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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지리산 동티살 맞아 죽은 변강쇠를 찾아 - 삼봉, 금대산, 백운산

 지리산 동티살 맞아 죽은 변강쇠를 찾아 - 삼봉·금대산·백운산



나흘 전이였다.

갈뫼 싸립문을 열어봤더니 쌍공일(雙空日)에 싸움구경 하러간다고 어수선했다.

그 쌍공일이 오늘인데 무슨 날인가?

일요일에 제헌절이니 쌍공일이란 건데 함양 삼봉산엘 가면 땅따먹기 한판승을 관전할 수 있다는 갈뫼의 장광설에 나는 꼴딱 넘어가 그의 꼴마리를 붙들고 따라나섬이라.

무릇 여행이란 게 아는 만큼만 보이고 보이는 만큼만 흥이 돋우며 돋는 흥만큼 열락에 빠져드는 법이거늘 하늘과 지리산(智異山)에 대해 아는 게 천박한 나인지라 그들의 대국을 갈뫼 허리춤 잡고 설명 듣는 수밖에 길이 없어서였다.

오도령을 오르는데 꼬불꼬불 꼬부랑길에 버스가 쌩방귀까지 끼어대며 헉헉댄다.

내려다보니 커다란 백사가 똬리를 틀었다가 땡볕에 느슨하게 풀어져 대가리를 버스 꽁무니에 처박고 있는 모양새다.

참으로 멋져버린 게 예술작품이라.

아닌 게 아니라 국제신문기자가 벌써 재미 봤다고들 그림쟁이들이 아쉬워한다.

10시쯤 오도령에 내렸다.

인오조사가 고갤 오르랑내리랑 하다가 단박에 득도[悟道]했다나.

하여 붙은 오도령 고개에 소공원을 조성해놨는데 대충 입맛 다시곤 우측 숲길로 들어섰다.

산신각성황당에 조촐한 아침상이 차려있는 걸 보니 이벤트가 있긴 있는 모양이라.

잣나무가 훤칠한 키에 초록옷을 말쑥하게 걸치고 도열한 채 나를 영접한다.


나무계단을 놓은 흑토는 부드럽고, 길섶에 쪼그리고 앉은 붓꽃은 만지면 자줏물이 터질 것 같이 농익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있다. 황토색얼굴에 검은 반점이 매혹적인 산나리가 초록숲 속에 돋보인다.

저놈은 나를 보러온 게 아니라 벌·나비를 기다리고 있을 테다.

반시간쯤 오르니 관음정이라.

저만치 새까만 지리산이 단단히 앙버팀을 한 채 하늘로 치솟고, 겁에 질린 하늘은 시푸덩한 얼굴로 콧김만 뿜고 있다.

콧김에 천왕봉이 희미하다. 그들 싸움질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곳은 남서쪽 귀퉁이에서 반야봉이 하늘을 몰고 깊숙이 쳐들어가고 있는 거였다.

이제 초장인데~!

잣나무 사열을 다시 받기로 했다. 도라지가 눈부시게 흰 면사포를 둘러썼다.

떡갈나무이파리가 무성하여 숲길은 녹색터널을 이뤘고, 뜨거운 햇살은 이파리톱날에 잘려 어두운 녹색장원을 유령처럼 떠돈다.

그늘사초가 곱게 머리 빗고 잘린 햇살 안으려고 한 끗 치장했다.

반시간을 그렇게 그들과 보내니 전망대에 닿았는데 지리와 하늘은 여태 그 모양새다.

아이더는 긴 다리로 울들 한걸음 땔 때 반걸음은 더 갈 텐데도 거꾸로다.

지난번 샛길로 샌 나비아타신랑은 배낭이 터질 지경으로 빵빵하다.

그때 먹거리 마련하느라 애쓰더니 오늘은 단단히 챙겼나보다.


내겐 가장 허물없는 커플들이라 그들과 동행하여 더 좋다.

정오가 돼 삼봉산정(1187m)에 섰다.

참으로 볼품없다.

그래도 산님이 들끓어 귀찮아 죽을 지경이란다.

세상 모든 건 자리를 잘 잡아야 광빨 낸다.

자리 값이란 말이 있잖은가?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치닫다 펑퍼짐하게 웅크려버린 게 지리산이고, 그 장대한 지리의 폼을 거의 다 한 눈에 전망할 수 있는 곳이 여기다보니 산님들의 발길이 끊기 질 않음이라.


왼쪽 천왕주봉과 조무래기봉 몇 개는 하늘에 먹혔다.

난 은근히 지리편을 들고 싶었는데 기세가 시원찮다.

주봉 아래로 움푹 팬 까만 골이 칠선계곡이고 거기 청정수가 흘러내려 맞닿은 내가 임천강인데 거기에 빨대를 박은 촌락이 한가롭다.

삼봉산능선 우측은 팔양치(八良峙)로 가는 산록이라.

전남남원과 경남함양을 가르는 백두대간의 고개란 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죽령,새재,육십령과 더불어 4대재[大岾]로 쳤단다.

변강쇠와 옹녀도 저 고개를 넘어왔을까?

천하잡놈 강쇠는 남에서 북쪽으로, 과부팔자 옹녀는 평안도 월경마을에서 쫓겨나 남진을 하다가 개성 들머리 청석관에서 눈이 맞아 배를 맞춰보니 찰떡궁합이라.

배 맞춘 채 남쪽으로 내달리며 오두방정을 떨다가 팔영치를 넘어 등구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튼 게 아니라 앞을 지리산이 가로막고 있어 이젠 다리 힘 빠진데다 삭신이 노골노골하여 주저앉아버렸다.

힘만 쎈 강쇠는 날마다 옥문관 생각에 배 내놓고 딍굴기 만하다 옹녀의 바가지에 지리산으로 나무하러 나갔었다.

게으른 강쇠는 해가 넘어가자 나무 대신 장승을 패가지고 와서 군불을 지피다 동티살(動土殺;손 안 댈 걸 건드려 지신의 노여움을 사서 받는 재앙)로 앓다 죽는다.

강쇠의 치상(治喪)을 치게 된 옹녀는 조문 온 남정네들이 침 질질 흘리며 달려들다가 초상살(初喪殺)을 맞아 죽는 자가 생길정도로 얼짱, 몸짱이 빼어난 섹시녀 였다.

판소리 여섯마당 중 가루지기전의 <변강쇠·옹녀>편을 옮겨본다.


천생음골(天生陰骨) 강쇠가 여인의 양각(陽脚)을 번쩍 들고 옥문관(玉門關) 을 굽어보며,


"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는 없다.

소나기를 맞았던지 언덕 깊게 패였다.

콩밭 팥밭 지났는지 돔부꽃이 비치었다.

도끼날을 맞았든지 금 바르게 터져 있다.

생수처(生水處) 옥답(沃畓)인지 물이 항상 고여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옴질옴질 하고 있노.“


나도 옹녀 팬이다.

강쇠와 살기엔 아까운 게 넘 많은 그녀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숲길을 걷다가 그늘사초가 마련한 자리에 점심을 폈다.

자미와 좀 전에 생긴(오늘만?)누이와 셋 이서였다.

1시였다. 녹색장원의 숲 터널을 거닐며 살랑대는 실바람결의 청량한 맛이란 여름산행의 백미다.

폭염속의 피서산행 맛을 보면 바다피서가 입맛 없게 된다.


오늘 누이가 된 여산님도 엄청 산사랑녀인 것 같다.

아침 굶는 거야 이해돼지만 아무리 느닷없이 떠난 산행이라도 점심까지 안 싸갖고 나선 건 산에 미치지 않곤 언감생심일 것이다.

암튼 복 많은 난 누이와 자미(여동생뻘)와 숲 속의 오찬에, 심심찮게 동행을 해 좋았다.

다만 등구재까지의 한 시간여 내림길에서 자미가 무릎고장(?)으로 신경 쓰게 해 뭣했지만-.


3시쯤 등구재에 이렀다.

옛날 함양사람들이 남원 인월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었던 고갯길이 지금은 지리산둘레길로 둔갑하여 트레킹족들이 넘나든다.

잠시 우리가 쉬는 동안에 인월쪽에서 네 분이 올라오고 있었다.

둘레길에서 백운산 숲길 갓길엔 철조망을 쳤는데 생나무에 못질을 하여 철망을 고정시켜 놓았다.

차라리 나무 한그루를 잘라 토막내어 철망울타리를 칠 것이지 살아있는 나무에 못질이라니~?


아이더커플, 나비아타커플도 동행꾼이 됐다.

하 많은 산님들이 산을 오르며 훼손하는 것보다 지자체에서 분별없이 하는 자연훼손이 훨씬 심각함을 통감한다.

세금 낭비해가며 자연 망가뜨리는 지자체는 언제쯤 정신차릴런지?

백운산을 향한다. 전나무와 잣나무가 산록을 점령하여 신선한 피톤치드 뿜어내기에 숲은 더없이 청량하다.

둘레길 걷는 사람들 백운산을 오르내리면 얼마나 행복해 할까! 한 시간쯤이면 족할 것 같아서 말이다.

오르다 숨이 차면 쭉쭉 뻗은 전·잣나무 아래 앉아서 시원한 바람결에 몸을 맡겨보라.

천국이 따로 없다.

순간 나도 잊게 된다.

버림의 쾌감도 느낄 것이다.

자미가 앞장을 섰다. 오르는 건 거뜬하단다.

백운산(903m)이 엎드려 우릴 맞는다.

지리산은 오늘 완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안무구름은 하늘 편에 서 지리봉우리들을 가차 없이 삼커 버렸다.

성한 땅은 반야봉쪽 뿐이라.

나비아타신랑이 꺼낸 쭈쭈바와 냉캔맥은 시원한 청량 맛의 극치를 맛보게 했다.

금대산을 좇는다.

반시간 동안 숲은 속살을 비롯해 가진 건 모조리 내놓고 있다.

우리에게 아낌없이 가진 걸 죄다 주는 건 산이 아니곤 없을 것 같다. 왕 대접을 받고 있는 게다.

하여 우린 산에서 품위 갖춘 손님이 돼야함이다.

사랑이 뭔지를 깨닫게 해준 게 산이기도 하다.

지리서쪽에 노을이 물들어 해가 질 때 동쪽지리에선 하얀 달무리가 오름을 동시에 관망한다는 금대산(847m)에 올랐지만 지리는 실토(失土)를 포기한 몽양이다.

땅따먹기 싸움은 하늘의 승리라!

이중환의 택리지에 여기 금대산이 장엄한 지리산을 전망하기 가장 좋다 해서 ‘금대제일(金臺第一)이라 했다.

지리산과 하늘의 땅따먹기 싸움을 5백년 세월 묵묵히 지켜 온 전나무가 금대암에 수호신처럼 서있다.

참으로 잘도 생겼다.


금계들머리에 드니 5시가 돼 간다.

송 회장부부가 구계탕을 마련하여 환대를 하고 있다.

헛개나무, 구기자, 생강나무등 여섯가지 약초를 넣어 9시간 끓여 우려낸 국물에 영계를 넣고 만든 구계탕은 송 회장부부만이 내놓을 수 있는 별식이다.


내가 퇴원했을 때 약초오리탕을 해줘 두 번 먹은 적이 있는 그 고소한 탕국물이 등산 후 산속에서 먹으니 감칠맛이 더한다.

사실은 그 맛보다도 정성과 성의가 보약이라.

약초 두서너 가지를 넣고 세 시간씩 세 번 끓였다 해서 구계탕인데(나비아타가 명명했다) 송 회장이 개업을 할까도 생각했으나 늙다리라 포기했단다.

그 비법 알고 싶은 분은 016-601-8600로 문의하면 될 성싶다.

까놓고 얘기해서 송 회장은 껍질이고 사모님이 진짜비법을 알고 있는 기라.

송 회장이야 고작 한다는 게 군불이나 지피고 목에 깁스나 잔뜩 하는 - 그가 혹시 산행기 읽고 뿔따구 나도 이 더위에 고정 하시라요.

구계탕 먹은 게 말짱 헛짓 아니겠소?

어쨌거나 포식 또 포식의 쌍공일 이였다.

산은 사랑하는 만큼 얻게 된다.

2011. 0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