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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창덕궁후원(비원)의 황홀한 만추

만추의 비원을 걷다 - 창덕궁

 

엊그제 상경하자마자 나는 후원의 만추 나들이를 언제 하느냐?로 마음 조이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애들이 귀국해 모두가 바쁜 경황속에서 혼자만 한가하게 빠져나오기가 멋적고 미안해서였다.

"단풍 지기 전에 후원엘 가고픈데 동행할 사람?" 라고 식구들을 향해 뚱단지 제안을 했다. 시큰둥하게 눈길을 피하며 아내가 맞받아친다.

 "이 와중에 --, 당신이나 후딱 갔다와요." 난 누구 눈치 볼 맘도 없었다. 휑하니 집을 나섰다. 돈화문을 들어선 시각은 오후 1시45분, 함양문에서 2시에 단체로 2차 후원입장을 하기 땜 이었다. 

함양문일대 숲은 곱게곱게 물들어있었다. 해설사를 따르는 탐방객들이 좀 많다. 후원의 단풍을 감상하려는 탓이리라. 

 

                                      ▲ 후원입구 ▼

부용정을 향하는 숲길은 빨`주`노`초`파란색으로 뒤범벅이 된 채 청명한 푸른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가을 스스로 황홀해져 부르르떨고 있었다. 이 얼마나 안성맞춤한 절호의 시각인가!

불과 몇 분 전엔 칙칙한 겨울옷을 걸친 서울사람들한테선 상상도 못할 계절의 사잇길목이 눈부시게 펼처지고 있는 거였다. 맘에 오색풍선을 달고 부~웅 뜬다.

 

               ▲ 부용정입구       ▼ 부용지와 섬의 소나무

부용정에 닿았다. 비취빛담(潭) 가운데 섬에서 솟은 구부정한 소나무는 부용정을 향해 손을 내밀고, 두 발을 못에 담군 채 반기는 부용정처마는 자연이 빚은 '천지창조'다. 

그 뒤로 비각이 곱게 물든 색색의 단풍을 병풍으로 휘둘렀다. 부용정 맞은 편에 주합루가 있는데 아래층은 규장각이고 윗층은 열람실이라.

주합루에 들기 위해선 어수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뜻은 왕이 백성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정조의 혜안이 형형한 건축물이다. 정조는 조선조 오백년의 르네상스를 수 놓은 성군이였다.

 

                      ▲ 어수문과 주합루          ▼ 선향각

만추, 이맘 때(음1781.9) 정조는 후원을 걷다가 혼자만 즐기기가 아까워 강세황을 부른다. 정조가 시서화(詩書畵)의 삼절이라고 칭송하는 그를 불러 규장각 대금전에 병풍쓸 것을 명했던 참이었다. 정조가 세황에게 말 한다.

"여기에 구경할 만한 좋은 곳이 있는데, 먼저 글씨를 쓰고 가겠는가, 아니면 구경하고나서 쓰겠는가?"라고.                                                    세황이 황송해 우물쭈물하자 정조 왈,

"먼저 구경하고나서 쓰고 싶은 게로군"이라고 스스로 답하며 세황을 동행케하여 후원구경을 시켰다. 후원은 임금 이외에 누구도 들어설 수 없는 비밀의 궁원-비원(祕苑)이었다.

정조가 그 비원을 신하들과 공유하는 파격을 한 현군이였고 이후 왕은 비원에 신하들을 초치해 정사와 향응을 즐겼다. 

 

            ▲ 어수문에서 본 부용정     ▼ 영화당에서 본 주합루

정조를 따라나선 세황은 감격, 감탄 그야말로 황공무지였다. 화가의 눈에 비친 비원의 만추는 어땠을까!? 를 생각하다 감격을 뺀 감탄을 연발하는 지금의 나로 돌아왔다.

'피아골의 단풍을 보지 않고 단풍봤다고 하질 말라'고 했던 남명선생을 떠 올리며 이곳 '비원의 만추를 보지 않고 공원의 가을을 봤다고 하질 마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실제 이곳 비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1997.12)에 등재된, 가장 자연친화적인 공원으로 동북아3대정원의 하나인 것이다. 북악산의 응봉(鷹峰)산자락을 훼손하지 않고 조성한 공원은 흔치 않음이다. 천연조경인 것이다.

 

                                   ▲  애련정    ▼ 애련지

영화당 앞 노송이 하늘을 가린 마당은 활궁터로, 마상경기장으로, 과거시험장소로도 쓰였더 곳이란다.  정약용은 서투른 말타기로 연회장을 웃기기 일쑤였고, 과거시험이 치뤄질 땐 응시생보다 보조생(컨닝 조력자)이 더 많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허나 왕이자 탈랜트였을 정조는 궁수도 상궁수라 50발 쏘면 49발을 명중시키며 부러 1발을 헛쏘곤 했단다.  가득 차지 않은 여유를 즐김이라.

과녁을 어디다 앉혔는지 감 잡을 순 없지만 정조의 화살이 솔잎과 단풍을 뚫고 창공을 향했을 정황을 그려봤다.

 

                       ▲ 애련지의 단풍     ▼ 영화당

'물 없는 물고기를 상상할 수 없듯, 백성 없는 임금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정조였기에 비원을 개방했을 테다. 일개  촌놈인 내가 왕이 거닐고, 명신들이 조심조심 뒤따랏을 비원의 만추를 흡취하며 산보한다는 행복이 꿈같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새끼를 가슴에 묻고,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하자고  피눈물로 애원하는 세월호유가족들의 비원은 그렇다쳐도, 위로차원에서라도 녹지원엘 초청하여 몇 분간이라도 눈인사 하는 열린 대통령이었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이백삼십 년 전에도 했던 소통이 왜 두절돼야 만하는걸까?

 

 

                                   ▲ 애련지와 ▼ 금마문

애련지에 들어섰다. 거대한 통돌을 ㄷ자로 쪼아내어 세운 불노문(不老門)을 드나들면 영원한 청춘일 수 있고, 장희빈을 껴안고 만추의 애련지에서 노닥거릴 수 있다고 여겼을까? 아니다, 오는 겨울이, 가는 세월이 허망했을 테다. 

애련지에 핀 또 하나의 황홀한 비원을 놓치고 싶질 않았을 숙종을 생각해본다.  애련지에 배를 띄우고 단풍으로 번진 오색물위를 미끄러지며, 뉘웃대는 가을햇살에 몸과 맘을 맡기면 단풍이 다 져도 '마지막 잎새'에 기도하 듯, 이파리 하나 만이라도 남아있길 바래고 싶었을 게다.  

                               ▲ 애련지 & ▼ 애련정

부용정과 애련지가 담은 가을은 또 어떤가! 아니 사계(四季)의 신비경을 호수에서 정취하는 맛과 멋이란 호사의 극치일 테다. 정원은 사람이 자연을 끼고 조화롭게 만들 때 문화예술의 풍치미를 발한다. 비원은 그런 문화예술의 절정이다.

왕만을 위한 정원, 공간을 신하들과 공유하고, 나아가서 유흥문화로까지 발전시킨 데는 정조의 탁월한 탁견 땜 이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열어 신하들이 학문과 정사에 진념토록 하며 휴식의 공간으로 비원을 제공함이라. 문예부흥이 정조 때 꽃 피운 소이였다. 

                           ▲ 관람지와 입구의 단풍 ▼

연못이 자연 그대로 어울린 관람정과 존덕정이 S자의 못 속에 오수에 든 성싶게 나른해 보인다. 못 위를 겹겹이 차일 친 고목들과 단풍들은 선계를 이룬다. 서울도심 한 복판이 이렇게 불타고 있는데 서울사람 대다수가 모르고 살고있다는 사실이 기이하다.

겹처마지붕의 존덕정은 독특한 양식으로 인조가 세웠단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가 청나라의 건축양식을 본 떠 지었단 게 아이러니하다.

병저호란때 불모로 잡혀간 봉림대군이 심양의 고궁인 대정전을 보고 제안했다지만.  존덕정 현판은 봉림대군의 아들인 현종의 어필이란다. 

 

                                 ▲ 존덕정    ▼  펌우사

존덕정과 관람정에서 바라보는 연못은 자연속에 녹아든 정원의 극치미가 어떠한지를 절감케 한다. 존덕정도 여느 정자처럼 두 발을 존덕지에 담궜으나 관람정과 펌우사는 땅에 발디뎠다.

정자를 불태우는 단풍은 연못에서 그 불꽃을 사윈다. 그 황홀경을 굽어보는 두 갈래의 쌍송(雙松이)라니~! 다분히 작위적이면서 전혀 작위적이지 않다.

불꽃 속의 난렵한 정자의 처마는  푸른하늘로 솟구쳐 단조로울지도 모를 공간미를 창조했다. 까만지붕의 리드미컬한 선이 하늘금을 그었다. 용머리 치솟은 기와집만이 그려낼 수 있는 선의 미학이란 생각이 들었다. 

 

                                    ▲ 존덕정과 단풍 ▼

온갖색들을 무작위로 흩뿌려놓은 숲길은 적요하기까지 하여 일상의 찌거기를 말끔히 씻어낸다. 얉으막한 언덕배기를 오르며 황홀한 색의 잔치에 낀 나는 몇 번이나 팽이 돌듯  빙빙 돌았다.

푸른하늘이 오색의 원주가 됐다. 유모차에 애를 태우고 탐방 나선 젊은 커플이 무척 근사해 보였다.

언덕을 올라서 우회하다가 급히 좌로 방향을 틀어 획 굽은 오솔길을 내려가면 옥류천이라. 스스로 신선의 세계에 들어섰다고 감탄했던 강세황은 그의 '호가유금원기'에 이렇게 썼다.

 

                                        ▲ 소요정과 ▼ 취한정

"푸른 솔, 붉은 단풍이 양 옆에 비치니, 마치 장막을 두른 듯 동천에 들어간 듯, 머리들고 이리저리 눈여겨 볼 겨를이 없다. 한참을 걸으니 언덕이 있고, 언덕을 넘어 잠시 걸으니 숲이 트이고 시야가 환히 열렸다. 바위언덕과 솔숲 사이에 정자가 있는데 '소요정'이란 현판이 붙었다. 낮은 담이 옆으로 둘러 있고, 정자 앞엔 바위가 옆으로 누웠다. 거기에 글씨 두어 줄이 새겨져 있으나 이끼 끼어 읽을 수가 없다. 바위 아랜 반석이 편편하게 깔려 있고, 둘레가 한 스무 걸음 넘을까 싶다. 바위에 골을 파 물을 흐르게 하여 술잔을 띄울 수 있게 물굽이를 만들었다."

  

                             ▲ 옥류곡 소나무와 유상곡수 ▼

유명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 물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그 잔이 자기 앞에 왔을 때 시를 읊는다는 풍류는 친자연 속의 놀이예술일 테다.

거기 위이암에 새겨진 글씨 '옥류천'은 인조의 글씨고, 어제시는 숙종의 글씨란다.

흐르는 물 위의 술잔이 또 한 잎 떨어진 홍엽과 떠내려오는 만추의 시연은 상상 만으로도 고상한 정취가 물씬 베이는 것이다. 그 뒤로 몇 걸음 걸으면 짚으로 이엉을 한 청의정이 독특하게 서 있다.

 

                                     ▲  창의정과 단풍 ▼

청의정은 아주 작은 논 가운데 자리했는데  해마다 왕이 친히 벼베기를 하며 친경례(親耕禮)란 의례를 치뤘다고 한다. 또한 연못에서 낚시를 했다고도 하는데 인조는 백성을 위한 위정보다 신하들과 연회즐기기에 올인했을 지도 모른다.

인조가 여기서 한가하게 노닐다가 오랑케(청)의 침입으로 허둥지둥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가야했는데 그 경황을 유추해 봤다. 치욕의 삼전도를 생각이나 했겠는가.  옆의 태극정에 앉아 옥류천계곡을 물들인 만추의 풍광에 빠져들면서 말이다.

 

                                      ▲ 태극정과 ▼ 농산정

앞의 꾀 넓은 농산정엔 탐방객들이 망중 한을 즐기느라 모처럼 얘기꽃을 피운다. 청의정을 보다가 강세황이 설흔여섯에 그렸다는 초당한거도(草堂閑居圖. 초옥에서 즐기는 여유로움)가 떠오랐다.

"은은하게 아득히 바위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샘물(隱隱幽岩曲曲泉)        돌숲 사이의 초가집엔 두세 개의 서까래만 있다(石林節屋兩三橡)"고 읊은 명나라 이동양의 시를 읽고 그렸다는 그림 말이다.

 

                                          ▲ 옥류천과 단풍 ▼

옥류정을 뒤로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언덕배기를 올라 울울한 단풍 숲을 헤친다. 신선원쪽 가는 숲길을 한참동안 거닐면서 만추가 주는 소요속이 포만감에 흠뻑 취했다.

구릉을 넘기 전 아까 들렀던 애련정 금마문을 통해 들어서는 후미진 곳을 살폈다. 효명세자가 학문에 전념했다는 독서실 두 채가 을시년스레 있다. 이 찬란한 계절에 음침한 숲 속에 흉가처럼 말이다.

궁중과 백성의 기대와 총애를 한 몸에 지녔던 세자는 꿈을 펼치지도 못하고 순조의 수렴청정속에 삼년 간 선정을 베풀다 22살에 요절했다. 그 까닭 한 축이 북향받이 음침한 별궁에서 생활한 탓이란 설왕설래를 생각케 하는 거였다.

 

▲ 숲길과 ▼ 효명세자 독서실

효명세자가 부왕 순조를 위해 세웠다는 120칸짜리 사대부집을 향한다. 단청을 생략한 연경당은 남자와 여자의 생활공간을 유기적으로 나눴다.

연경당 동쪽 정자의 주연(主聯)엔 '임금 조서는 글이 아름답게 빛나고 궁궐엔 말씀 조용하네'라고 써 있다. 임금의 언행이 세상의 모범이 됨을 예찬하는 구절이다.

온갖 감언이설 공약(空約)을 남발하며 당선되면 그만인 공염불대통령을 위시한 정치인들이 새겨볼 주연이다. 연경당은 갑신정변때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들이 고종을 뫼시고 피신한 곳이기도 하다.

 

                                ▲ 연경당과 ▼ 농수정

연경당 구석구석을 거닐며 사대부집안의 풍속도를 그려본다. 임금과 왕실의 언행과 생활상은 그대로 백성의 귀감이었다. 오늘날 세상이 어지럽고 불신이 만연한 건 박대통령이너써클을 비롯한 최고위직의 감언이설 탓이 클 테다.

강세황은 회갑이 지나 정조의 부름을 받아 비로써 관직에 나갔다. 김홍도의 스승일 정도의 학예에 출중 했으나 수신제가의 삶을 잊지 않았다. 그는 독백한다.

"세상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나 스스로 즐긴다(人邦得知, 我自爲樂)"  삶이란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 즐거워 하는 탄탄한 정신력이다. 라고 말이다.

                                ▲ 연경당 가옥 &  산책길 ▼

 

후원은 나 같은 서민보다도 정치인과 고위직 관료들이 탐방하여 후원이 간직한 역사적사실을 반추하며 위민의 귀감으로 삼았으면 싶었다.

정조가 세운 규장각에서 위민정치를 어찌해야 되는지를 며칠간 세미나 열면 어떨가 하고 말이다.  그런 후라면 '김영란법'을 만드는데 이렇게 굼벵이 꼼수짓 아니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2014. 11.18

 

                              ▲ 인정전                           숙정문 ▲

▲ 낙선재와 연경당담장▼

 

                            ▲  대조전 뒷뜰과 어수문▼

 

                                        ▲ 주합루와 귀목▼

 

                            ▲ 선정전 담장과 영화당 마당▼

 

                                      ▲ 애련정과  못 ▼

 

                           ▲ 애련지 단풍과 관람지 단풍▼

 

                             ▲ 존덕정옆 숲길과 존덕정▼

 

                                    ▲  관람정과 단풍▼

 

                              ▲ 펌우사와 단풍▼

                                    ▲  태극정과 향나무▼

 

▲ 연경당가는 길과 쪽문▼

 

 

 

▼ 대조전과 단풍 ▲

 

▲ 대조전과 어위청▼

 

▲ 인정전회랑과 선정문▼

 

▲ 대조전과 뒤뜰▼

 

 

▲ 대조전 뒤뜰▼

 

▲ 희정당과 낙선재 앞뜰▼

 

▲ 희정당과 금천교▼

▲ 낙선재와 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