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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내가 너의 애인이 되기 전엔 넌 한갓~~~ (구병산)

내가 널 애인삼기 전엔 넌 한갓~ (충북알프스 구병산)

내가 너와 마주하기 전엔 넌 한갓

이파리일 뿐이었다

니가 여름 내내 머리 싸매고 짜낸

광합성이란 신통술로 변장을 한다지만 내가

널 부르기 전엔 하나의 잎사귀였다

빨`주`노`초로 화장한 너의 예쁜 얼굴도 내가

‘단풍’이라고 이름 짖기 전엔 그냥 이파리였다

너의 현란한 카멜레온 변장술로 산록을

분탕 칠 한단들 내가

감탄하지 않음 애처로운 수고일 뿐이다

‘아름답다’고 ‘눈부시게 황홀하다’고  그때

넌 다시 살아나는 게다

울긋불긋한 니가 바람이 없었다면 멋들어진

공중서커스를 할 수 있었겠느냐

한껏 뽐낸 몸짓을 내가 불러주기 전엔 위험한 곡예일 뿐이었다

‘낙엽’이라고 불러주었을 때까진

 

낙엽이 된 니가

땅에 무참히 딩굴 때 내

발부리에서  되살아난다. 부스스

소리 내며 절명의 노래를 부를 때

난 그 순간 낙엽인 널 사랑한다

나무에게 버림받기 전

미풍이 안 불면 벙어리였다

미풍이 널 어를 때 언어가 생겼고 

속삭임도 내가 경청해 주기 전엔 수화만도 못했다

내가 마주하자 비로써

속삭임과 수다와 노래와 울음까지 울 수가 있었다

난 그런 너의 언어를 미치도록 사랑한다

내가 있어 존재하는 너

내가 불러줘야 생명을 얻는 너

단풍과 낙엽과 바람을 나는

죽는 날까지  죽도록 사랑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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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교쪽에서 9시 반에 시작한 산행은, 가파른 경사로를 철도침목으로 가지랭이 찢어질 계단을 만들어 놔 이십여 분 숨 헐떡거리게 하곤 구병산은 드디어 바위등걸을 내밀었다.

갈수 탓 이였던지 말라빠진 갈색 잎은 박쥐처럼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다. 시선을 끄는 놈은 까맣게 보디빌더 한 병사들 - 흑송(黑松)들이였다.

땅딸막해도 낫살깨나 먹은 놈들은 앙팡지게 발 딛고 서서 팔 꼬고 말춤을 출 자세다. 떼거리로 나선 놈들이 헬 수도 없고, 끝도 없이 도열하여 추어대는 ‘강남스타일’은 나를 하늘아래 스테이지에 초대했나? 착각하게 했다.

돈 없고, 빽 없고, 잘 생기지 못했어도 자기스타일을 고집하여 다듬으며 미치다보면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내 주류 속에 편입함을 그동안 무시당했던 흑송들도 알아챈 모양이라.

난 그놈들과 눈 맞추며 의기투합해 구병산 바위등걸을 탄다. 이따금 놈들의 가지에서 쉬다가 춤사위에 떨어져 달려온 바람이 그리 시원할 수가 없다.

 

갈색이파리도 그 바람결에 흐느적거리며 낙엽의 설음을 알아채선지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처댄다. 모든 게 가을산행에서 맛 뵈는 풍치라!

우측엔 25번 고속도가 노란들판을 쪼개고 산골로 사라진다. 내가 밟고 있는 아홉구릉 끝은 형제봉,천왕봉에 코 꿰서 문장대에 이르러 법주사를 품에 안는다.

이 바위산등걸을 충북알프스라 부른다지만 내 앞의 흑송들-흡사 흑인병사들이 떼춤을 추는 ‘강남스타일’에 나는 정신이 홀렸다. 정신 팔려 행복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이 여자가 남자보다 장수하는 비결은 행복에 취하는 시간 땜이란다.

산행만 해도 남자는 정상을 밟는 순간을 행복해하지만, 여자는 그 과정 - 어제부터 준비해오는 그 시간들을 즐기며 행복해 한다는 거다.

똑 같은 일을 하면서 여자는 행복에 취하길 몇 배나 더 하는 게다. 산행 때 오직 정상을 향해 내닫는 남잔 찌질이다.

흑인병사들의 말 춤 한 마당에 눈 팔 여유를 가져야 여자의 치맛자락을 잡을 수가 있을 테다.

동물은 사랑을 아는 순간부터 진화한다고 어느 학자는 설파했고, 사랑은 행복을 쟁취하는 자만이 오래 향유한다.

오후3시쯤 853고지 아래 병풍바위 밑에서 날머리 계곡으로 찾아들었다. 꼬두막경사에 미끄러지다 훑는 계곡은 황홀찬란이라!

골짝을 물들인 현란한 단풍에 눈 팔다가 넘어질 뻔하고, 미끄럼 타다 엉덩이 까고 주저앉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1km남짓한 골짝을 한 시간을 넘겨 아장대면서도 내 둔한 감성과 짧은 혀로 표현할 수가 없어 애달팠다.

다만 한 가지, 내가 그의 애인이 돼 주었을 때 그도 황홀한 단풍으로 태어나고, 내 귀를 쫑긋하니 속삭임이 들렸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모든 걸 가능케 한다.

2012.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