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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내 각시 것 빤지 40년 만에---(완도 五峰)



내 각시 것 빤지 40년 만에 젖꼭지숙승봉을 만지다(완도 五峰)


살다보면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그리움으로 가슴에 똬리 튼 곳이 있게 마련이다.

내겐, 태어나 자란 고향과 내 각시가 태어나 처녀가 돼 나를 만나게 된 부처님눈 마실이 있다.

특히 각시의 고향은 내 생애를 획기적인 변화를 갖게 하였음에도 어설프게 눈요기로만 끝나고 있어 항상 아쉬움으로 멍울져 있었다.

그 곳이 유명하거나 쌈빡해서가 아닌 결코 낯설지 않은 사람들이 아웅다웅 살 비비대며 살아온 때가 고삿마다 끈적대는 게 은근한 매력이라면 매력탓이리라.

완도군 불목리는 각시의 고향인데 어쩌다 처갓집에 들러 마당에서 바라본 숙승봉은 완만한 능선에 바위가 오똑하게 젖꼭지처럼 돌기 돼있어 가보고 싶었지만 여태 바램으로 만 존재했었다.

오전 11시쯤 숙승봉을 오르는 발길은 소남훈련원 입구에서 시작했다.

상록수림이 터널을 이룬 늘푸름 사이로살짝 선뵈는 숙승봉은 차가운 잿빛 초겨울이라선지 유난히 탐스럽게 오톨하다.

그 젖꼭지를 만지러 네 시간을 달려온 나를 맞는 동백은 산길에 도열해 몇 송이 피우지도 안했는데 길섶에 떨궈 꽃길을 만들었다.

동백은 뭐가 그리 절박하여 싱싱한 꽃봉오리를 미련 없이 낙화시키는 걸까!

간단없이 낙화한 꽃송인 자기를 피워낸 나무를 이탈하여 시든다.

모든 수목들은 제 피붙이를 버릴 때와 이어 떠날 때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실행함이다.

후박`감탕`굴거리`붉가시`황칠나무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초록이파리로 잿빛하늘을 가린 숲길은 음침하기까지 하다.

완도의 산 만이 할 수 있는 난대림의 초록장원이라.

낙엽은 습기를 머금고 썩어가는 가파른 산길은 원시림 맛도 풍기는데 이따금 깨 벗은 나목들이 군락으로 나타나 음침한 하늘을 찢어놓고 있다.

정오쯤 해서 드디어 숙승봉에 올랐다.

그의 거대한 젖꼭지를 만지며 인증샷을 했다.



젖꼭지를 만지며 조망하는 사위는 뿌옇게 흐린 채여서 사뭇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회색바다는 다도해를 애무하며 신지도의 명사십리를 핥고 다시 청해진을 어르곤 고금도 아랫도리를 넘보며 찰삭거리다 부처님눈길[불목;佛目]에 움칠, 곧장 북상하여 강진땅 깊숙히 파고 숨어들었다.


부처님 눈이 내 각시 마실인데 지금도 제법 큰 섬마을로 번창일로인 것은, 드라마 신라방세트장과 원불교 소남훈련원(小南은 원광의료원장을 지낸 김재백박사의 선친아호이며 당시 상당한 전답과 임야를 교당에 헌납하여 이뤄진 농원)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음이다.

내 각시와의 만남은 마을청소년들의 입방아 땜 이였다 할 것이다.

40년 전, 재수를 한답시고 원불교불목교당에 부랑아처럼 식객으로 빌붙었던 나는 교당에서 1km쯤 떨어진 농장(후에 소남훈련원으로 정비)을 지키는 게 임무였고, 식사는 교당에 내려가서 해결했었다.

그 때 한 섬처녀가 나타났었는데 그녀는 잘 깎아 다듬어놓은 밤처럼 예쁘고 야멸차보였다.

섬에도 이런 처녀가 있구나 싶게~!

근데 사단은, 교당 뜰에서 간단히 인사를 나눴는데 그 정황을 동네입방아들이 ‘연애질 한다’고 떠벌리면서 일파만파가 됐었다.

뾰쪽수가 없이 난 55일간의 그곳 생활을 접고 쫓겨나야했다.

어느 밤, 청년법회때 나는 떠나는 인사말을 해야 했는데 그 전갈을 어떻게 들었던지 처녀는 내 앞에 나타나 미안함과 억울함을 실토하였고, 그날 밤 처녀와 난 농장움막으로 가서 뜬눈 밤을 새웠다.

당시엔 ‘연애질’이란 게 무슨 몹쓸 비상약이라도 먹은 미친년`놈처럼 쥐구멍을 파야 했었다.

재수한답시고 고향집에 머물던 나를 상산(常山;수위단원으로 나의 선친과 교우)법사님께서 교당도량으로 만들까 싶어 데려다 놓기 두 달도 안 돼 다시 왕림하여내 몸뚱일 거둬가야 했으니 선생께 누만 끼친 꼴이 된 셈이다.

농장움막에서 뜬 눈으로 새운 하룻밤은 펜팔로, 절교로 단절됐다가 무슨 고래심줄 같은 끄나풀이 있었던지 다시 편지질이 이어졌고, 이낸 결혼에 이르러 평생을 웬수처럼 티격태격 서로를 잡아먹겠다고 꼴마리 붙들고 아직도 목하 싸우고(?) 있는 중이다.

웬수같은 내 각시 젖무덤에 청춘 녹여버린 내가 어쩌다 처가에 가면 마주치는 숙승봉은 탐스런 젖꼭지였고, 그 때면 꼭 한 번 올라가서 실컨 만지며 하소연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젖꼭지를 오늘 만지게 됨이다.

업진봉을 향한다.

하늘은 잔뜩 찌뿌리고 바람은 나지들 위를 윙윙거리며 계절의 다급한 전령사노릇 하고 있다.

돌연 산죽이 얼굴 부벼대며 속살대고 있다.

사방좌우로 탁 트인 시계는 섬산행의 진미를 만끽케 한다.

백운봉을 앞세우고 점심자릴 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떼의 새이리떼들이 빙둘러 냠냠대다 내가 나타나자 손짓을 해 그들의 궁뎅이뒤에 자릴 깔았다.

친절한 캪틴이 갓 담근 김장배추를 퍼주며 자기의 손맛자랑(?)을 한다.

그녀의 야물 찬 인상만큼 감칠맛의 김치 맛이 입가에 남는다.

또 하나, 표범무뉘 벙거지를 쓴 장정이 아직 식사 중인 내게 커피를 타 건내는 맘 씀이라.

산에선 모두가 천진해 진다.

어수선한 그들이 먼저 떠나고 혼자 산행을 한다.

백운봉을 밟고 하늘재를 내려오자 유명한 완도수목원이 발아래 깔린다.

2050ha에 난대수종 752종이 자생한다는 수목원도 언젠가는 가봐야 할 곳이다.

근데 산능선에 2층으로 지어놓은 나무데크 전망대는 옥에 티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자연 숲 - 거기에 꼭 인위적인 높은 전망대가 필요한지도, 그렇게 해서 세금 축내야 속이 후련한지 공복들의 속알머리가 의뭉스럽다.


상황봉에 섰다.

시계는 아직도 우윳빛이다.

신지대교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서고, 날머리가 될 대구미는 바다를 막아 완도호로 가뒀고 그 뒤로 드넓은 간척지의 관계수로가 완도가 섬이 아니라고 우기는 성 싶었다.

능선을 밟는 산길은 적당히 긴장하게끔 돌멩이와 바위가 낙엽과 엉켜 뒹굴며 완만한 경사를 이뤘다.

참으로 트레킹하기 좋은 다섯 봉우리는 울창한 난대림으로 하늘을 만들어 캐노피`숲(canopy forest)터널을 이루고, 낙엽수들은 앙상한 몸짓으로 잿빛하늘을 찢느라 아우성치며, 검자줏빛 바다를 이룬 소사나무군락과 그들의 기기묘묘한 몸짱들을 시간을 잊게 한다.


서쪽바다 한 귀퉁이에 양식장이 보인다.

내가 처음 완도에 기어들었을 땐 섬은 양식장 없어도 흥청망청 활기차 있었다.

완도가 유일한 자연산 김 고장 이어서였다.

겨울 한 철 김 농사로 일 년을 거뜬하게 잘도 살수가 있었기에 섬은 풍요로웠고, 사람들은 억세고 생활력이 강했다.

바닷일은 남정네들의 몫이라선지 농사일을 비롯한 모든 잡일은 여자들이 해내는 것 같았고, 그래 '완도여자들은 어딜 가서 살던 잘 산다'고 회자될 만큼 바지런 했는데, 나를 기죽게 했던 건 그들의 쌍시옷을 버무린욕설이 상용어였을 정도로 말씨도 거칠었다.

그네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내 얼굴빛이 홍당무가 되곤 했었는데 정작 그들은 덤덤했다.

해도 난 그들이 좋았다. 진솔하고 인정이 넘치며 공동체의식이 굳건해 살맛 나는 세상을 잘도 일구고 있었다.

그런 DNA는 내 각시의 피에도 연연히 흐르고 있음을 체감 한다.

쉼봉을 찍을 땐 3시가 됐다.

언젠가부터 보리수님 일행과 동행이 됐는데 그들은

오롯한 엄지맨 이였다.


그들의 깍듯한 친절을 난 산행이 끝날 무렵에야 깨달았으니 나의 둔치노릇이 그들에겐 하 답답 했을꼬~!

대구미를 향한 상록수숲길은 캐노피`숲의 절정을 이뤘는데 나를 황홀케 했던 건 거기 골짜기에 숨어 겨울나기라도 하려는 듯 한 형형색색의 가을단풍 이였다.

흡사 빨`주`노`보라의 나비들이 무리지어 군데군데 나목에 붙어 있어 겨울나기 하는가 싶어보였다.


아님 가을이 남쪽으로 밀려 피난 와 대구미골에 은밀히 머물고 있음이겠다.

초록이파리의 장막 속에 피난처를 구한 울긋불긋 가을의 계절나기에 신기하기만 했다.

상록 캐노피`숲은 그들에게 훌륭한 은신처가 될 법 했다.

40년간을 벼르던 내 각시의 젖무덤 같던 숙승봉은 숨겨진 감칠맛이 무진함이라.

내 각시의 젖무덤이 사라질 땐 숙승봉젖꼭지도 나의 가슴에서 뙤리를 풀게 될것이다.

2011. 12.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