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4기를 행복하게

 

                               -카멜론의 사진중에서-

 지난 7일에 이어 닷새 만에 문상을 가야함은 겨울이란 계절 탓만은 아닐 것이다. 7일엔 서울 삼성강북병원영안실에서 큰애의 시아버님(나와 사돈지간) 영결식이 있었는데 오늘은 광주 금호장례식장 영안실을 찾아 둘째누나의 명복을 빌어야 했다.

세수 여든 셋인 사돈님도 오년이상 치매를 앓고 계서 요양병원생활을 하셔야했고, 나의 둘째누나 역시 치매로 십여 년을 고생하시며 병원신세를 지다 향년 아흔네 살로 운명을 하셨다.

사돈은 이남삼녀, 누나는 이남이녀의 자식을 슬하에 두셨고, 자식들 모두 훌륭한 사회인으로 장성하여 각각 제 분야에서 성실히 살아가고 있어, 고인이 된 두 분은 주위사람들의 귀감이 될 만한 성공한 인생을 사신 분들이다.

서울노량진 태생인 사돈은 일찍이 젊은 시절 외국에 나가서 몇 십 년을 사신 분이셨다. 하여 자식들 모두가 외국에서 살고 있어 내가 문상 갔을 때가 운명하신지 이틀째인데도 영안실엔 안사돈님과 며느리 한 분만이 문상객들을 맞고 계셨다. 이틀째 밤에 미주지역과 싱가포르에서 황급히 귀국하여 들어서는 상주들이였다.

사돈님이 오랫동안 치매로 가족들을 피곤하게 해설까? 아님 어렸을 때 부터 외국에서 자라 자립생활이 체질화된 데다 먼 거리라서 자주 만나지 못하고 살아온 소원함에 개인주의가 몸에 밴 탓인지 영전앞결코 비통해보이지만은 않아보였다.

오늘 광주 금호장례식장 누나의 영전 앞에선 나와 상주와 문상객들도 장례식이란 통과의례를 치러내는 형식이상의 애통함을 실감하긴 뭣했다. 고인의 영가 앞에 모여든 상주와 친족들, 문상객들이 먹고 마시며 담소하는 잔칫상은 마치 죽음을 기다렸다는, 이제 걱정거리 하나를 덜었다는 홀가분함을 즐기는 건 아닌지 하는 경망한 생각까지 들기도 하였다.

 누나의 큰딸이 나보다 세  살이나 위였기에 어머님 같았던 둘째누나는 내가 중학교 유학 때 삼년간을 뒷바라지 해주셨다. 중학생 이후 오늘날까지 소원하게 살아 온 불경죄는 내 몫일 테지만 애초의 원인제공은 당신 이였다. 결단코 있을 수 없는 그때 누나의 실수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오늘 누나의 영전 앞에 서서 나는 당신의 실수를 최소한 당신의 자식들에게만은 생전에 고백하고 운명하시기를 염원했노라고 고했다. 불쌍하고 불행했던 당신께서 그 일(애먼 도둑)만 만들지 않았으면 어머니처럼 살가운 정 나누며 오늘날까지 살아왔을 테다.

이젠 소용없는 일이 됐지만 당신의 영전 앞에서 잠시 동안 말없는 당신을 원망의 눈으로 여미어봤다.  자못 그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도 누나의 일생은 고통과 비애로 점철된 비극 이였다. 교사였던 매형께서 6.25참극으로 정신병자가 돼 시작된 수난의 일생은 가히 필설로 쓸 수가 없을 테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불운한 누나의 피나는 고생으로 하여 슬하의 이남이녀의 자식들이 남보란 듯(대학교수 내지 사업가) 잘살고 있다는 거였다. 또한 그들-조카들이 내게 깍듯이 친절을 베풀며 문상자리를 뿌듯하게 해줘 고마웠다.

그들이 지 엄마와 내 사이에 빚어졌던 불상사의 진실을 알고 있던, 말던 간에 말이다. 젊은 시절을 온갖 불행으로 고생 하시며 형극의 삶을 사신 일생을 속속들이 알 자식들일 테지만, 영전에서의 애통해 함을 감지키 어려워 죽음이란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결코 슬퍼할 수만도 없는 삶의 변곡점이란 걸 생각게 했다.

 서울사돈이 그랬듯, 누나도 화장장의 불구덩이 속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 서너 뼘의 납골당공간에 닭장처럼 안치될 테다. 사돈은 몰라도 누나는 생전에 죽으면 화장하여 두 번 죽이지 말라고 했단다. 죽은 자가 불에 태우는지, 물에 넣어 물고기 밥이 되는지, 산야에서 짐승들의 먹이 감이 되는지, 땅 속에서 버러지먹이가 되는지를 알 턱이 없을 거다.

어떤 방법을 택하던 주검의 최후는 티끌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몇 십 년 후, 아니 몇 백`천년 후에까지 남는 것은 주검이 아니라 명예. 생전에 인류를 위해 공헌한 바가 없다면 주검이라도 사회를 위해 헌공하는 게 주검을 명예롭게 하는 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봐야함이다.

 

                               -카멜론의 사진 중에서-

의학계와 법의학계에서 카데바(cadaver)란 말은 은전(恩典)의 단어일 것이다카데바는 영국의 연쇄살인범 윌리엄 버그가 7파운드를 벌기 위해 살해한 16명의 시신 중의 불쌍한 한 여자의 이름 이였다. 18~9세기 영국에든버러의대병원은 학생들의 해부실습용으로 시신 한 구당 7파운드로 구입했었는데 범인이 그 돈벌이로 사람들을 살해 병원에 팔았던 거였다.

실습 중이던 의대생이 여체의 시신이 실종된 카데바란 걸 인지하고 신고하여 범인을 잡게 된 이후 실습용시신을 카데바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토록 장수하게 된 비결은 수많은 카데바가 있었기 땜이다또한 카데바는 법의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범죄예방과 억울한 사인(死因)을 밝히는 길을 열어 밝은 사회를 유지케 한다.

영국의 피터 라슬렛(인구사회학자)3기 인생(The Third Age)’이란 책에 인생의 삶을 4기로 구분한다. 태어나 취업까지의 1, 취업에서 퇴직까지를 2, 퇴직에서 건강할 때까지 3, 건강을 잃고 죽을 때까지를 4기로 구분시켰다. 자립하여 자신의 제대로 된 성취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란 3기라고 적시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성공한 삶을 살았던, 후회스런 생을 살아왔던 간에 죽는 순간까지 이웃과 사회로부터 입었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보은(報恩)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있다는 거다. 인류사회를 위해 자기의 주검을 잠시 기증하면 명예로운 죽음을 맞을 수가 있어서다.

그런 결단은 누구의 어떤 제약도 따르지 않는 오직 자신의 유언만으로 가능하다일생에 가장 외롭고 힘든 시기인 4기의 삶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서소문공원 순교자탑-

미국 테네시의대 녹스빌에 있는 2에이커에 달하는 시체농장(body farm)"엔 한 해 300여 시신이 기증되고 항상 20여 시신이 각양의 조건에서 학습실습용으로 쓰이는데 기증자 대게가 저명인사들 이였다.   우리나라는 아름다운주검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하여 제대로 된 실습과 연구를 기대하기 난망이란다.

화장 아님 매장으로 버러지 밥이 될 바엔 기왕이면 시신기증으로 인류에 이바지한 후에 화장아니 매장을 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주검이 될 것인가.

 사돈님에 이어 누나의 영전에서 그런 생각을 간절히 해봤다. 죽음을 맞는 의식은 관념이다. 세계의 수많은 민족과 부족은 각기 다른 장례문화가 있고, 그 의식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숭고함이 내재되 있으나 이민족에겐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풍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 몸 태어나 이웃 간의 유대와 공동체사회의 은덕에 힘입어 생명을 부지했기에 죽어서라도 시신을 사회에 기증하여 보은하는 아름다운주검의 문화를 꽃피웠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아니 거국적인 사회운동으로 승화되면 좋겠다.

그런 지고지순한 시신기증문화가 일상화된다면 장례식장에서의 고인의 영가도 더욱 명예로울 거며 문상객들도 한결 경건한 자세로 고인을 추모하며 명복을 빌게되지 않을까.

고인이 장수하신데다 오랫동안 병수발을 한 유가족들인지라 죽음을 당연시하는 불경은, 시신기증으로 재생한다고 생각할 때 애도와 추모의 정은 돈독해질 것도 같다.

215.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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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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