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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삐져 토라진 산 얘기 - 수락산

삐져 토라진 산 얘기 - 수락산

 

 

수락산(水落山)은 서울근교의 북한산(北漢山), 도봉산(道峰山), 관악산(冠岳山)과 함께 4대 명산으로 불린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산세에 거대한 암벽에서 물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 같다하여 수락산이라 불렀단다.

 

오전 10시 반쯤 장암역에서 내린 나는 곧장 서계(박세당1629~1703)의 고택엘 들어섰다.

부친 박정이 인조반정 때의 공훈으로 하사받은 사패지(賜牌地)가 여기 수락산 일대였는데, 서계가 한양서 조강지처를 사별한 직후 침거를 옮겨 농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척박한 산골을 일궜던 터란다.

 

서계는 이곳에 과실수를 심고 정착하여 산골에서 친자연의 세계에 취하여 학문에 매진하고, 깨우친 지식을 생활에 실천하는 실사구시의 선비의 삶을 35년간 했었다.

 

또한 서계는 수락산에서 십여 년간 스님생활로 은둔했던 매월당(김시습)을 흠모하여 그의 유적 밟기와 고매한 인품을 채 받기 위한 열심을 곳곳에 흔적으로 남겼기에 나는 그 그림자나마 찾아보고 싶었다.

 

 

고택을 나와 석림사를 향한다. 골짝은 깊고 녹음은 짙은데 가물러 끊긴 개울물살 대신 상가의 소란이 골을 매우고 있었다.

한참을 오르니 홍살문이 노강서원이란 대문 앞을 수문장서고 있다.

 

예가 바로 매월당 진영(眞影)을 모신 사당 청절사(淸節祠)이였다는데 그 자리에 노강서원(鷺江書院)이란 현판이 걸렸다.

노강서원은 숙종의계비인 인현왕후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박태보(박세당의 둘째아들)를 기리는 서원이다.

 

청절사는 서계가 매월당추모사업으로 무량사에 있던 선생의 진영을 여기에 모시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숙종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1701) 편액의 이름이다.

청절사를 하사받은 서계는 2년 후 타계한다. 그토록 매월당에 대한 존경심이 돈독했던 서계였는데 어찌 그의 둘째아들의 서원으로 둔갑했을까?

 

다시 골짝길을 오른다. 석림사경내에 들어섰다.

이 또한 서계가 매월당을 생각하며 은선암의 석현, 치흠 두 스님에게 암자를 세우도록 공사비 일체를 시주하여 건립한 암자였다.

 

1671년에 완성된 사찰은 매월당의 명복을 기도하는발원에서였다.  허나 6.25때 소실 돼 1960년도에 세워진 탓에 옛 때가 묻어나질 안 해 아쉬웠다,

사찰을 나서 골짝에 들어섰다.

 가뭄 탓에 바짝 마른 개울은 하얀 바위너덜이 두터운 신록터널 속을 마치 흰 물살처럼 흐르고 있다.

 

기차바위를 향하는 나의 발길은 등산로가 숲 갓길과 개울을 넘나들고 있어 초행인 나를 여간 신경 날 서게 한다.

간혹 마주치는 산님들에게 확인하며 골짝을 더듬는데 짙은 음영 속에서도 여름더위는 땀으로 멱을 감게 했다.

 

서계도 이 골짝길을 어지간히 래왕 했으리라.

처남매부 사이인 남구만과는 이 골짝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남구만은 여기 어느 바위에 수락동천(水落洞天)이란 글씨를 새겨 300여 년 동안 풍우에 씻긴 채 세월을 뛰어넘고 있단 데 찾을 수가 없었다.

 

 

남구만 뿐 아닌 윤증, 박세채, 최석정, 조태무, 최창대 등의 당시 명사들은 서계를 찾아 이곳 수락골을 찾아 유유자적했는데 명리를 초월한 올곧고 고매한 선비의 삶을 영예로 여겼을 테다.

 

 

지금 메스컴을 도배질하며 혼탁한 세상에 구정물을 끼얹는 총리후보자 문창극은 자만에 취한 독단으로 혹세하려다 구차한 변명을 토한다.

또한 김명수는 제자의 논문을 십여 차례나 도둑 내지 표절하여 입신하다가 교육부장관후보로 천하니 관행이란 듯 철면피하다.

어찌 가증스럽다 아니할 것인가?

문창극씨나 김명수씬 여기 수락산을 한 번 등정하며 서계와 매월당의 삶을 생각해 봤음 싶다.

그들한텐 지금까지의 명예와 부도 너무 과분한, 삐뚤어진 세상이기에 가능했음을 자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드뎌 삼거리 능선에 올랐다. 북서쪽에서 푸나무를 흔들며 다가오는 바람이 그리 시원할 수가 없다.

이제부터 수락산의 실체인 화강암바위가 떼거리로 나타나 울퉁불퉁 길을 막고 긴장케 한다.

밧줄을 타거나 네발로 기어 바위 떼를 따돌리니 뚱딴지같은 팻말이 눈길을 붙잡는다.

 

토라진 산의 기차바위를 안내하는 푯말이었다.

 이성계가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 하자 금강산의 잘 생긴 바위들이 이곳으로 달려왔단다.

바위들은 수락산을 멋있게 단장하려는 찰나 이성계는 북악산자락에 이미 도읍을 정해버렸다.

 

 

이에 화가 난 금강산바위들은 삐져 북악산을 배향하고 정상에 오르는 바위길도 널빤지처럼 깎아 세워 놓았단다.

그 바위가 아찔한 현기증을 일게 하는 기차바위다.

굵은 동아줄에 매달려 줄줄이 오르는 산님들이 기차처럼 보여 기차바위라 했을 테다. 실은 삐져 일어서 길 막는 심술바위인데 말이다.

 

암튼 난 그 기차바위를 밧줄을 가랭이 사이로 잡아당기며 혓바람 씩씩대며 올랐다.

30m는 너끈할 것 같은 널빤지 바위는 두 가닥의 밧줄이 아님 정상엘 오른다는 건 언감생심일 테다.

올라서 내려다보니 정말 아찔했다.  클라이머들의 정상에 선 기분을 느낄 것도 같았다.

 

수락정상까진 바위 떼들의 아우성이라.

그들만의 세상에 초대받은 손님은 소나무였던지 어우러짐이 가히 예술이었다.

지금은 불청객 아니, 이성계의 후예들인 산님들의 무단침입으로 몸살을 앓는 수락산은 화가 나서 토라지다 못해 증발할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봤다.

태극기 휘날리는 정상엔 산님들이 개선장군처럼 점령한 채 잘생긴 바위들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수락정상(638m) 바위는 산님들 등살에  부대낄수록 반질반질 윤택이 날 테니 금강산골짝에서 사람구경도 못하고 풍우에 닳는 것 보단 행운일 거란 생각도 해 봤다.

 

도봉산과 불암산 사이의 검푸름 속에 서울시가지는 하얀 각설탕을 차곡차곡 잘도 쌓아 놨다.

날씨가 흐려서망정이지 햇빛 쨍하면 각설탕건물들은 초록바다에서 눈부실 것이다

잘 생긴 소나무 앞에서 인증샷하려 디카에 쌍판 담아달라고 어느 산님 신세를  진후 매월정을 향한다.

 

 

수락산바윈 대게가 모나질 않했다. 틈세마다 키우고 있는 소나무마다 탄복하게 하지 않는 게 없다.

매월정에 섰다. 바위산정에 있는 단출한 정자는 도봉산을 마주하며 서울을 조망한다.

주위엔 매월당의 시비들이 즐비하다. 흡사 매월당기념 정원 같았다.

 

 

그 중 선생의 <증준상인 贈峻上人에서 발췌한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란 시 한 수를 옮겨본다.

온종일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가노라니

산 하나 넘고 나면 또 산 하나 푸르네

마음에 집착 없거늘 어찌 육체의 종이 되며

도는 본래 이름할 수 없거늘 어찌 이름을 붙이리

간밤에 안개 촉촉한데 산새들은 지저귀고

봄바람 살랑이니 들꽃이 환하네

지팡이 짚고 돌아가는 길 일천봉우리 고요하고

푸른 절벽에 어지런 안개 느즈막에 개네

 

금오신화의 저자 매월당은 천재신동으로 세종의 신망을 받기도 했는데, 삼각산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중 세조의 왕위찬탈을 목격하곤 책을 불사르고 벼슬길 나가는 걸 단념한다.

조정의 부름도 마다한 채 생육신의 몸이 되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 노량진에 매장하는 담대한 선비였다.

 

스스로 삭발하여 설잠(雪岑)이란 이름으로 동가숙서가식 하는 승려생활을 하다 수락산에서도 십여 년을 은거했었다.

말년에 부여 무량사에 머물다가 병사 했는데 선생을 흠모하는 후학들이 끊기질 않았다.

선생의 그런 충절과 탁월한 문장들은 선비들을 감흠케 했는데 서계도 그런 선비 중 한 사람 이였던 것이다.

 

매월정을 내려와 오던 길을 되짚어 도솔봉을 향했다.

독수리바위, 철모바위, 코끼리바위, 치마바위 등등 미처 이름 할 수 없는 갖가지형상의 바위들이 산능에 도열하여 거암전시장을 일군다.

거기에 더한 낙낙괴송들의 자태라니 감탄의 연발이었다. 산행하다보면 자연 속에서 바위와 소나무의 궁합이 얼마나 찰떡인지를 절감하곤 한다.

 

우리나라사람들, 서울사람들은 정녕 행운아다.

이런 산수자명하고 그다지 높지 않은 산세를 언제든지 찾아 벗할 수 있어서 말이다. 더구나 그 명산이 품고 있는 스토리텔링은 마음까지 살찌우게 한다.

그래서 산은 우리의 영육을 살찌게 한다.

 

금강산바위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다가 성급한(?) 태조 탓에 물먹었던 기암괴석들!

이젠 태조에게 고맙단 인사를 해야 할 판이다. 여기에 수도를 정했다면 수락산은 도심 한 가운데 자리하여 매연과 인파에 초죽음 일보직전이 됐을 테니 말이다.

 

 

그 멋스런 바위와 우아한 소나무들을 완상하면서 도솔봉(540m)에 올랐다. 오후 3시가 다 됐다.

노원골로 빠져 용문골을 훑고 학림사 들러 당고개로 빠지기로 한다.

학림사 갈림길에서 용문암자이정표를 찾을 수 있어 안심은 했지만 수락로엔 이정표푯말이 적었다.

더구나 들머리엔 안내소가 없어 산행지도도 구할 수가 없었다.

 

 

초행인 나는 산님들에게 묻고 또 물어야 했으니 갈림길이 나타나면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기 일쑤였다.

용문암에서 학림사까지의 산길은 녹음우거진 편한 트레킹코스여서 모쪼록 맘 놓고 여름신록을 즐기기도 했다.

난코스를, 예정한 등정을 마무리할 때면 홀로산행이 그리 뿌듯 할 수가 없다.

1300여 년 전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학림사를 찾아들었다.

정유재란으로 소실 된 사찰은 중수한지 일천하여 고풍스런 위엄은 느끼기 뭣했지만 몇 백 년 풍상을 견뎠을 반송은 감탄사를 절로 연발케 했다.

 

 네 활개는 경내 사찰을 향하는데 용트림하는 웅좌는 가히 언어도단이었다. 난 그 반송에 반해 한참을 서성댔다.

수락산골도 꾀 깊고 명당인지 곳곳에 암자가 발달했다. 불원간 오늘 미처 못 간 수락골짝을 더듬어야 겠다.

당고개역까진 반시간은 족히 걸렸다. 참으로 알찬 산행이었다.

2014. 0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