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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무릉계곡을 불태우는 두타산

# 무릉계곡을 불태우는 두타산 #



한 밤의 질주 다섯 시간 반에 삼척시 하강면 닷재고개에서 칠흑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 4;50분, 어둠은 차가운 알갱이입자들을 잔뜩 머금다 내뿜고 물기 젖은 풀숲은 바지가랑이를 적시는 게 랜턴불빛에 확연하다.

 

두타산 오르는 길은 심상치가 않다.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청정한 맘으로 불도를 닦는 도량’이란 뜻의 ‘두타산’을 야밤에 도깨비 불방망이 돼 침범하니 심기불편할 건 뻔한 일이겠다.


랜턴불빛에 비친 나무들은 홀라당 옷 벗고 잠들어있는 게 늙은이, 한창, 잔챙이 할 것 없이 두타산 것들은 취침 땐 모두 다 깨 벗는가 보다. 우측 저만치에선 검푸른 바다는 하늘자리에 있고 땅이어야 할 곳은 칠흑어둠에 수많은 불빛이 은하계를 이룬 하늘이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경천동지가 야밤에 두타산이 하는 마술인가 싶은 호기심은 어둠 속의 지난한 행보도 잊게 한다. 그 은하의 빛들은 내 앞에 알몸의 나무들을 검정 발레복을 입혀 올페의 난무를 연출하고 때론 설사하듯 별똥을 길게 깔기곤 사라진다.


아~! 야밤에 산을 타는 미친 산님들은 이 비경에 반해 개고생을 마다하지 않는가? 한 시간 반을 미쳐있는데 일순 동해물이 쓰나미처럼 겁탈 했던지 은하계가 흰 바다가 되고 군데군데 까만 섬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한 가운데에 붉은 띠를 둘러 천지경계를 이뤄내는 거였다.

 

이내 그 붉은 띠 한쪽이 불타오르자 내 앞의 나무들은 죄다 숯 검댕이이 돼 한 폭의 추상화가 됐다.

숯이 된 부지깽이 뒤로 타오르는 불덩이가 솟는다.

6;40분께였다.

20분쯤 후 두타산정(1355.2m)에 섰다.  스산했다.  아까부터도 단풍구경 온 나를 두타산은 깨 벗은 나무들을 내세워 홀대함이 역역했는데 어디서 왔는지 벌써 도착한 산님들의 울긋불긋한 옷들이 단풍흉내라도 내는가 싶어 씁쓸하기까지 했다.

아직도 흰 바다는 저만치에서 동해와 연결하고 백두대간 산마루는 섬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어쩜 단풍보다 백두대간이 섬이 된 신비에 더 환장할 판이 됐다. 난 쉰음산쪽으로 하산한다.


나를 태워다 준 봉산님들이 청옥산과 고적대를 휘도는 산행을 한다는데 애시당초 난 그렇게 휘도는 시간을 무릉계곡에서 몸뚱이 뒹굴기로 작심했던 바다. 오후3시까지 날머리에 가면 되니 별 오지랖을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7;30분. 본격적인 홀로 산행이 시작됐다. 쉰 개의 바위우물이 아무리 땡가뭄에도 한 개는 마르질 않는다는, 그래 산재당을 둬 봄가을에 제사를 올린다는 쉰음산[五十井山]은 포기하고 갈림길에서 산성터를 향했다.

 우측엔 좀 커다란 섬이 하얀 스카프를 목에 걸친 채고 왼편 저 아래 골짜기엔 지핀 불꽃이 아른거린다. 해찰께나 부리고 있는데 우람한 소나무들이 한두 놈씩 나타나 겁을 준다. 금강송 마실에 들었다. 거대한 체구의 금강송들은 팔등신 미인송들과 혼거를 하고 있는데 그들을 쳐다보느라 고개 떨어지는 나는 걸리버에서 온 소인이 틀림없겠다.

그들 앞에 왜소해 주눅 든 난 그들의 늠늠함에 경외심까지 돋았다. 나무들이 이렇게 선망의 대상이 됨도 처음이라. 언젠가 산행 중에 아내는 죽으면 소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었다.

깨끗한 산 속에서 홀로 청정 우뚝 서서 날짐승들의 안식처가 되고 작은 나무들의 보호수가 돼 오래도록 장수 한데서였다. 오늘 섹시한 미인송을 봤다면 더 절실해 졌을 것 같았다. 한 시간쯤 내려오니 우측골짜기에서 물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빨간 단풍은 골짜기를 찾아든 아침햇살에 시리도록 빨갛고, 노오랑 생강이파리는 실핏줄까지 들어내고 있다.

아까 두타산의 깨복쟁이 나무들은 표고가 800고지를 넘은 백두대간 이였기에 겨울문턱에 들어선 땜 이였다. 물노래가락은 곧장 굉음으로 다가서고 12폭포는 각기 소리를 내질러 골짜기를 메웠다. 열두 번이나 뜀박질할 물기둥을 죄다 볼 수는 없었지만 하류도 아닌 산중턱에서 길게 뻗은 장관에 절로 탄성이 솟는다.

 

이윽고 거북바위, 백곰바위를 찾는 길목은 바위 건너뛰기 길이고 그래 깔딱고개라 하는가. 왜적에 쫓기다 바위벼랑이 휘두른 여기에 성을 쌓아서 맞짱을 하다 산화했을 의로운 선님들의 넋이 묻힌 두타산성을 밟고 하산하는데 여기서부턴 녹음 울창한 여름의 한 가운데라. 두타와 무릉은 삼계(三季)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무릉계곡에 들어섰다. 장군바위, 선녀탕을 거쳐 쌍폭과 용추폭포까진 700m 거리였다. 청옥산골의 물이 세를 불려 이룬 폭포가 용추폭포가 됐고 그 폭포수는 그대로 두타산 밑 박달골 물길이 만든 폭포와 자웅을 겨루는 게 쌍폭 이였다. 무릉계곡은 폭포의 계곡이라.


그 폭포들이 수많은 소(沼)를 만들어 청옥물을 담으니 비취소가 되고, 그 비취 물거울엔 무릉골의 아름다움을 다시 담고 있어 우릴 미치게 한다. 무릉골엔 폭포 우뢰소리만이 존재한다. 일체의 잡음을 허하지 않음이다. 두타는 인간의 쓰잘데 없는 잡소릴 막기 위해 폭포소리로 메웠는지 모른다. 용추와 쌍폭 중간에 있는 비밀스런(?) 조그마한 폭포가 만든 소 앞에서 점심자릴 폈다.

 

소는 주변의 단풍을 그대로 담은 거울이 됐고, 폭포바람에 춤추던 낙엽 하나가 소에 내려앉아 일구는 물비늘에 소의 단풍은 붉게 번지는 거였다. 이렇게 한가롭고 신선이 된 듯한 폭포수 앞에서의 점심을 난 눈감을 때까지 결코 잊지 못할 게다. 무릉계곡은 두타가 불질러놓고 청옥은 소를 채워 그 불꽃을 다시 담아내는 무릉황혼 이였다. 두타·청옥산은 일년 내내 보아왔을 저녁노을을 이맘땐 무릉계곡에 재현시키는지도 모른다.


한 해 흡씬 일하느라

말라 부나비 돼 춤추는 갈잎

석양 때면 봤을 노을을

기억해 골짜기에서, 소에서 불 지핀다

헛눈 팔지 않는 태양이 황혼을 빚고

황혼이 벤 이파린 떠날 채비를 한다

불타는 갈잎에 무릉골은 황혼이어라

힘 부친 노란 이파리들이 우우

낙엽 되는 두타산골 - 무릉골

<무릉골의 황혼>

 

정오쯤 일어섰다. 아까 본 신선탕 아래 허공다리를 건너 문간재를 거쳐 피마름 골의 하늘문을 통과해 관음암으로 가기로 했다. 문간재는 청옥산을 오르는, 신선봉과 사랑바위를 보러가는 길목이기도하지만 다리가 뻐근해 그냥 지나쳐서 그대로 하늘문에 들어섰다.

누가 거대한 바위산을 폭 석자쯤 되게 깊고 길게 잘라냈을까? 그 끝은 보이지 않는데다 가파르긴 오금이 저리게 한다. 관음보살이 아니곤 추측이 안 된다. 그 긴 철다릴 통과하면 바위산 중턱을 2.2km나 곡예 하듯 올라야 관음암자에 이르는데 거기에 있는 소나무는 죄다 바위에 뿌리박고 있다. 아니 바위가 소나무를 넘어지지 않게 단단이 붙잡고 있다.

 

뭐가 얼마나 절박했기로 바윈 소나무를 붙잡고 피 말린 골수까지 쫘주면서 공생하는 걸까? 소나무는 바위에게 땡볕에 그늘을 만들어주고 바람결에 들은 세상의 소식을 들려주며 공존한다. 둘은 서로가 꼭이 없어도 살아갈 수가 있을 텐데도 그 고역을 마다하지 않고 더는 수고로움도 따지지 않는다.



분재 아닌 암재(巖栽) 앞에서 공생, 공존을 생각하면서 공존과 공정사회를 구두선마냥 외치는 꼼수의 달인을 생각해 봤다. 이번에도 (내곡동 사저 건)자기는 모르는 꼼수라고 꼼수부리는 가캬를 생각하다 꼼수끼리들 만이 사는 공정사회는 어떤 것일까? 생쥐얼굴 떠올라 쓴웃음 짓다 얼른 발길을 땠다.

 

신선대에서 배낭을 풀었다. 앞엔 내가 아까 왔던 두타에서 무릉골로 향하는 12폭포가, 박달골과 사원터골의 히끗히끗 보이는 물길들이 숲과 숨바꼭질하다 용추와 쌍폭을 이루는 원경이 아스라이 조감된다.


산허리 아래로는 지핀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다 타버린 곳엔 하얀 바위숲들이 주상절리를 일궜다. 신선인들 무릉골의 울긋불긋 아자기함에 눈 팔지 않으랴. 홀로산행 다섯 시간 째다. 7억6천만 원짜리 산행은 질릴 수가 없다.

 

관음암에 닿았다. 적잖은 산님들로 메워진 암자는 본시가 퇴색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병에 석간수를 채우고 곧장 삼화사를 향한다. 근데 내리막 계단에서 왼편무릎이 시고 아파왔다. 신선대에서 무릎보호대를 착용했었는데, 주저앉아 잠시 주물렀지만 별로였다.


무리 않고 아끼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릉계곡에 닿기까지 반시간을 온통 무릎에 신경 쏟았다. 옥류동과 학소대도, 삼화사도 그냥 지나쳤다. 무릉반석에서 족탁하며 쉴 요량에서였다. 1500평 된다는 반석은 산님들의 쉼터가 됐다.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섰던 의로운 민초들의 모임 이였다는 금란계(金蘭契;1903년 결성)는 충정의 결사였고, 반석엔 그들의 이름석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랜 기념각 금란정도 있었고-.

 

명필 양사언의 필적(武陵仙原 中臺泉石 頭陀洞天 ; 신선이 놀던 별천지인 이곳, 물과돌이 어울려 낳은 자연에서, 세속의 번뇌를 버리니 수행의 길 열리니라.)을 찾다가 탁족을 위해 신발을 벗었다. 청옥수는 어찌나 발 시렸던지 몇 십초 담구기도 어려웠다. 양사언의 초서는 탁본하여 아래에 별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 무릉골에 미치(?)고 그래 정기를 받아 무릉골을 빛낸 선각들이 생각났다.


조선 선조 때 사색당파 동인의 거두 김효원(金孝元)은 삼척부사로 재임시 ‘두타산 일기’를 썼는데 두타산이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답다고 기록했다. ‘두타산인’이라고도 부르게 된 이승휴(李承休)도 이곳에 반하여 두타산에 용안당(容安堂)이란 별장을 짖고 삼화사의 경전을 빌려 10년간 통달하며 제왕운기를 저술했다. 

 

도한 별장을 간장암(看藏庵)이란 편액을 써 달고 인근의 전답과 묶어 희사하여 지금도 오십정산 아래 천운사에 있다. 탁족 땜 이였을까, 평길 이기도 해서인지 무릎통증이 사라졌다. 봉산인들의 날머리 장소에 이렀다.


2시가 채 안됐다. 여기서 빈둥대야 할한 시간이 아까웠다. 허나 쉬기로 했다.

중국의 무릉도원은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 이였으나 여기 무릉황혼은 이맘때면 누구나 찾아 감탄할 수 있는 별천지이다. 참으로 좋은 하루, 무릉계곡에서의 7억6천만 원짜리 시간은 결코 잊을 수가 없을 테다.

2011.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