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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아이젠 보다는 유~젠을 - 흑백의 콘트라스트 백악산

아이젠 보다는 유~젠을 - 흑백의 콘트라스트 백악산

하얀 눈발이 뒤덮힌 산야를 찾아드는 겨울나들인 눈이 부셔 실눈을 뜬 채 겸손해져야만 겨울의 정취에 빠져들 수가 있다. 눈꽃이나 상고대가 아니더라도 백설의 세계는 우릴 하얀 동심에 이르게 한다. 백악산행을 예약하며 그런 데자부를 하 많이 상상했었다.

오전 10시, 짙은 농무(濃霧)를 뚫고 49번국도 괴산 화북초교 앞에서 시작한 겨울나들인 질펀한 눈 대신 물안이 골의 청랑(淸浪)한 계곡물소리가 찌거기 낀 내맘 골을 어루살피는 거였다.

냉한 겨울공기는 스산하고 흐르는 공간은 적막하다. 그 적막한 고요를 청음으로 깨우는 골짝물길은 나를 한 없이 씻어내는가 싶었다. 백악골이어 하얀집이 많은가? 햇갈리다 초분 같은 폐가를 지나니 느닷없는 백골부대가 기립을 한 채 눈을 부시게 한다.

초록세상을 꿈꿨던 초목들이 어느 날 몸뚱일 빨갛게 불태우다 일제히 옷을 벗고 무대를 내려설 때 입장한 백골부대 - 겨울나무 자작나무가 아침햇살에 누드 맛사질 하느라 황홀하다.

놈들은 딴 나무를 위해 햇살 머금을 우듬지만 남기고 가지들은 도태시킨다. 파란하늘을 향하다 팔등신 된 피골 접한 몸매는 때어낸 가지의 상처자국이 까만 반점이 돼 흑백의 콘트라스트를 이루니 겨울을 더욱 눈부시게 하는 주인공이라.

흰 눈 덮인 산야에 우뚝 서서 파란하늘을 향하는 하얀 몸짓은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 낼 수가 없다. 그 백골부대 사열을 마치고 다시 골짜기의 적막에 몸 사리다가 수안재에 올랐다.

아이더, 나비아타, 까성녀가 선점하고 있다 반갑게 맞아준다. 능선에 오르니 싸한 바람 한 무리가 끈적거린 나의 땀샘을 시원하게 애무한다. 겨울등산하기 최적의 날씨다. 능선에서부턴 뽀드득 소리 낼 밟을 눈은 없어도 나목들이 떨궈 놓은 낙엽카펫의 바스락 소리가 겨울의 찬 공기에 또 다른 파장을 일군다.

백악산은 여느 산에 비해 잡목이 빼곡하다. 깨 벗은 나목들이 검회색 몸뚱일 촘촘히 뒤엉켜 군락을 이룬 건 흑인병사들의 끝없는 엑서더스 같았다. 그들은 어딜 향하는 걸까? 바람을 향하는 거였다. 미치광이 한냉전선을 그렇게 떼거리로 막아서지 않고선 동사(冬死)하여 춘몽도 꿈꿀 수 없단 걸 체득했던 바다.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고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반세기 전에 사자후를 토했었다. 불통과 편 가르길 하지 말자고 대선후보들의 입이 닳는다. 불통으로 좌와우, 부자와 빈자로 편 가른 놈이 누군데, 여태껏 도루목하고 있다 웬 선무당 지랄병인지 민초들은 헷갈린다.

흑인병사들이 바리게이트를 친 대왕봉 아래서 점심자릴 폈다. 이젠 어였한 갈뫼식구가 된 진영이네 네 가족, 아이더커플, 나비아타커플, 까성녀가 식도락에 빠져들었다. 사내 네명을 건사시키느라 아니, 그들의 푸짐한 점심을 챙기느라 애썼을 진영엄마의 엊밤 정황을 덤으로 양념 삼은 겨울산의 점심은 여간 따뜻한 거였다.

까성녀와 나비아타는 착한 막내에게 기호식품을 묻는다. 담 산행 땐 준비해 오겠다고 약속하고 있어 벌써 난 그 정경을 그려본다.

백악산의 별난 풍광은 흑인병사들이 거대한 바위를 끌고와 군데군데 정상을 만들어 놨다는 거다. 각기 바위이름(강아지,부쳐,너럭,돔,침니,구멍 등)이 명명 됐는데 정작 산의 토질은 흑산에 가까운 마사토여서 바위들의 출저가 사뭇 궁금해지는 거였다.

3시를 넘겨 백악산정상(856m)에 섰다. 예의 넓적바윌 겹겹이 포갰다. 돌연 여산님들이 아이젠을 착용한다. 갈뫼 왈, ‘아이젠은 지가 손수 신을 때고 남이 신겨줄 땐 유~젠’이란다. 이젠 흔해빠진 아이젠은 사양하고 좋아하는 사람 불러 유~젠을 착용하기를 권하고 싶다.

무거운 배낭 짊어진 채 용쓰지 안 해서 좋고, 신겨주는 상대는 생색내 기분 좋을 유~젠을 착용할 때란 것이다. 까성녀가 맘 불편했던지 바윌 걷어찼다. 모두가 짝이 있어선가? 까도남인 나도 있는데!? 아닐거란다. 그렇게 해서 산 높이를 깎아놓으려는 심술이라고 누군가 변명까지 해줘 모두가 유쾌하게 ㅋㅋ댔다.

정상에 서니 속리산의 신선봉,문장대,천왕봉,형제봉이 더 가까이 오고 있다. 하늘 따먹기 하는 연봉등살에 파란하늘이 좁아진다. 명년엔 저기 연봉들을 다시 짓밟겠다고 갈뫼가 이를 간다.

산력이 삼십년도 훌쩍 넘겼을 그는 산귀신이다. 모르는 곳만 빼곤 전부 훤하다. 게다가 유머와 위트가 출중해 매번 나를 감탄케 한다. 갈뫼산악의 대들보라. 갈뫼엔 그에 버금가는 산귀신들이 즐비하다. 당당하다보니 첨으로 산행에 낀 분들껜 친절맛이 별로일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분은 내게 ‘갈뫼의 매력은 바로 그 점-지 알아서 하란 식’이라고 하였다.

타 산악회가 산행방향을 알리기 위해 표식한 흔해빠진 시그널 하나도 하지 않는다. 구실은 ‘자연미를 훼손해서’란다. 오늘도 전주에서 와 첨으로 끼어들었다는 두 산님께서 “여긴 산악대장도 없느냐?”고 내게 물었다. 들머리하얀집들 탓에 좀 어영구영 한 땜 이었다.

창립 30년이 돼가니 산꾼 배출도 꾀나 했을 테니 이래저래 자부심이 돋을 만하다. 난 언젠가부터 그 늠름함이 맘에 닿았다. 아이더커플과 나비아타커플은 내가 산을 기억하는 날까진 추억창고에서 날 뿌듯하게 할 산꾼-귀신들이라!

매번 산행에서 그들 커플을 만나는 교감도 은근하여 산이 주는 보너스를 하나 더 챙기는 셈이다. 오늘은 많은 시간을 그들과 동행했다.

냉랭한 시공간을 누드로 엑서더스 하는 흑인병사들의 몸짓도 겨울하늘 아래선 스산하고 아리하다. 겨울의 홀로산행이 너무 적막할 땐 사람이 그리워진다. 곳곳에 낭패가 더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의식하기 땜 이렸다.

5시가 아직인데 산골은 땅거미가 어둠을 빠르게 살포하고 있다. 석문사 석불도 밀려드는 어둠은 어쩌질 못하나보다. 옥양폭포구경을 하자는 나비아타 짝의 제안을 너무 어둡다는 핑계를 대며 궁둥이 때질 안했던 나를 내가 생각해도 오늘은 좀 의아했다.

어두워지는 만큼의 피곤이 밀려왔다. 활엽수 빼곡히 우거진 여름이 더 멋있을 것 같은 백악산행- 높지 않은 능선을 두터운 초록포장 속에 거닐며 산들바람에 가슴단추 벌리고 사방에서 휘달리며 다가섰다가 멀어지는 유명한 산들, 청화산,조항산,대야산,군자산, 그리고 속리산의 연봉들을 거느리는 호연지계가 더욱 감각적일 것 같았다.

7시간여의 겨울산행- 피곤이 잠을 부르고 눈까풀이 스르르 놈을 가두는 거였다. 어둠을 달리는 버스는 요람이라. 파란하늘 아래 설산의 백골부대와 흑인병정들의 한냉전선과의 대치가 이룬 흑백의 콘트라스트는 겨울산의 백치미이리라. 행복했다.

                           2012.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