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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하늘과 호수사이 - 춘천 오봉산

하늘과 호수사이 - 오봉산

 

오늘, 갈 하늘이 淸明天高치 않은 이윤 쪽빛 소양물 탓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 봅니다.소양호수의 정령이 龍이 되기 위해선 오봉산 - 관음`문수`보현`나한`비로자불 - 을 알현하고 飛天해야할 텐데요.

五峰山頂을 밟지 않고는 용을 낳을 순 없을 태생적 한계를 지닌 소양호와 그 은밀한 속내를 푸른 가을하늘이 모른 척 해야 할 숙명의 대치가 일군 기막힌 조화를 관망하는 산행은 여기에서만 가능할 특별한 백미일 것도 같습니다.

 

 

고려 때 이자현은 이곳 빼어난 산골짝에 소나무 아홉 그루를 심어 명품정원을 만들어(정약용의 여유당전서) 그 홀연한 경관미를 지금도 구송폭포와 연지에서 완상케 합니다. 담양의 소쇄원이나 보길도의 부용동정원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정원미의 절정을 이루듯 말입니다.

 

뿐이랴. 저 깊은 협곡에 넓은 불도량을 빚어 청평사를 일군 고즈넉한 가람은 뒤로 휘두른 기암병풍들이 오봉을 이루고 소나무들을 동반해 동락케 했으니 庵松의 기똥찬 자연미는 세치 혀를 무색게 합니다.

이토록 멋진 기암괴석과 기품 있는 노송의 그림은 천년의 세월이라야 그릴수가 있을 테지요.

 

기암과 노송, 호수와 하늘, 가람과 계곡이 한 도량에서 서로의 살을 파먹으며 아기자기하게 공생하는 자연의 비경이 오봉산의 긍지일 것 같습니다.

고작 키가 779m의 오봉산자락이, 세 시간여의 탐방만으로도 우리네들을 황홀경에 빠져들게 하는 건 뛰어난 자연의 조화 땜일 겁니다.

 

오전 9시쯤 충정로역에서 전철에 탑승하여 상봉역에서 환승, 춘천에 도착했을 때도 오봉산행 계획은 생각 안했습니다.

어제, 둘째와 막내처제 그리고 우리내외 네 명이 춘천삼악산등정을 하자고 약속했었는데 느닷없이 처제낭군이 끼어드는 통에 소양강뱃놀이와 청평사구경으로 수정을 해야 했습니다.

 

까닭은 동서가 등산엔 젬병인데다 巨軀로 빡센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사는지라 풍광구경과 식도락으로 하루를 때우자고 포기한 겁니다.

좀 괴씸했지요. 남들의 산행에 방해꾼인 줄을 빤이 알면서 끼어든 건 어떤 심본지 알다가도 모른척을 해야 했으니 말이외다. 먹거린 자기가 책임진다나요!

춘천시내 어느 유명한 막국수집에서 저육수육 한 사라에 곁들어먹은 메밀국수의 맛은 암데서나 가질 수 있는 식도락은 아니었지요. 춘천막국수의 명성이 닭갈비 못잖다는 걸 실감케 했습니다.

포만감에 취해 우린 소양호를 가르며 청평사를 찾아 들었지요. 근데 거구 동서가 깜냥에 미안했던지, 아님 호반에서 마주한 오봉산 키가 만만해 보였던지 오봉산행을 하자네요.

 

발바닥이 근질근질했던 우리 네 명은 '정말이냐?'고 묻곤 곧바로 산행을 시작했습죠. 나 빼곤 세 명이 여자들인데 거구의 사나이가 저 깟 오봉산 앞에서 기 죽긴 자존심 상했던 거지요.

하늘소(음식점)에서 왼쪽 계곡을 가로질러 오르는 등산로는 급경사라 여간 빡셌고, 쉬엄쉬엄 한 시간을 오르니 암릉지대에 계속 밧줄에 몸을 의지해야하니 동서는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땀은 비 오듯 하고 아랫도리는 풀려 힘 빠졌는데 까마귀까지 울어대니 그만 하산합시다."라고 하소연 합니다. 산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님을 통감한 동서였지요.

그만 청평사 쪽으로 하산하여 구성폭포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곤 정상을 향하려는데 처제가 뒤처집니다. 신랑 때놓고 발걸음이 떨어질 리가 없었던 게지요.

 

이윽고 아내도 되돌아서니 둘째도 내 눈치만 보더니만 "아빠 그냥 가지요."라고 나를 붙드는 겁니다. 난 뿌리 쳤지요. "모두들 슬슬 하산해라. 내 후딱 정상을 밟고 오겠다."

밧줄을 잡고 암릉을 탑니다. 바위산은 깊이 페인 주름살 곳곳에 소나무를 키워 지난했던 형극의 삶을 표징한 굽어 휜 적송들로 하여금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위와 소나무의 동반! 헬 수 없을 세월을 온 몸에 새긴 자태는 차라리 예술입니다. 앙상한 회색 뼈다귀만으로도 고사목이 그리는 그림은 찬탄일 뿐 이였습니다.

그들이 소양호반과 푸른하늘을 캔버스로 삼았다는 절묘함은 나를 미치게 하는 거였지요. 거기에 빠지다보니 시간이 넘 지체됐습니다. 정상은 아직 인데 말입니다. 내 욕심만 채울 순 없었지요. 되돌아섭니다.

 

 

청평사에서 우린 합세했고, 구성(송)폭포와 연지를 훑고 소양호를 건너 춘천의 아이콘인 닭갈비집을 찾아들었지요. 춘천 닭은 어떤 놈들이기에 돼지갈비만큼이나 클까요.

오후 6시에 들어선 **닭갈비집은 20분을 기다려 자릴 잡았지요. 기다릴만한 했습니다.

7인분(1인분1만원)으로 포만감이 돌자 자릴 떴습니다. 귀가하니 11 시였습니다.  오늘의 모든 경비는 둘째가 쏘았습니다. 효도(?)한 거지요.

동서는 지갑만 들고 왔다갔다 폼만 잡은 셈이지요.

허나 정상 턱밑에서 돌아선 난 양이 덜 차서 혼자라도 불원간에 오봉산을 다시 찾아갈 작정입니다.

                                        2012.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