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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오줌 깔기는 칸과 옆드린 왕 - 남한산성


오줌 깔기는 칸과 엎드린 왕-청량산 남한산성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치욕은 견딜 수있는 것이옵니다.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라고 최명길은 아뢰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울창한 소나무 숲에 회색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청량산골엔 몸살 앓은 겨울의 흉터인양 잔설이 군데군데 널부러져 있다.

행궁 옆 골의 물길이 빙하를 이룬 정월 그믐날, 아직 빙토의 찬새벽길을 나선 왕(인조)의 행선지는 오랑캐의 소굴 이였다.

375년 전,

바로 오늘(음력1637년1월30일)에 있었던 굴욕적인 왕의 행차 흔적을 따라나는 서문(우익문)을 향했다.

세자를 대동한 왕은 서문을 나서 가파른 내리막길 시오리를 행차하여 삼전도에 이르러 9층 단위의 칸에게 이마가 땅에 닿도록 삼배(三拜)를 해야 했다.

칸(홍타이지)이 불렀다. 왕은 일곱 계단을 올라 다시 엎드렸다.

두 계단 위에서 칸이 술 한 잔을 내렸다. 왕이 다시 삼배를 올리고 잔을 받았다.

칸이 두 번째 술을 내렸다. 왕이 또 세 번 절하였다.

별안간 칸이 벌떡 일어나 바지꼴마리를 까내리고 물총을 꺼내서 오줌을 깔겼다. 오줌이 바람을 타고 흩뿌려졌다.

단하의 장졸은 '호랑이 장가 가나 보다'라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칸이 앉아 술 한 잔을 다시 내리고 왕은 또 세 번 머리를 박았다.

왕이 머릴 박은 계단엔 세자와 왕자를 비롯해 끌려온 신하와 궁녀들이 엎드려있었다.


왕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의 하루를 그렇게 보내다 밤이 돼 송파강을 건너 한양으로 향했었다. 왕에게 오늘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더 긴 하루였다.

나는 잔뜩 흐린 안무 속에 지금은 골프장이 들어선 삼전도를 헤아리며 왕의 치욕을 유추해 보았다. 오줌 깔긴 칸의 오만을 상상해보다 그래도 피비린내 나는 살상을 자제했던 그의 담대함에 애증이 교차함을 느꼈다.

칸의 막료 용골대가 단숨에 남한산성을 쳐부수자는 진언을 투항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한 그의 원대한 지략을 보며 줄리어스 시저를 떠올렸기에 땜이였다.

시저도 에뚜아니아(스페인)를 점령할 때 성안에 갇힌 적들이 투항에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얼마 전에 칸은 왕에게 말했었다. “너는 그 돌구멍(남한산성)속에 한 세상을 차려서 누리기를 원하느냐. 너의 백성은 내가 기른다 해도, 거기서 너의 세상이 차려지겠느냐?”라고.

만감이 교차하는 서문전망대를 뒤로 하고 북문을 향했다. 매탄지를 흔적만 남긴 소나무 숲은 그날의 치욕을 기억하는지 우울한 분위기라.

새로 축성한 연주봉옹성을 암문을 통과해 밟고 북문(전승문)에 닿기까진 반 시간정도 걸렸다.

성은 가파른 산릉에 쌓아 적의 접근을 용납치 않을 천혜의 지세였고, 저만치 안무 속엔 하남시가지가 그림으로 남았다.

누각 옆 벤치에서 점심을 때우는데 동고비 한 쌍이 방정을 떨며 춘정을 노래한다.

북문은 오랑캐와 47일간 대치중에 영의정 김류가 삼백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유일무이하게 싸웠던 장소다.

싸움터는 어디였을까? 비록 전멸하다시피 했지만-.

동문(좌익문)을 향한다. 구불구불 빡세게 기어오른 성벽을 따르려니 숨이 차다.

보수한지가 오래지 않은 것 같은데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보수공사 하느라 설치한 비개를 보며 밸이 꼬였다.

허나 아름드리 소나무가 벌이는 온갖 퍼포먼스를 사열하다보면 그런 심난함도 달아나고 고갯길도 거뜬했다.


반시간쯤 소나무와 얘기하며 길동무 하니 동장내터가 나타나고 곧 암문을 통해 봉암성을 오르는 길에 드는데 멋지게 폼 잡고 있는 성문이 반겨준다.

여긴 산세가 험준하지 않아 외성을 하나 다시 쌓아 방어함이라.

여기서 장경사신지옹성까지의 성은 골이 깊지를 않아 봉암성을 쌓아야 했음을 실측케 한다.

남한산성을 개축할 때의 승려들의 합숙소였던 장경사는 깊숙한 산골에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물길처럼 굽이치는 산성이 울창한 숲 속에서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서는 송암정에 섰다.

동문 옆 성벽을 허물고 뻗은 아스콘길은 광주시로, 성남쪽으로 통하는 남문과 이어지는데 오늘날 남한산성이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도로였다.

지수당, 남한산성역사관, 침괘정을 답사하고 남문(지하문)을 통과했다.


병자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적에 막혀 남한산성 행궁으로 든 문이 남문 이였다(음1636년12월14일).

왕이 행궁에 머물고 남한산성이 20만 명의 오랑캐에 포위 돼 화친파와 척화파간에 말싸움으로 날을 새울 때 척화파의 대두 김상헌은 새날쇠에게 왕의 밀지를 맡겨 기호`삼남지방 수령들께 밀파를했었다.

그때 새날쇠가 남문을 빠져나가며 남긴 눈위의 발자국을 멀리서 훔쳐보는 김상헌의 애잔한 모습이 선하다.

대장장이 새날쇠가 적진을 몰래 뚫고 원군을 독려하는 격문을 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중대한 밀지를 천민 새날쇠에게 맡겨야할 정도로 한심한 조정 이였다.


돌구멍에 갇힌 47일간 득실 댄 주전파가 한 일은 고작 그거였기에 화친만이 살길이라고 단신 적진에 뛰어 든 최명길의 충정이 돋보이는 거였다.

최명길이 없었음 남한산성은 용골대의 손에 이미 초토화 됐을 테고 거기엔 처참한 살육의 피냄새가 진동했을 테다.

왕과 위정자를 잘 못 만나면 백성만 죽어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병자호란 때 죽거나 치욕을 당한 건 죄 없는 백성들이훨씬 더 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공급해주지 않으면 돈 많은 사람들은 돈만 먹고 살아야한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

요새 FTA 체결했는데 수입차값 내리지 않는다고 주류언론이 입방아를 찧는다.

우리 서민이 먹을 것 안 만들면 수입차만 먹고 살 텐가?


남문에서 청량산을 휘감아 오르는 성벽은 가팔라 커다란 구렁이가 꾸물대고 있는 모양새였다.

성이 얼마나 지정학적 요새를 잘 갖췄는지를 실감케 한다.

청량산정(482.6m)에 수어장대가 있다.

가장 높은 지대의 누각으로 군 통솔이나 주위관측을 위해 지은 건물을 영조27년(1751)에 증축했단다.


여기서 700m쯤 내려가면 서문이 있는데 남한산성 전체길이는 9km남짓이라니 하루트레킹코스로 이만한 데가 더 있을까 싶었다.

더구나 요소마다 쉼터가 있고, 역사가 숨 쉬는 스토리텔링이 울창한 솔 향속에 묻어나니 말이다.

오늘 밟지를 못한 동문에서 남문까지의 성과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하며 그곳 장의사를 옮겨놨다는 망월사,

성 보수한 승려들의 총지휘부였던 개원사,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끌려가 죽은 삼학사(홍익한.윤집.오달재)와 김상헌의 위패를 모신 현절사 등은 다음 기회에 찾기로 했다.

앞으론 서울에서 머물 때가 많을 것 같아 서울근교를 소풍가듯 할 참이다.

# 역사적인 얘기는 김훈의 소설<남한산성>에서 따 왔음을 밝힌다.

2012. 0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