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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천지에서의 코러스 (백두산)

★ 천지에서의 코러스 (백두산)

어제(5/30) 우리 일행(애향회원 21명)은 Am9:50 서울발 KAL편으로 심양에 도착, 시내 관광 후 다시 CJ편으로 연길에 도착하여 대우호텔에 피곤한 여정을 풀었다.호텔은 대우그룹에서 지어 직영한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이어선지 깔끔해 보였다. 모닝콜 벨소리에 잠을 깨어 조식을 마치고 Am7:00 관광버스에 탑승하여 대망의 백두산 여정에 올랐다. 현지 가이드 정 군은 조선족 3세여서일까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였고, 유머와 위트도 제법이어서 우리일행의 긴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줄 것 같았다.

백두산 가는 길은 애초부터 벌목한 원목수송도로로 거의 비포장이었기에, 어쩌다 지나치는 정기노선 미니버스나 택시 그리고 원목수송트럭이 일구는 토네이도 같은 먼지구름 속을 달리다보면 짜증일 수만은 아닌 또 다른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고 있음 이였다. 마치 40여 년 전 내 어릴 때 고향의 신작로를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트럭을 다시 보는 타임머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들판들은 헝겊조각으로 누더기 옷 만들 듯 오밀조밀하게 갈라놓은 논두렁과 게딱지같은 논베미들, 써가레를 끄는 황소, 농부와 아낙네들의 손 모심기하는 풍경이 5월의 햇살 속에서 크로즈업 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수지나 정돈 된 관계수로가 없음인데도 인근을 흐르는 송강(松江)의 풍부한 수량으로 하여 넓은 들판은 청정한 물로 충분히 해갈시켜 주고 있었으니 그 또한 옛 우리의 농촌 이였다. 1m도 안될 자잘한 막대기를 역어 둘러친 삭은 나무울타리 안의 납작 엎드린 촌락은 허술하기 짝 없음인데, 도둑맞을 걱정일랑 없다니 고즈넉한 평온이 부럽기까지 하다. 가이드 왈, “도둑맞을 물건이 없어 도둑이 없다”는 멘트에 우린 다시 허를 찌르는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지만-. 허나 잘 정리된 사과배 단지의 광활함과 그것의 분할 경작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물들어가는 사회주의 국가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게 아닐는지. 지금 중국의 농촌도 등소평 주석의 실용주의 노선화의 영향 아래 국가로부터 토지를 임대받아 30년간 경작하면서, 일정분의 공출(세금)을 제한 잉여분을 소득으로 인정함으로써 생산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음 이였다. 발전이 멈춰 선 촌락 길가에는 소 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든가 오리 몇 마리와 닭들이 사람들과 어울려 도로를 무단 점령 내지 횡단하여도, 운전기사는 별 군소리 없이 느긋하게 기다리다 어슬렁 비껴가는 여유는 우리들이 익히 들은 ‘만만디’의 생활 자세인가.

길 가장자리에 지천으로 핀 민들레는 5월의 햇빛에 더욱 샛노랗게 웃으면서 우리를 환영하는 길동무였으며, 미루나무와 수양버들 터널을 달리기를 5시간 여- 버스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의 현장을 넘어 안도현 이도백화점 앞마당에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채 멈추었다. 오금이 저린 몸뚱이를 일으켜 고려식당에 기어들어 풍성하고 풋풋한 채소가 깃든 한식으로 허기진 뱃속을 달랬다. 미상불 백두산 여정 가운데 잊을 수 없을 백미 하나는 임시화장실과 상품을 파는 가게와 상인들의 턱없는 흥정이라 할 것이다.가게라야 길가에 널빤지 오두막을 세워놓고 좌판위엔 1차 농산물이 주류지만, 부르는 값도 들쭉날쭉이라 끈질긴 에누리를 해도 제값(?)에 흥정이 됐지 반신반의하게 된다. 더욱 가관은 옹색할 데로 옹색한 임시화장실(?) 이였다. 길 가장자리에 판자로 대충 사면을 가리기만 한 변소는 급경사진 바닥을 비닐로 덮어 씌웠고, 배설물은 비닐천에서 미끄럼을 타고 저 아래 계곡의 흐르는 물에 휩쓸려 가는 천연 수세식 이였다. 좀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용변한 배설물이 데굴데굴 굴러 한참 아래 청정수에 떠내려가는 자연친화적(?)인 화장실을 감상하다보면 카타르시tm도 별난 맛이 된다.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그곳의 풍정은 백두산행 길목이 아닌 어디에서 맞딱드리게 되겠는가? 참깨, 버섯류, 인삼, 콩류, 수석들이 주류를 이루는 상품들 속에서 우리 일행(여자)들의 별난 구매욕 땜에 참깨가 인기상품 이였고. 해서 여행이 끝날 무렵엔 모두가 어지간히 많은 량을 구매하였기로 우리는 흡사 참깨구매사절단이 된 행색 이였다.

점심 후 2시간여 백두산길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왜소함과 동시에 몽매함이 빚은 상체기를 통감케 하고 있었다. 자작, 전, 삼나무군락들과 훤칠한 홍송, 그림 같은 미인송들이 하늘을 향해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고 있는 원시림 속을 차량들은 먼지와 소음을 토하면서 태초의 적요를 깨우고 신음케 하고 있었다.

수령이 다하여 쓰러진 무수란 시목(屍木)들은 이끼를 수의처럼 걸치고, 음습한 그늘은 습기에 녹아들어 태고를 잉태하고 있으며, 두터운 부엽토는 잔설들을 흰 누더기 이불삼아 누구의 손길도 허용치 않는 처녀림을 만들고 있었다.

인간의 무분별한 이기심이 장대한 장백산맥의 품속을 헤집고 신작로를 만들어 원목과 부석(浮石:가벼운 회색빛 화산석으로써 분쇄하여 벽돌을 만듬)을 가득 실은 트럭이 먼지와 굉음으로 위대한 자연을 멍들게 하고 있었다. 해발2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 들어서자 아직껏 겨울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스레나무 군락들은 그 하얀 피부를 5월의 햇빛에 빛나는 비늘무늬로 절묘한 춤사위를 벌이고 있질 않는가. 이윽고 장백산 문[버스종점]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짚차에 옮겨 타 백두산 천지를 향해 장백고로를 30여분 달려야 한다나.



군무를 이룬 사스레나무는 점점 앉은뱅이가 되어 철 잊은 흰 적설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마지막 5월 햇살에 녹은 눈들은 이끼 속을 재잘거리면서 흘러 태고의 자장가인 듯 취하기를 10여분, 수목생존의 한계선이 발아래 펼쳐지고 있지를 않는가. 이젠 누리는 온통 흑갈색의 산등성이와 구릉을 메워 빙하를 이룬 설경만이 구름 몇 점 기웃거리는 파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언제부터일까.

화산재 위를 덮은 이름모를 이끼와 앙상한 풀들 그리고 푸름을 잃지 않은 만병초를 휘감아 몰아치는 세찬 바람결이 우리의 천지입문을 거부하려는 듯 포효하며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장백고로 중간쯤에서 눈사태로 인해 더 이상 전진을 포기한 짚차를 버리고 보행으로 한여 시간, 천지를 향한 길목은 바람과 구름과 햇살과 눈만이 어우러진 장엄한 스테이지가 바로 천지의 목덜미였다. 나는 미친 듯이 그의 목덜미를 잡고 미끄러지면서 천지 속에 풍덩 빠져버리고 싶은 욕망으로 기어오르고 또 기어올랐다.

아~! 천지는 거기 그렇게 있었다. 그 신비감을 몽땅 드러낼 순 없다는 듯이 운무를 휘감고 이따금씩 검푸른 얼굴을 살짝 보여줄 뿐 이였다. 암회색 16봉우리들을 병풍으로 삼은 천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얼음 빗살무늬만을 햇살에 묻혀 보이고는 아직도 깊은 동면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을, 한참을 오두방정을 떨어도 천지는 내색도 하지를 않았다. 말 없는 천지여! 허나 어쩌겠나? 오히려 미안하다. 동면중인걸-.그만큼이라도 보여 준 은전에 감사해야 함이다. 감히 단 한 번의 길손으로 당신을 다 뵐 수 있다고 자만하는 자는 무뢰한이기 십상이라고 여느 누구나 말하고 있더이다.

민족의 영산! 마음의 고향 천지여~!

그대가 쪽빛 하늘을 담아 푸른 물결로 춤을 추며 나를 반길 때 나는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부르기 위해서도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 여기 내 강토가 아닌(장백봉은 2739m로 중국령이다) 우리 땅 징군봉(북한쪽 2774m)에서 그대 다시 마주하리라. 시인 고은은 절규한다.


모든 산들은 저 아래에 두고



몇 억만년 지나도록

아직껏 이것은 산이 아니었다


오 너 백두산

그토록 오래된 나날이었건만

새로이

네 열여섯 봉우리 펼쳐라-


가까스로 날아가 버릴 몸뚱아리 버티고 선

내 불쌍한 발밑조차

보이지 않아 캄캄하지만

수많은 어제였던 오늘이 있고

내일이어야 할 오늘 이었다


활짝 펼쳐라

여기 억만년 세월의 가슴 있다면

그 가슴 삼아

열여섯 봉우리

네 이름을 부른다


백두산 만세! 대한민국 만세! 우리는 고래고래 외쳤다. 잠든 천지를 깨우기보다는 얼어붙은 북한 쪽을 향한 핏빛 절규였다. 천지를 뒤로하고 화산재 자갈등걸을 미끄러져 내려와 고산공로를 따라 회귀하면서 나는 이끼와 만병초가 양탄자처럼 깔린 고산분지를 답사하고 있었다. 고산의 냉혹한 기후에 생존하기 위해 만병초를 비롯한 식물들은 지표에 바짝 엎드려 그네들끼리 엉키고 설켜 척박한 풍토를 점령해 가고 있었다.

고작 20~30Cm밖에 안되는 줄기와는 달리 땅속의 뿌리는 몇 십m나 뻗은 생존의 지혜를 그들은 수천 년의 세월을 통하여 터득한 것이리라. 땅딸막한 사스레나무들이 수목 한계선 밑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악화림(岳樺林)을 이루어 또 하나의 별천지를 펼치고 있었다. 우리는 백산 온천지대에 차를 세우고 장백폭포(비룡폭포)로 발길을 재촉했다.

온천지대는 백두산이 활화산일 때 용암이 흐르면서 형성된 것인지, 또는 지반침식으로 생긴 대협곡이었는지 가늠할 순 없었지만, 좌우로 솟아있는 수백m의 가파른 암갈색 바위산의 위용은 나란 존재의 미미함을 새삼 절감케 하고 있었다.

관광타운을 조성키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그곳 인부 중 한 분은 부안이 고향이라고 해서 반색하며 으스러지게 손목을 잡고 이국에서 조우하는 뜨거운 동포애를 나누기도 했다. 눈 녹은 물들이 도로를 가로질러 저 아래 송화강 급류에 휩쓸리며 토하는 물거품과 불협화음 속을 거슬러 올라 장백폭포를 찾았다.

관촌(冠村)이라는 휴게소엔 지표를 뚫고 끓어오르는 온천수가 군데군데 솟구치고, 그 온천수가 흐르는 골짜기는 장구한 세월만큼 황갈색으로 물들어 신비한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얀 적설 속에서 온천수가 뿜어내는 수증기는 햇빛을 반사하여 자연이 빚는 오묘함이랄까 신비감 자체였고, 멀리 새까만 부석산의 준령들은 파수꾼처럼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 유황온천은 섭씨82도를 유지한다는데 근래엔 수온이 약간씩 상승하고 있어 지하용암이 휴면기에서 벗어나 다시 분출하는 대폭발이 올 줄도 모른다니 지구의 변화무쌍함과 신비스럼에 경외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다.온천수에 계란을 삶아먹는 이색체험도 별난 것 이였지만, 피부병에 좋다는 유황온천수에 목욕할 시간이 없어 아쉬움만 더했다.

99. 0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