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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까불면 죽어-`라고 말하는 감악산

‘까불면 죽어-’라고 말하는 감악산-석기봉

10시 반쯤, 치악산국립공원 남쪽가장자리 황둔리 만남의 광장에서 감악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가팔랐다.

별났던 여름은 산록에 녹색장원을 실팍하게 이뤘고 정처 없는 듯한 바람은 가을의 정녕인지 숲 속을 비집는 따가운 햇살의 날을 무디게 하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산님들 발길이 뜨악했던지 거친 총각냄새가 배어있기까지 해 거칠어진 숨결만큼 땀이 솟질 않는다.

아름드리 적송과 참나무과 활엽수들이 텃새를 이룬 수목군락은 식생이 여간 다채롭지가 않다.

그들의 초록이파리를 간질거리며 달려온 바람의 감촉은 그리 청량할 수가 없다.

여름을 포식하여 의시 대는 우람한 덩치들 사이를 반시간쯤 사열하듯 걷다보면 693고지에 이르고 골짜기를 훑고 온 시원한 바람의 환대에 환호하다 이젠 산 능선를 타고 있음에 거칠어진 숨 마저 토해낸다.

바람이 안내하는 능선은 참으로 기분 좋다.

늙은 노송과 굴참나무의 위용에 감탄하다가 거대한 바위들이 가로막아서면 산님들은 꽃뱀처럼 바위에 길게 붙어있고, 우듬지에 이른 꽃뱀은 저절로 신선이 된다.

푸른 하늘가장자리에서 일군 파도의 능선은 경이로운 무한대의 묵화이고 발아래 바위가 붙들고 있는 나무들은 고독한 이들의 동행의 깊은 뜻을 새기게 한다


1,2,3봉은 그 위태로움과 감탄의 연속선상이고 개체의 동반이 갖는 조화의 경이로운 파노라마였다.

간혹 길섶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구절초에 아는 채를 하다가 갈라진 바위에서 바람에 허리를 펴는 그들 옆에 앉았다.

푸른 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웃음에 햇빛이 떨리고 그 떨림은 바위틈새에 박힌 뿌리의 아픔일지로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아무도 넘보지 않을 바위틈에

한 줌 흙 모아 내린 뿌리

바위사이를 뚫는 아픔을

가는 허리에 모아 피운 하얀 웃음.

산릉을 넘는 바람에 허릴 펴고

한 뼘 파란 하늘을 마주하고

가실을 낚는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서

놓을 수 있어서 행복한

그는 해맑은 웃음이라. -<구절초>-


정오를 지나쳤다.

탁구대만한 멍석바위 위를 더 큰 바위 두개가 대각선으로 엇물려 천연바위텐트를 쳐놨다.

배낭을 풀었다.

수 천길 아랜 초록바다가 질펀하고 숲바다 서쪽 해저엔 백련사가 숨어들었다.

그 뒤로 푸른 하늘을 향한 산릉파도는 너울처럼 밀려 하늘금을 그은 장관을 혼자 만끽하기엔 아까워 일행 몇 분을 불렀는데, 이미 편 자릴 옮기기가 뭣했던지 응하질 않아 혼자 호젓한 점심을 즐기려는데 젊은이가 불쑥 침입한다. 재무였다.

밥 생각 없다는 그를 강권하다시피 앉혀 몇 숟갈 나누는데 밥맛 못잖게 ‘만수산님’들의 근황을 들을 수 있어 곱빼기로 배불렀다.

내가 만수를 찾은 지가 2년이 넘었으니 말이다.

사라졌던 그가 다시 나타났다.

하산 하잔다. 내가 꼴찌란다.

1시를 넘겼다.

맘이 좀 바빠져 감악정상(954m)을 에둘러 선녀바위와 거대한 두상바위 옆면을 훑는다.



산행 때마다 꼴찌는 도맡아 시피 하는 나다.

여기저기 눈 팔고 때론 디카에 가두며 해찰을 하다보면 얻는 영예(?)인데 나 땜에 일행들은 꼴찌신셀 면해 안도할 테니 좋을 테다.

886고지에 점찍고 급하강길에 들었다.

예의 몇 백 년을 살아오며 가꾼 소나무와 골참나무들의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몸짱의 환대를 즐기며 콧노래를 부르는 하산길은 바람까지 시원하다.

호젓한 나만의 시간 - 신바람이 나는 시간!

그 행복감은 자연이, 산이 아니곤 생각할 수 없는 열락이다. 산은 조건 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언제 어느 때나 그 자리에서 내게 다가와 모든 걸 주려한다.

욕심 많은 나는 그를 알려고 보시대곤 하는데 참된 산꾼은 그마져 놓는단다.

나무·수풀이름을 모르더라도 순수하게 다가서기만 하면 언젠간 그들이 속속들이 알려준다는 게다.

모른 채로 즐기기만 하란다.

하긴 그들과 어울려 즐김에 앎이 꼭 필요한 건 아닐 테다.

통천바위에서 시루바위까지의 바위얼굴들도 2시간을 훌쩍 까먹는데 거들었다.

우석대3총사 숙녀들과 앞서다 뒤서다 때론 동행을 하며 석기암(906m)봉을 즐기다가 감악산이 숨겨 논 실화 한 토막도 입담에 올랐다.

“까불면 죽는 수가 있어”라고 감악산은 말하고 있을 것 같았다.

1170년 이맘때인 9월초, 견룡대장 정중부(鄭中夫)는 ‘무신의 난'을 일으켜 의종왕을 거제도에, 태자를 진도로 추방한다.

왕의 애희(愛姬)무비(無比)를 죽이려다 태후의 간청에 살려줘 왕의 허리춤에 짬매서였다.

허나 중부에겐 26년간이나 벼른 싸가지 없이 까분 모가지가 있어 그 목에 현상금을 붙여서 전국에 방을 놓았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의 목이였다.

그러니까 1144년 섣달그믐날 밤 나례(儺禮)때 좌승선 김돈중은 어위병 중부를 불러 촛불로 그의 수염을 불살랐다.

깜짝 놀란 중부가 돈중의 팔을 붙잡고 욕을 해대자 이를 지켜본 돈중의 아버지 부식은 중부를 포박하곤 왕께 고하고 곤장으로 때리려 했다.

중부를 어여삐 여긴 인종왕은 그를 도망치게 하여 봉변을 면한 중부에겐 그런 치욕의 원한이 있었던 것이다.

중부의 이목구비가 훤칠하고 잘 다듬어진 수염에 심통이 났던지 아님, 뭐가 비위를 건들었던지 돈중은 자기벼슬이 좀 높다 해서 남의 수염가지고 장난치며 까불었던 것이다.

무신의 난이 성공하자 돈중은 하인을 대리고 감악산에 숨어들었다가 생필품이 필요해 하인을 개경집에 심부름 보냈었다.

그러나 하인은 주인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탐나 관가에 고자질해 버린다.

돈중은 하인들에게도 까불어대며 인심도 잃은 게 틀림없었다.

단박에 감악산에서 붙잡혀 끌려온 돈중은 앞 냇가 모래사장에서 중부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지위가 높을수록, 부자일수록 까불면 큰 코 다친다는 경고를 감악산은 증좌하고 있다.

하산하면서 감악산이 숨어살기엔 적소란 생각이 들었다.

산골이 깊고 수종이 다양하며 바위은거지가 도처인데다 하천과 동리가 멀지를 아니해서 말이다.



까불어 댄 돈중은 제 명도 다 채우지를 못했을 뿐더러 아버지의 명성과 가문까지 욕먹게 했다고 고려사절요는 기록하고 있다.

못재를 밟고 피재를 향하는 하산로는 육산으로 다섯 시간 반을 넘기는 산행을 전혀 피곤치 않게 한다.

어제까지의 여름은 감악산에선 밤새 가을로 바톤을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나 고대했던 시원한 바람이 짜증난 여름을 몰아내고 있었다,


감악산 바람아!

지금 서울로 달음질 쳐서 높은데서 까불어대는 사람들도 몰아낼 수는 없니?

가짜 목 내놓고 투표·재선거 하게 만들어 우리가 낸 세금500억원을 까먹게 한 꼴통들도 청소 좀 했슴 좋겠거니-.

널 사랑한다.

2011. 09.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