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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기일

기일(忌日;음력 정월 열여드레))

모처럼 찬 알갱이입자를 헤집고 겨울햇살이 대운동장 시멘트계단을 사선으로 내리꽂고 있었다. 지금 막 네 바퀴째 운동장트랙을 걸은 세 누나들께서 숨이 차는 것 같아 나는 그 계단의 햇살 속으로 인도를 했다.

여섯째 누나와 여덟, 아홉째 누나가 차례로 계단에 무거운 몸을 부리고 파아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을 깡그리 안으려는 듯 심호흡을 하신다.

세분의 뒷모습은 겨울햇살만큼이나 쇠잔해 뵌다.

우리 사 남매는 과일과 떡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산보를 나가자고 의기충천 하여

W대 캠퍼스를 찾아들어 한 시간째 산보를 한 셈이다.

운동장 구석구석 음지엔 그제 밤에 내려 쌓였던 적설이 햇볕과 시간의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난 하얀 눈 편을 들고 싶었다.

추울망정 시간이 더디 가길 바라고 싶은 거였다. 어쩜 누나들도 그런 생각을 하시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년엔 우리 사 남매 뿐이네요. 누나들 건강하세요. 명년, 내명년에도 계속 이렇게라도 뵙게요.”

세분들은 어제 내 집엘 오셨다. 애초에 오시겠다던 다섯째, 일곱째 누나는 추워진 날씨와 많은 적설량 땜에 포기 하신다고 전갈을 해 왔었다.

두 분은 벌써 이태 째 못 오신 셈이고 한 분 생존 해 계신 서울매형(일곱째)께서도 건강이 안 좋아 못 오신지 몇 해째다.

어제가 선친기일(음력 정월 열여드레)인데 어머님까지 합제(合祭)로 모시고 있는 우리집의 유일무이한 기념일인 것이다.

나에겐 누나가 아홉인지라 자연 매형님도 아홉 분이였지만 매형 여덟 분은 이미 작고하시고 누나들께서도 셋째와 넷째는 돌아가셔 이젠 일곱 분만 생존해 계신다.

맏이 누나 연세가 아흔다섯 살이고 막내누나와 나의 터울도 아홉 해나 되다보니 누나들 이기보단 어머니뻘에 가깝다. 그런 누나들께서 지금도 노인이 된 나를 어린애인양 깍듯이 애지중지 하신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누나들께서 부모님제삿날에 한두 분씩 자리를 비우시니 씁쓸함과 허망함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어제 아침만 해도 그랬다. 갑작스레 내린 많은 적설량으로 걱정이 돼 나는 막내누나께 전화를 넣었더니 광주(다섯째)누나는 그제 눈길에 낙상하셨고, 서울(일곱째)누나와 과천(여덟째)누나는 춥고 눈땜에 못 오신다는 연락이 왔다는 거였다.

그래 아쉼을 삼키고 있었는데 늦은오후에 과천누나께서 오셨다. 날씨가 풀리는 것 같아 집에 그냥 있기가 좀이 쑤셔 늦게 나섰다는 거였다. 자식들에게 기일이란 참석치 않곤 죄짓는 것 같아 좌불안석이 되는 날인 것이다.

제삿날이란 건 선고(先考)께서 후예들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후예들-자식들이 제삿날에 모여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고 혈육의 정을 돈독하게 하며 결속의 끄나풀을 질기게 다듬으라는 축복의 날 말이다.

그 혈속의 끄나풀을 질기게 기름칠하는 날에 정작 나의 자식들이 바쁘단 핑계로 불참하곤 하는 현실을 묵인하는 내 스스로를 자괴한다.

이러다간 기일이 당대로 끝나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만 해선 안 됨을 자성한다.

명년부턴 세 딸들도 참례시켜 누나들의 빈자리를 메꿔야 하겠다.

누나들 건강하세요. 명년에도 운동장트랙 어김없이 돌게요.

2012.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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