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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실크로드와 눈이불 속의 운길산

북한강엔 햇살이 흐르고 운길산은 눈이불을 덮고

 

 체감온도 20도를 웃돈다는 서울아침, 용산역을 출발하는 전철에 몸을 싣고 중앙선을 달린다. 지상을 달리는 중앙선철마는 굼뜨고 느린가 싶다. 망우역까지의 서울의 뒷풍경은 발전이 정체 된, 뽐낼 것도 없겠다 싶어 비까비까하는 도심보다는 정한이 묻어나 운길산역까지의 한 시간은 여행맛깔이 났다.

한적한 산촌에 더구나 고찰과 명산의 대문치고 유리옷 걸친 큰 역사는 도시 어울릴 것 같지를 안했다. 공룡 같은 역사를 나서니 서릿발냉기에 엄습당한 나는 몸뚱이 단속부터 해야 했다. 산님들 몇 분이 내린 것 같았는데 행방이 묘연, 칼바람만 윙윙대는 황량한 촌길에 미아처럼 갈길 찾기에 눈을 부라렸다.

갓길에 삐딱하게 세워놓은 홍보용안내판들은 그대로 운길산 이정표노릇도 한다. 산길에 들어서면 나무들은 저마다 산악회안내지 한 뭉치를 비닐에 넣어 달고 동냥아치처럼 줄줄이 서 손 내미는 것 같았다. 평소엔 길손이 많다는 증좌인데 오늘은 바람과 햇살뿐이다.

문득 며칠 전(20일) 백한 살로 이승을 떠난 일본의 노시인 시바타 도요여사의 시구가 떠올랐다.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오게 해 주었지.                                                                                      그랬더니 햇살까지 들어와                                                                                                           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                                                                                                         "인간은 어차피 다 혼자야." --->

소나무사이를 기웃대는 햇살과 그를 좇는 바람과 그들을 마주하는 외로운 나의 발길에

“혼자 어딜 뭘 하러 가는데?” 그들이 묻네!

“인간은 어차피 혼자 아냐? 죽음을 향한 거지-.”라고 대답 하며 적요한 산길에서 술래잡기를 한다.

수종사 오르는 가파른 길은 어제 녹은 눈이 간밤에 얼어붙고 눈까지 덮어써 빙판길이 됐다.

흰 눈 카펫을 깔아놓은 일주문이 나를 반기고, 그 뒤 하얀 맨살 들어낸 채 파란하늘아래서 일광욕하는 관음상이 눈부시다.

산도(山道)가 끝나고 전나무 네 그루를 앞세운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서면 빙판 돌계단을 밟는데 맑은 풍경소리가 간헐적이다.

오백여년 전에 세조는 아랫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으려다가 저 소리에 밤잠을 뒤척였단다. 세조는 등창이 심해 오대산월정사 맑은 물에 멱을 즐겼다. 그날도 동자승한테 등목을 하고 북한강뱃길로 귀경하던 차였던가 싶다.

그를 뜬눈 밤새우게 한 종소린 바위틈새를 흐른 물소리였고, 그 석간수는 수종사입구에 있는 학돌 옹이에 지금도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고드름속의 물방울소리는 가녀리고 낭랑하다. 바위굴의 그 물소리가 수종사를 발원케 했고, 그 앞에 기념식수한 은행나무가 오백 년 동안 수종사지킴이로 온갖 풍상을 켜켜이 쌓으며 거목이 돼 서있다.

종루에 올라 세조가 배타고 유유했을 북한강과 두물머리와 수종사에 얽힌 사연을 더듬었지만 강은 사라졌다.

흐르는 강물 아닌 빙하위로 내리꽂는 햇빛프리즘은 강을 은빛실크로드로 탈바꿈시켰다. 눈부신 실크로드를 휘두른 하얀 산은 부짓갱이 점을 찍으며 거대한 수묵화를 일궜다.

아~아! 가슴이 탁 트이는 절경이라!   

예서 한양이 얼만데 선현님들이 여길 찾아 - 한음선생의 풍류와 다산, 추사, 초의선사가  이곳을 찾아 석간수로 빚은 차향과 맛을 조금은 이해할 만했다. 그 행적을 이곳에 서서 잠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여라.

그분들이 즐겼을 바람과 햇살과 물맛은 오늘 우리도 고스란히 향유할 수 있음이니 자연의 공평함에 감루 해야 함이다.

11시 반, 운길산을 향한다.

앞에서도 뒤에도 오직 하나 벗하는 자는 그림자뿐이다. 급경사계단오름길은 적설로 애를 태운다. 아이젠과 스틱이 또 다른 내 분신이 됐다. 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은 눈 위에서 부서지고 눈은 은빛알갱이로 튕겨 골짝을 어둠에서 해방시키고 있다.

중간 삼거리에서 잠시 쉬려는데 저쪽에서 산님 한 분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나무늘보 오르듯 나타난다. 어디서 출발했기에 배낭은 저리 크고 발걸음이 무거울까?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나의 진솔한 인사에도

“예”

“혼잡니까? 어디서 오시는데_?”

“아, 예” 말수 적은 그는 나무늘보처럼 굼뜨게 걸음을 옮기는 거였다.

젊은 그는 산님 같지 않게 냉정, 아니 진정한 산꾼 이어서 입이 무겁고 그렇게 오롯이 즐기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부러 한참을 늦장 부려 거리를 두고 나도 그의 뒷발치를 밟는다.

반시간쯤 그의 발자국을 밟으니 눈덩일 이고 비틀대는 소나무 아래서 그가 서있다. 사진 찍는가 싶었고 나도 디카를 꺼냈다. 그가 문득

“한 장 찍어드릴까요?”라며 씩 어색한 웃음 짓는다.

목례를 하며 나는 디카를 그에게 건넸다. 그가 아니면 풍광에 나를 집어넣고 싶어도 묘수가 없다. 이번엔 내가 찍어드리겠다고 하자 배터리가 떨어진 것 같다고 사양을 해 내 먼저 출발했다. 정상이 가가까워질수록 적설량은 많아져 잘못 디디면 푹 빠졌다.

다행인 건 앞서 간 네댓 산님들 발자국을 따르면 대는데 날 세운 바람이 분패를 치고 그때마다 나목에 엉킨 눈덩이가 쏟아져 눈폭탄을 뒤집어 써야했다.

까마귀 한 쌍이 창공을 배회하며 괴성을 질러댄다.

오후1시를 넘겨 운길산정상(610m)에 섰다. 전망대에서 비닐로 옹색하게 바람막이를 치고 분패와 사투하며 산님 네 분이 점심을 하고 있었다.

그 위 나목들 속에 한 놈이 주먹만 한 검정버섯을 줄줄이 매달고 푸른 하늘 속에서 한파에 몸부림친다. 나무늘보가 도착했다. 행선지를 물으니 예봉산 쪽을 가리키며 발을 땐다.

예봉산을 밟고 팔당역을 들머리 삼는 5시간여의 코스를 아침에 확인했지만 초행이고 더구나 눈 속의 홀로산행이라 나는 포기했다.

온길 되짚는다. 날씬 너무 춥고 앉을 곳도 없어 끼니 때울 곳이 마땅찮아 바람막이 바위 앞에서 배낭 속의 찰떡과 커피를 꺼내 선체로 먹는데, 박새 한마리가 날아오더니 후크에 낀 떡을 낚으러 날갯짓을 해댄다. 떡 한 입을 때어 나뭇가지에 놓자 잽싸게 물고 달아났다.

소식도 빠르다. 순식간에 십여 마리가 날아들어 방정을 떤다. 크게 한 덩일 때어 올려놓자 한입씩 물어뜯으려는데 굳은 찰떡이 떨어지질 않아 박새들은 아수라실갱이장을 편다.

먹일 주는 나 같은 산님이 있기에 놈들은 등산객이 쉬는 곳엔 어김없이 나타난다. 결코 잘한 짓이 아님인데 설한풍 속에 마주한 굶주린 놈들과의 교열(交悅)의 맛도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라. 놈들과 한 참을 노느라 어설픈 점심을 즐겼다.

다시 수종사마당에 섰다. 찻집 삼정헌(三鼎軒)이 문을 열었던지 토마루에 등산화가 어수선하다.

11시 이후에 찾는 길손에게 삼정헌은 유명한 녹차를 공짜 보시한다.  차를 마시며 내려다보는 두물머리 풍경은 선현들의 심취에 닿게 할 수 있으렷다.

수종사는 운길산 명치께 걸터앉아 두 물이 몸을 섞는 모퉁이를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다. 천하의 명당이다.

이덕형(1561∼1613)과 정약용(1762∼1836)이 운길산 자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풍진 세월 겪고서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수종사에서 늘그막을 보냈다. 수종사는 그 두 위인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터이다.

특히 1602년 영의정에 올랐던 한음선생(42세)은 1613년 영창대군 처형과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자 삼사에서 그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광해군은 그의 관직을 삭탈하였고 용진(龍津, 현재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일대)으로 돌아와 병사하였으며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나는 올 때와는 반대편으로 한음선생의 별서(別墅, 별장)터가 있는 송촌리 사제마을을 찾았다. 앞쪽은 북한강이 흐르고 뒤쪽은 운길산이 감싼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로 자연 풍광이 빼어났다.

선생이 45세 때 부친을 봉양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곳 사제(莎堤)마을에 별서인 ‘대아당’을 짓고 벗들과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는 고터에 시고목(屍古木) 두 그루가 객을 맞아준다.

45번 국도와 달리는 북한강 일대와 두물머리는 아침마다 물안개로 멋진 수묵화를 연출한다는데 빙하의 강은 칼바람에 바짝 주눅들어있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단골이란 데 말이다.

거대한 유리벽의 역사에 언 몸뚱일 들이민 시각은 오후 3시40분 이였다.

2013. 0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