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숙영이 그립다.
영하5~6도를 넘나드는 날씨지만 햇볕이 쨍한 오후여서 우리가족은 안산자락길로 나들이를 나섰다. 음지에 쌓인 눈은 발길에 다지고 얼어 빙판을 이뤄 천방지축인 꼬맹이들에겐 물론이려니와 어른들도 미끄러워 여간 조심해야 했다. 한 시간 남짓 산보를 하다가 우린 귀가키로 하고 p호텔 휘트니스크럽에 들려 샤워하고 갈 속셈으로 서대문쪽으로 하산했다.
근데 이건 도대체 무슨 난리가 난 걸까? 서대문로타리 근처엔 경찰과 시민들과 또한 경찰차량과 일반승용차와 버스가 도로를 빼곡이 메꾼 채 아수라장을 이뤘지 뭔가.
5,6,8살짜리 꼬맹이 셋을 거느린 우리부부와 둘째와 막내는 무슨 영문인줄을 모른 채 인파에 떠밀리다가 가까스로 p호텔에 닿을 수 있었다. 철도파업을 진압하려 대치하는 소동인 줄은 대충 짐작 됐지만 살벌함과 규모가 5공 때나 유신시절의 시위진압을 연상케 하는 바여서 시계바늘이 30여 년 전으로 회귀한 것 같아 씁쓸하고 불안했다.
귀가하여 밤 9시뉴스를 보면서 아까 서대문근방의 아수라장이 불법파업을 유도한 철도노조간부 9명을 구속하기 위해 경찰 5500여명이 민주노총사무실을 강제진입하며 벌린 난장판 이였음을 알게 됐다.
새벽부터 밤까지 민주노총사무실 건물을 수색하고도 단 한사람도 검거하지 못한 채 상상도 못할 사회적`국가적 낭비만 한 꼴인데다가, 정당한 법집행일망정 꼭 그렇게만 해야 했나? 하는 의구심을 대다수 국민들에게 지피게 하는 바여서 원성만 산 공권력이 된 셈이됐다.
정부의 철도민영화는 없다는 발표를 못 믿겠다는 노조와의 대립은 정부가 민영화를 않겠다는 걸 입법화시키면 될 일이다. 입법했는데도 파업을 한다면 그 땐 엄정한 법집행으로 노조간부를 구속해도 국민은 박수를 칠 게다. 소통 없는 대결은 국가적인 손실일 뿐이다.
‘4200만 국민을 하나씩 초대해 밥 먹고 얘기해야 소통이냐?’는 이정현청와대대변인은 그 유치한 소통론을 말하기 전에 우선 구금하려는 9명의 노조원만이라도 불러서 밥먹어봤음 싶다.
박근혜정부 들어선지 1년이 되가는데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있었나?싶다. 문득 400년 전 광해군 때의 임숙영이란 선비 생각이 났다.
광해3년(1611) 임숙영(任叔英)은 별시문과에 응시했다. 마침 임금은 나라가 어수선하여 ‘가장 시급한 나랏일이 무엇인가?’라는 책문(임금이 직접 내린 시험과제)을 제시했다. 이에 임숙영은 “나라의 가장 큰 병은 정신 못 차리는 임금에게 있다”라고 답안지를 써냈다.
책문을 통과해야만 급제가 되기에 답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도 권신 임희수는 그를 급제 시켰었다. 허나 답안지를 본 임금이 노발대발 펄쩍뛰며 임숙영을 벌하라고 하명한다.
이때 좌의정 이항복과 승정원에서 “전하, 그를 벌 하오면 언로가 막히고, 그건 나라가 망하는 단초가 됩니다”라고 스스로의 목을 내밀고 간언을 했다.
그런 임숙영은 4개월 후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당시 권세가 이이첨과 왕의 처남인 유희분을 비롯한 외척들이 정세를 그르치고 있어 이를 비판하고자 쓴 답안지 글이었던 것이다.
지금 정부, 여당, 청와대에 임숙영같은 분이 있는가? 보다는 이항복이나 승정원(지금의 비서실)에 충신이 있는가?
박대통령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지시사항만 기다리는 해바라기 헛 똑똑이만 득실대는 상황은 아닌지 갸우뚱해진다.
정부여당은 30년 전의 공안통치시절만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400년전의 어수선 했던 광해시절의 역사는 너무 오래 되서 반면교사 삼을 건데기도 없단 건가?
하 세월이 수상하니 울적하다. 참으로 모두 안녕들 하신지?
2013.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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