡고 정든 님과 이별하는 일

매창이 이러할 진대 그립기는 유희경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한양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늘 매창이 살고 있는부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잎에 비 뿌릴 제 애가 탄다오 

유희경의 '매창을 생각하며' 시비

매창이 화우(梨花雨)’라니 유희경은 ‘오동우(梧桐雨)’란다.

두 사람이 이별할 때 계절은 봄이었는데, 그 새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두 계절 동안을 보지 못하고 지낸 셈이다.

그럭저럭세월은 다시 수 년이 흘렀다. 유희경은 유희경대로,

매창은 매창대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게 되었다.

이런 경우 씻기 어려운 정한(情恨)을 안게 되는 쪽은

대개 여성이다. 특히 당시 매창은 ‘노류장화(路柳墻花)’랄 수 있는 기생 신분이었다.

마음에 이어 몸마저상한 매창이 남긴 단장시 한 편을

소개하면,

相思都在不言裡(상사도재불언리) 말은 못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一夜心懷鬢半絲(일야심회반사)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欲知是妾相思苦(욕지시첩상사고)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須試金環減舊圍(수시금환감구위)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