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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비봉까마귀와 눈 마추고 승가약수를 훔쳐? - 북한산(비봉능선)

 비봉까마귀와 놀다  승가사약수 훔쳐마셔? -  북한산 (비봉능선)

북한산둘레길8구간 - 구름정원길 불광사뒤에서 족두리봉을 오르는 길은 비공인 암벽길인데다 가파라서 여간 조심을 해야 한다. 초하의 쨍한 햇살은 화강암바위를 하얗게 부수며 바람을 몰고 왔다.

 

바위들의 짝 소나무그늘에서 맞는 그 바람은 땀 뻘뻘 흐르며 오르는 등산이 피서의 별맛이란 걸 실감케 한다. 정상아래 8부쯤 오르니 어디서 시작했는지 제법 산님들이 모여들었다.

 

정상에 서면 수리봉이라 한 이름이 맞다. 대머리수리부엉이 말이다. 회빛대머리는 태양에 이글이글 타는데 바위웅덩이의 물이 눈부시게 빛나 영락없이 매서운 수리의 눈매다. 그 수리눈깔 가장자리에서 스냅사진을 찍었다.

 

간헐적으로 달려오는 바람 맛깔은 오감을 일깨운다. 조망하는 서대문구`은평구일원의 시가지는 덤으로 챙기는 호사라. 대머리수리 턱밑 소나무에 등을 붙이고 잠시 시장기를 때웠다.

 

대머리수리는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힘겹다. 온 길을 되짚어 내려와서 우회하여 향로봉을 향한다. 수리와 향로봉을 잇는 능선에 닿자 삼삼오오 산님들이 비봉능선을 꼬리 물고 있다.

 

수리봉에서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 문수봉을 잇는 비봉능선의 연봉들은 초록숲 속에 하얗게 빛을 발하며, 뒤편의 북한산의 또 다른 백설우듬지들을 병풍처럼 거느린 채 파란하늘을 호수로 만들어 파노라마 친다.

 

어쩜 푸른 대양 아래 무성한 초록수초들이 하얀 산호초를 키우는 해저를 인간이란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착각을 하게 하는 거였다. 한 낮의 파란여름하늘에 구름 한 떼는 가없는 창해 그대로였다. 향로봉지킴이가 정상등정을 허하지 않는다.

 

이 아래 탕춘대방향의 둘레길은 아내와 심심찮게 다닌 길이다. 비봉을 향한다. 바위산은 소나무를 빼면 추한 대머리산이기 십상일 테다.

북한산화강암바위도 소나무와 결혼하여 사랑받는다. 그 소나무들이 우람하지는 아니해도 멋 부리는 춤사위는 빼어났다.

 

꼬부랑 휜 그 앙팡진 품안 그늘에서 산님들은 더위와 세상을 잊는다. 은평뉴타운지구는 초록 숲 속에 하얀 각설탕을 많이도 쌓아 놨다.

거대한 바위들을 차곡차곡 쌓은 비봉을 오른다. 아랫도리 잘려나간 하마가 서울을 향한 석상이 됐는데 산님들이 기생동물처럼 등에 달라붙곤 한다.

 

추사도 분명 이 코스를 수 없이 밟았을 테다.

거대한 바윌 붙들어 네발로 기며 정상에 선다. 릿지화를 신고 등산장빌 걸쳤는데도 아찔하여 현기증이 난데 추사는 집념 하나로 이 난코스를 오르내리기 얼마나 했을까? 불굴의 의지와 집념 없인 위대한 족적은 남길 수가 없음이라.

 

1200년 동안 잠자고 있었던 진흥왕순수비를 일깨워 비로써 이 바위무덤은 비봉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우듬지난간에서 푸른 하늘바다를 떠받들고 있는 외로운 비(모작품)는 서울을 지킴이하는 수호비란 생각이 들었다,

 

비봉 인중쯤에서 소나무에 몸을 기대 자릴 폈다. 빵으로 기갈을 푸는데 불청객이 나타나 배회를 한다. 철새가 텃새로, 북한산이 보금자리가 된 건 산님들이 좋아설까?

까마귀 두 마리가 겁도 없이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말끔히 쳐다보며 뭔가를 주어먹다가 나를 향해 머릴 조아린다.

 

뭔가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다. 먹던 빵부스러기를 던져줬다. 두 놈이 돌격 먹이다툼이 벌어졌다. 또 한 놈이 날아와 끼어든다.

빵조각을 내 발부리에 놨다. 앞의 놈이 망설이는 찰나에 뒷 놈이 재빨리 내려서서 쪼기 시작한다. 덩치 좀 큰놈이 왕초같다. 놈 옆에선 기웃대다 눈치껏 행동을 한다.

 

토마토를 먹다가 주니까 이건 사양한다. 꼬래 입맛까지 가린다. 과자를 쪼개 던지니 세 놈이 한바탕 아수라장을 펼치곤 다시 나를 본다.

5분쯤 놈들과 놀아나다 아차! 이 짓을 왜 하나? 라고 냉정해졌다. 내가 던져준 먹이가 놈들에게 순간의 당근일 뿐 그들 생에 도움이 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놈들에게 난(우린) 재앙동물일지 모른다. 어쩜 놈들의 야성을 그렇게 훔치는 범법자가 되는가? 싶었다. 냉정은 놈들이 더 야멸찼다.

나한테 더 기댈 것이 없단 걸 알아 챈 놈들은 곧장 비상했다. 푸른바다로 치솟는가 싶더니 저쪽 산호초 속의 어느 산님 앞으로 착륙하나 싶었다.

 

추사가 여길 등정 했을 때가 겨울이 아니었담 까마귀를 조우하지 못했을 테다. 그땐 철새였을 테고 높은 산에서 먹이구할 수가 없었기에 여기서 배회할 리 만무였으리라. 

1816년 가을에 승가사를 찾았던 서른 살의 추사는 여기를 등정하여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한다.

 

비면(碑面)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다.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한 것이 본래 저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탁본을 한 결과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비슷했다.” 라고 추사는 두개의 진흥왕비에 대한 보고서(眞興二碑考)를 썼다.

 

 

.眞興王巡狩碑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로 시작하여 30여자씩 총 12행이 새겨져 있고, 오랜 세월 동안 마모돼 추사가 해독한 글자는 총 70자에 불과했단다.

진흥왕이 555년에 백제와 동맹을 깨고 한강 유역을 빼앗은 것을 기념해 북한산을 다녀간 내용과 당시 수행진을 나열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 학계는 밝혔다.

 

추사는 순전히 비석에 미처 여길 얼마나 밟고 보듬었을까?

비봉을 내려선다. 사모바위쪽을 향했다. 사모바위에서 조망하는 북한산능선과 서울시가지의 아름다움은 압권이다. 비봉능선이 사랑받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사모바윈 남자의 사모관대처럼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인데, 청에 인질로 끌려간 아내를 그리는 망부석(望婦石)이 된 남자의 모습이란 말이 그럴싸하다.

망부석 아래 협소한 바위굴이 있는데 대단한 볼거리인양 나무데크를 깔아 놨다.

 

1.21사태 - 김신조일당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침투 할 때의 루트란 데 수려한명산에 꼭 반공의식을 고취시키기는 장소를 만들어야만 하는지씁쓸했다.

더구나 그곳은 천년고찰 승가사마애석가여래상과 지근거리이기에 부자연스런 발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위와 노송이 우거진 사모바위일대  능선은 서울을 조망하며 피서하기 환장하게 좋은 장소다. 되돌아 계곡으로 빠져 구기계곡을 향했다.

승가봉, 문수봉, 나한봉을 잇는  대남문방향 등정까지는 과욕이다 싶어 담 기회로 미루었다계곡은 가파르고 무성한 졸참나무이파리는 그대로 하늘이 됐다.

 

자연석 돌계단은 오늘 내내 이어 졌는데 산세와 너무 잘 어울렸다. 그래 느낀 바지만 비봉능선의 자연친화적인 계단을 거닐며 이제 지자체도 발상의 전환을 하고 있구나! 하는 안심의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사모바위 아래 승가사는 도봉산의 망월사처럼 고지대의 독특한 지세를 최상의 터로 불문(佛門)을 열었다. 백팔계단의 아스라함 끝에 자리한 마애석가여래상 땜이려니 하는 생각을 해봤다.

깊은 계곡 한 자락에 오밀조밀 고즈넉하게 들어선 산사가 제각기 품고 있는 절경은 발길을 때어놓을 수 없게 한다. 어디서서 어떤 각도로 시선을 향하던 절경이다.

 

 

  높은 바위에 산길마저 험하여/ 지팡이 짚고도 등라 휘어잡/ 처맛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 앞엔 쏟아지는 폭포소리 거세라/ 차 한 잔 끓일 제 세상사 함께 흘러가/ 우물물 길으니 작은 파문 일어라/ 이 절엔 두어 명 높은 스님 있어/ ()을 보며 노래 부르네.”

북한산 승가사를 보고 정인지가 읊은 시()에서 절의 빼어

난 풍광이 그려진다.

 

 

매월당 김시습도 어렸을 때 승가사에서 공부하며 지은 시

를 세종에게 올려 칭송을 받았단다.

 마애여래상에 오르는 백팔계단 첫 단 좌우의 동굴 -  좌측

약사전을 난간처럼 휘감은 수백 살 노송의 자태는 언어도

단이다

세갈래의 가지 중 하나는 하늘을, 쌍지 하나는 요

사채 지붕을 타고, 하나는  약사전을 휘감아 도는 마치 거

대한 구렁이의 모습이라. 

 

 

  약사전, 독경예불에 방해 될까 고양이처럼 그 기송(奇松)을 디카에 담아 나오자 마애석가여래상을 참배하고 내려 선 두 여인과 마주쳤다.

그 중 한 여인이 입가를 훔치며 해갈(解渴) 청량감 미소 짖다 쑥스러워 한다놓칠 내가 아니다.

"어디 마실물이 있습니까?" "저 굴 안에요. 아무도 없어 훔치다시피 먹었어요." 난 그렇게 여인이 가리키는 그 동굴 속으로 고갤 숙이고 발을 들여놨다.

 

굴 안은 선방이었다안쪽 끝에 촛불이 가물가물 어둠을 밝힐 뿐 괴이하기까지 하다. 벽 가장자리로 길이 나 들어가니 촛불 옆에 단지가 있고 옆에 조롱바가지가 놓여 있었다.

물은 단지 바닥에 살짝 깔려있을 만큼이어서 반 바가지도 못 떠 입만 추겨야했다. 미안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석간수가 아닌 누군가가 길러놓은 물이었다.

 

禪하다가 목추기는 약수란 생각이 퍼뜩 스치는 거였다. 시주 한 푼도 않고 도둑처럼 기어들어 단지바닥에 남은 물을 꿀꺽 마시기엔 염치가 없었다.

목은 추겼으나 시원치를 안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두 여인이 사진 한 컷을 부탁한다. 대웅전 앞에서 종각을 배경삼아 여인네를 담았다.

 

나 또한 명부전을 배경으로 품앗이 받아냈다. 승가사의 명물인 삼신각과 종각, 그리고 9층호국보탑은 어디서 조망하던 아름답다. 

승가사를 빠져나왔다. 구기탐방지원센터를 향하는 골짝은 깊고 가파른데도 이 가뭄에 실물길은 바위를 휘돌며 산새와 합창하고 있다.

 

참나무군락은 서서히 아름들이 소나무와 동거를 하며 제법 넓은 소를 만들어 거울 들여다보 듯 하고 있다. 간혹 산님들이 세수를 하는데 나도 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식수로 사용될 테서였다.

 

오후 4시 반쯤 구기탐방지원센터를 빠져나왔다. 홀로산행의 맛을 만끽한 비봉능선이었다. 시청방향행버스에 오른다. 

2014. 07.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