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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황홀한 외출 - 단풍속의 대둔산

황홀한 외출 - 단풍속의 대둔산

17번 국도를 타고 대둔산관광단지에서 배티재쪽으로 한 굽이 휘돌아 오르면 용문골등산로가 있다. 몇 년 전에 비해 폭은 넓어졌는데 산님 없어 적막하긴 예전 같아 좋았다.

시내근교 둘레길만 냄새 맡다가 따라나선 아내와 동행하기에 오늘은 좀 특별하다.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길은 습하고 골 깊어 바스락 소리도 안낸다.

터널을 이뤘던 숲은 잎이 떨어져도 울긋불긋 단장하며 가을 갉아먹어치우기에 숨소리도 없다. 홀랑 깨 벗은 감나무 십여 그루는 앙상한 나지로 그물을 만들어 파란 해천(海天)에 투망질을 해 빨간 홍시들을 주렁주렁 건져놓았다. 아내가 탄성을 질렀다.

‘여기 사는 날짐승은 복 터졌다.’고. 돈 주고도 사먹을 수 없는 천연날 것을 놈들은 포식할 테니 부러운 게다. 허나 놈들은 포만감에 오수에 들었는지 낌새도 없고 돌 사이를 기는 실개울 속삭임만 가늘게 들려온다.

실개천물은 노래하듯 ‘가을은 길손의 계절’이라고 소곤댄다. 쳇바퀴 돌 듯한 삶의 공간에서 탈출하여 단풍 날리는 허허한 공간에 몸을 맡기고 또 하나의 나를 찾아보는 계절이라고.

반시간쯤 아내와 난 허허로운 공간에 몸뚱일 던졌다. 신선암이 예의 바위굴에 거적을 쓰고 마중을 한다. 근데 암자는 명패를 두 개 달고 있었다. 거적문에 <수도 중>이라고 쓴 딱지와 <행자여, 여기 물건을 망가지게 하지마소서!>란 경고판을 반 뼘 마당(?)에 내 걸어 놨다.

오직 석간수위에 걸린 조롱바가지 몇 개뿐 눈 씻고 봐도 망가뜨릴 게 없는데?

행자여! 발걸음소리, 숨소리도 경건 조심하여 청정한 자연을 흠집 내지 말라는 것 같았다. 석간수로 목 추기고 장군바위쪽으로 향한다.

 

인기척소리가 점점 드세졌다. 케이불카승차 전망대에 이르자 인파난장이 됐다. 가파른 철계단을 관광객꽁무닐 따라 오른다.

산님보단 관광객이 대세를 이룬 인파는 단풍보다 더 요란한 색깔의 전시장을 일궜다. 임금바위에서 입석대를 잇는 금강구름다리는 대둔산의 아이콘이다.

아름다운 단풍골짝을 50m위 허공에서 감상하는 맛, 공중에 붕 떠 출렁대며 엄습 해오는 공포의 80m보행, 파란 하늘이 빙 둘러 찔러대는 바위창날로 떨어져 나와 금방 덮쳐올 것만 같은 신기함속에서 야릇한 쾌재를 부른다.

 출렁다리 스릴을 약수정 쉼터에서 진정시키고 삼선계단을 오를 땐 아내는 포기했다. 예까지 온 것만으로도 아낸 대단했다. 빡센 등산로에 출렁다리의 공포까지 맛보며 한 시간 반쯤 강행군했으니 몸도 마음도 지칠만한데다 하늘로 오르는 공포는 만용이라는 게다.

아낸 정코스를 밟고 난 삼선계단을 올라 승천하기로 했다. 경사 80도에 가까운 계단 끝은 하늘 속으로 처박힌 채여서 이미 승천해 사라진 그 많은 사람들의 근황이 궁금하다.

여태 암 소리 없는 건 천국이 좋기 땜일 것이다. 그래선지 너도나도 허공에 몸뚱이 내던지는 도박에 줄서기 하려 기다리고 있다.

지 혼자 몸뚱이 가까스로 지탱할 계단은 한 번 발 들여놓으면 빠꾸는 없다. 못한다. 번지점프 하듯 뛰면 모를까 빠꾸할 틈새가 없다.

죽으나 사나 하늘 밥 돼야 한다. 하늘 아가리에 들어가 밥이 되는 공포는 곧 쾌락이다.

쾌락은 공포와 비례한다. 진정한 쾌감은 극단의 공포를 극복했을 때 맛보게 된다. 승천해서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공포는 사라지고 자기를 발견한다. 자기 찾기의 쾌감! 대둔산은 그런 쾌락을 즐기기에 유일무이한 산일지도 모른다.

대둔산은 돌산이다. 돌도 넘 거칠다. 그 돌무더기가 지 멋대로 포개고 급살 맞게 쌓여있어 오르는 길이 장난이 아니다. 두 시간을 보채서 우린 갈림길(상점)에 닿았다.

좌측으로 10분쯤 오르면 정상 마천대(878m)라. 난 아내의 심기를 헤아려 정상 밟고 오는 걸 포기하고 우측으로 틀었다.

용문골 찾아가는 길에 왕관바위능선을 타면 하늘을 겁 없이 쑤셔대는 대둔산의 송곳바위들을 거의 볼 수가 있다. 근데 바위능선이란 게 굴곡이 극심하여 지랄이다.

아낸 영문 모르고 뒤따르느라 용을 써댔다. 마천대 안 간 대신 혹독한 고생을 한 셈인데 난 시치미를 싹 땠다.

그렇더라도 마천대에서 조망하는 볼거리보단 월등한 코스인 것이다. 반시간을 즐기다 용문골로 들어섰다. 다시 인적이 뜸해졌다. 거대한 바위병풍을 뒤에 치고 우리내왼 점심자릴 폈다.

밥 대신 빵,떡,과자,과일,차,초콜랫 등 푸짐했는데 젤 좋은 건 우리 둘 만이고, 시간을 푸짐하게 쓸 수가 있었단 거였다.

용문골은 천길 단애협곡이다. 가파른 돌계단을 만들어 철재가드레일까지 설치해 놓아 옛날 같은 고생은 덜게 했다. 반시간 쯤 바위무더기와 씨름하면 칠성봉전망대가 있다.

용이 승천하기 위해 거대한 바위를 빠개고 또 구멍을 낸 바위사이를 끼어 오르다보면 바위위에 철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놨다.

난 네 차례 온 장소지만 올 때마다 펼쳐지는 풍광은 황홀하고 기똥차다. 뾰쪽바위산 일곱 개가 어깨를 겨루며 병풍을 만들었다.

그 바위가 피골수 뽑아 키우는 소나무들도 이젠 영양실조라서 말라 삐뚤어져 몸꼴이 꼴이 아니다. 삐적 마른 바위와 소나무는 그래서 더 멋지다. 그 병풍 아래 협곡은 단풍이 홍건하고 그 밑에선 물길이 실내악을 연주하고 있다.

앉아서 감탄할수록 환장케 한다. 더구나 이 전망대바위는 직각으로 솟은 바위라 밑이 안 보이는데 클라이머들이 애인처럼 사랑하는 바위다.

이 바윌 오르다 비명에 간 세 분의 비문이 저 아래 숲 속에 있다. 공중에서 공포를 즐기다, 공포가 주는 자기를 찾다 영면한 산악인들이기에, 좀은 애석해도 좋아서 한 일이기에 그들의 죽음은 결코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봤다.

찾아 온지가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산님들 발길이 뜸한 건 험악하고 더는 꾸꿈스런 데여서 회자되지 않은 땜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반시간쯤 내려오면 아까 신선암자에 닿는다.

고되긴 했어도 만족해하는 아내의 소견에 난 행복했다.

가을은 외출의 계절이다. 사람냄새 찌든 공간에서 침잠과 고독이 꿈틀대는 공간으로 외출하는 계절이다.

  2012.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