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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아

꿩 저만 춥지, 라고?

꿩 저만 춥지, 라고?

 

 

내가 초딩생일 때 어머니께선 나를 한 번 웃기신 적이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꿩 얘기였다. 평소 과묵하시고 언변도 없으신 당신께서 왜 웃기신 얘기를 했었는지를 기억은 없지만 이야기 줄거리만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맘때쯤의 겨울어느 날 이였단다.

좀 찌질한 사내가 치(덫)를 놔 꿩 한 마리를 생포해 신바람이 났었다. 그는 꿩 목을 비틀어 잡고 털을 뜯으며 콧노래를 불렀겠다. 맛있는 꿩국을 먹을 군침에 흥이 돋은 사내는 꿩의 한쪽 털을 다 뜯고 반대쪽으로 뒤집으려는 순간 꿩이 손아귀에서 빠져 달아났다. 섣부른 모가지 비틀기에 꿩은 절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쪽만 털이 뜯긴 꿩은 뒤뚱뒤뚱 달아나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사내는 긴 막대로 쫓아내려 안간힘 쓴 만큼 꿩은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가 오리무중 이였다.

약이 오를 데로 오른 사내는 씩씩거리다가 꿩 저만 춥지라고 씨부렁대며 투덜댔단다.

엄동설한에 한쪽 털이 뜯겨졌으니 얼마나 춥겠느냐? 고 꿩에 대한 측은지심 아닌 자신의 허탈감을 그렇게라도 달랬다는 거였다.

잔뜩 기대했던 욕망을 채우기 전 목전에서 실기했을 때의 허탈감을 그렇게라도 위무하지 않곤 억울함과 허망함을 달랠 수가 없었던 거였다. 사내의 낭패감은 꿩의 추위보다 더 했을 테다.

 

 

 초상이라도 났음 싶다

엄마, 무슨 말이야? 초상이라니?” 엉뚱한 소리에 둘째가 의아해 물었단다.

“00동 고모부 말이다. 치매로 가족들 고생 그만쯤 시켰으니 이젠 가실 만하지 않느냐. 그래야 니 아빠도 올 거고.”

팔십을 훨씬 넘긴 자형님께서 치매로 요양원신세 진지가 벌써 몇 년째라 수발하느라 누나와 애들이 여간 고생하고 있어서 뱉는 아내의 푸념 속엔 정작 딴 뜻이 내포 돼 있었다.

신정동 사시는 자형님께서 돌아가셔야 내가 나타날 거고, 그래야 이것저것 내 손길 기다리는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기에 언감생심 흉심을 감추고 하는 소리였단다.

그렇게 나란 존재가 궁했던 아내에게 치산누나는 자신도 모르게 천사노릇을 한 셈이다. 지난 9일 밤에 치산누나는 나더러 쌀 몇 가마니 갔다먹으라고 전화를 하셨다. 난 어찌할지를 몰라 아내와 상의하여 알려드리겠다고 전활 끊었다.

몇 가마니가 필요하며, 쌀값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였다. 지금까지 그런 문제는 아내의 권한(?)이란 듯 문외한인 척 살아왔기에 순간 당황하여 대뜸 아내핑계를 대고 있었다.

하여 아내에게 전화를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나에게 곧장 전화  해야 해서다. 지난 달포동안 이 악물고 외면했던 아내에게 전활 넣었다

아내는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쌀 문제는 다음주말(17일 고향곗날)로 미뤄두고 내일 아침에 상경하라는 당부(?)였다. 할일이 좀 많은데 한가하게 그럴 수가 있느냐? 고 나무라 듯 하소연하고 있었다.

삐져서 보따리 싸 가출한 나의 행위는 무시한 채 아니, 잠시 외출하지 않았냐는 듯 시침이 뚝 떼고 빨리 상경하라고 채근만 하는 거였다. 럴 땐 몇 십 년을 한 이불속에서 살아온 아내지만 난 얼른 그 음흉한 속을 간파 못해 당황하곤 한다.

건수도 안 되는 언쟁으로 심사 뒤틀리게 하여 내 깐엔 심각하게 제안했던 내가 나갈 테니 3억만 주라라고 했던 폭탄선언에 알았어, 나간다면 누가 겁날 줄 알고, 맘대로 하셔라고 응수했던 아내였다.

그래서 나는 3억을 빼갖고 시골에 짓다만 집을 5천 들어 짓고 나머지 돈으로 사는 날까지 살다가 죽자고 보따리 싸서 가출했던 운명의 결단 이였던 거였다.

(아직 3억은 내 호주머니에 들어오진 안했다) 그 심각한 나의 일생일대의 결단을 코믹한 넌센스로 둔갑시키는 수화기 속의 아내에게 기가 질려버리고 만 것이다.

근데 참으로 이상 한 건 화가 솟아야 할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채 아내에게 화를 내긴 커녕 몹시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낼 아침 상경할 마음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였다.

쌀 얘기하기 전까지 탄탄했던 나의 홀남의지는 허망한 사상누각 이였단 말인가. 잠시 후 둘째가 신바람난다는 듯 수화기속에서 호들갑을 떤다. 아내로부터 나의 상경뉴스(?)를 들었던지 환영나팔을 부는 거였다.

벌써 나의 상경은 이미 기정사실로 공지돼 버렸다. 그런 아낸 지금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못 의시 대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그렇지 꿩 저만 추웠지라고 깨소금씹듯 입맛다시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상경하여 아내와 맞닥뜨렸을 때 둘째의 수다를 듣다 조금은 위축감에서 벗어나 어깨에 힘을 줄 수가 있었다. ‘꿩처럼 추운 건 나뿐이 아니라 아내도 속이 상 할대로 상해 나의 추위보다 더 심난해 했다는 걸 알았던 땜이다.

사실 지금까지 애교나 어떤 립`서비스도 기대할 수 없었던, 무뚝뚝함이 자기만의 애정표현인양 도도(?)했던 아내가 나를 대하는 눈치가 좀은 달라져 있었다.

둘째의 말인 즉, 내가 3억 갖고 귀촌하면 어찌해야 할지를 은근히 고민고뇌 했다는 엄마였단다. 그런 정황을 들으며 꿩 저만 춥지는 오로지 아내의 몫일 뻔 했다고 자위 삼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고소를 씹었다.

아내의 울 떠난 가출이 춥긴 했지만 나름 홀남생활의 재미와 자신감과 몇 가지 요리도 해냈으니 아내의 상상대로 추위에 오들오들 떨지만은 안했단 걸 어떻게든 인지시켜 으스대고 싶은 나였다.

아니 나의 가출이 허세로 끝났다는 속단은 아내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 어설프나마 나는 그렇게 뻐기고 싶기도 했다, 내가 할 일을 마치고 다시 가출하면 되는 거라고 우기고 싶었다. 허나 그건 내 생각일 뿐 아내의 눈치는 태평성대다.

삐져 토라져 헤어진 한 달반의 서먹한 공백은 집안에서 그림자도 찾을 수 없이 화기가 넘치고 내 마음만 궁색한 느낌 이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린 눈길을 피하던 아낸 나더러 뭘라 빤히 처다보요!”라며 투정어린 외면을 하는 거였다.

부부를 연결한 끄나풀은 알다가도 모를 오묘한 고래심줄일까? 때론 금방 끊어질 것 같다가도 의식하지 못함 속에서 이어져있음에 놀라게 된다. 하여 삐져 토라져 애증의 나날들을 보내더라도 추운 건 누구의 일방적인 몫일 수가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출한 자도 춥고, 남은자도 기댈 벽이 사라져 춥긴 매한가지다. 부부는 평생을 서로가 감싸고 보듬어주는 동반자이기에 어느 한쪽의 상실은 방한벽이 사라져 엄동설한에 무방비인 채 치떨어야 하는 땜이리라.

 

 

설마 했던 남편의 배신에 치를 떨며 고래고래 악쓰다 권총을 난사하며 발광했던 소피아는 다음날 아침 남편이 가출했단 걸 알고 호수에 몸을 던진다가출한 남편이 추운 게 아니라 기댈 방한벽이 사라지고 투정부릴 상대가 없다는 허탈감을, 찬바람과 맞설 자신의 외로운 앞날을 상상하기도 싫었던 충격이였던 거였다.

아내의 발광에 애증과 경멸의 화신이 된 톨스토이는 가출 십 일 동안, 엄습해 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애타게 아내를 찾는다. 영원히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던 아내가, 미워 환장할 만큼 옹졸해 보였던 아내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사랑해 준 유일한존재란 걸, 그래 죽어가며 애타게 찾았는지 모른다.

꿩 저만 춥지는 부부사이엔 한갓진 푸념일 뿐일 것 같다. 누군 춥고 누군 더울 수가 없는 게 부부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2015. 0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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