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가장 걷기 좋은 철쭉길(초암산)

★ 가장 걷기 좋은 철쭉길 (초암산) ★


호남고속도 주암 나들목에서 18번 국도를 달리다 845번 지방도로 들어서니 안개비 잔뜩 머금은 회색구름은 연초록 봄을 싸안고 풀 줄을 모르고 있다. 보성군 검백면 석호리 들머리에 내린 우리에게 안개비는 부슬부슬 세례 욕을 시킬 모양이다. 얼마나 감미로운 빗발인가!

허나 간사한 난 그 감로수가 행여 나의 살갗을 문드러지게라도 할까 싶어 판초우의를 꺼내 내 몸뚱이를 달달 말았다. 비닐로 칭칭 싼 나는 산뜻하게 세수하여 풋풋한 초암산을 기어든다. 반시간쯤 산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으니 몸뚱이가 훈기로 멱을 감는다. 비닐 속에서 멱 감기나 부슬비에 멱 감기나 멱은 멱인데 나는 멍청하게 비닐을 감고 찜질을 한 셈 이였다.

판초를 벗었다. 그렇게 상쾌하여 날듯하다. 미련하면 고생도 어쩔 수가 없음이다. 하나 위안은 나 같은 젬병이 좀 많다는 걸로 위무했다. 그들도 하나 둘씩 우의를 벗고 있다. 헌데 멍청하다 못해 잔인한 사람들의 고문으로 심히 앓고 있는 나무들을 보며 우리들이 때론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닫게 하고 있었다.


밧줄로 가이드라인을 쳤다가 철거를 했는지 나무를 꽁꽁 동여맨 밧줄은 풀지를 않고 잘라내서 나무는 아랫도리를 졸린 채여서 밧줄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억지 장구통이 되 있는 거였다. 그렇게 졸린 나문 초암산정 밑까지 등산로 양편에 수없이 이어지고 있어 그들을 부끄러웠다. 초암산 지킴이의 세심한 나무사랑이 아쉽다.

잔인하고 흉측한 모습 보여주러 철쭉제를 개최하는 넋나간 검백면민들은 아닐테다.

한 시간을 오르니 초암산정은 연초록 옷에 빨간 물감을 풀어 헤치고 우릴 맞는다. 자연은 우리의 허물도 그렇게 감싸고 있는 거였다.하지만 그 피빛은동여맨 나무들의 혈토인지도 모른다. 핏빛 선혈은 끝없이 산릉을 매웠다. 낮게 드리운 회색구름아래 핏빛 철쭉은 바다를 이루고 한껏 물기 젖어 우리의 맘을 밝게만 하지는 않고 있었다.

철쭉은 언제부터 이곳에 모둠살이를 하게 됐을까? 모듬살이가 현명한 생존전략이란 것을 사람 아닌 식물이 어떻게 알았을까? 철쭉도 한군데 모여 일제히 꽃을 피워야 벌·나비를 유혹하기 수월하다는 걸 터득했으리라. 충매(蟲媒)꾼이 많이 와 줘야 번식하기 쉽고, 유혹의 미소작전을 서로가 경쟁타보니 꽃도 더 화려해지고 향기도 더 짙어지는 걸 거다.


무엄하게 한 송이를 꺾었다. 총각수술 열 개를 보디가드처럼 거느린 공주는 입술에 진한 검자주 루즈를 잔뜩 묻히고 튀어나왔다. 빨간 꽃잎 중 윗면엔 어김없이 검은 반점을 십수개씩 찍어 놨다. 맨 얼굴보단 점 몇 개가 있는 게 더 매력적이란 걸 그들도 알고 있음이라. 아니 어쩌면 여성들이 볼에 점 한 두개를 그리는 것도 꽃한테서 배웠을지 모르겠다.

서구여성의 매력적인 얼굴은 맨 얼굴이 아닌 몇 개의 주근깨가 있어야 한다지 않던가!

천 몇 백 년 전, 신라 성덕왕 때의 수로부인(水路夫人)도 철쭉의 고혹적인 미소에 이어 매력까지도 알아냈을까? 그녀가 절세의 미녀가 됨은 철쭉의 비밀을 알고 체화(體化)시킨 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어떤 노인은 그녀를 위해 철쭉을 바치며 “紫布岩乎 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遺 吾肹不喩摲伊賜等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자줏빛 바위갓에 잡은 손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러이 하려든 저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고 헌화가(獻花歌)를 불렀으니 말이다.


철쭉바다 속 길을 따라 정오쯤 철쭉봉에 닿자 부슬비가 굵고 세차진다. 또 판초를 걸쳤다. 밀레(shop-millet)장님이 김선생님과 나를 불러 피바다를 지킴이 한 거석 옆에 세우곤 빗발 사이로 사진기 속에 가두느라 고심한다. 점심도 포기한 채 철쭉바다 길을 잰걸음 하기를 또 반시간, 광대코재까지 내빼니까 빗발이 거짓처럼 갰다.

촉촉한 죽은 갈대위에 점심자리를 깔았다. 김선생, 회장, 문여사, 수피아님페밀리를 비롯한 지긋한 산님들 일행 속에 나도 끼어들었다. 빨간 철쭉의 바다 속에서 드는 식사는 산님들만이 갖는 특식일 게다. 수피아님을 동행함도 오늘의 기쁨이라.

님은 방장산 숲길에서 내게 대뜸 “오늘의 산행을 어떻게 풀어 쓸지가 자못 궁금타.”고 추임새를 넣곤 있었다. 그 소리가 싫진 안했지만 결코 맘 가볍다는 생각도 들지가 안했다. 남이재를 가는 내리막길도 여간 으쓱하다. 주월산(558m)을 오르는 협곡의 철쭉은 연초록이 핏빛을 앗았다. 신록이 무르익고 있었다.


시인 두보(杜甫)는 “꽃잎 한 조각 떨어지면 봄빛이 사라진다.(一片花飛滅却春)”고 읊었는데, 여름이 스멀스멀 신록 위에서 졸고 있다. 주월산길 2km는 연초록바닷 길이였다. 물밴 숲길은 스펀지같이 볼륨 좋고 부드러운데다 그늘사초풀이 곱게머리를 빗고 늘어서서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다.

진종일 걷고싶은 산책로에서이따금 나를 붙잡은 놈은 평소엔 안중에도 없던 떡갈나무였다. 떡갈나무가 아기녹두빛깔의 움을 움츠리고 연녹색 수술을 꽤 새싹 위에 면류관인양 쓰고 있다. 수술이 머금은 물기에 햇빛이 닿아 오팔석처럼 영롱하고 신비한 빛을 발한다. 떡갈나무 생애에 오늘처럼 신묘한 날은 없을 것 같다.

자연은 비 오면 오는 대로, 개면 갠 대로의 그 속에 신령하고 아름다운 섭리를 표출한다. 그 절묘한 신비를 산님이 아니곤 훔칠 수가 없으리라. 떡갈나무에 흡씬 빠져들다 방장산을 향한다. 왼편엔 깊숙이 파고들어온 남해바다를 막아 방조제를 만들어 드넓은 그린 필드를 만들었고 득량만은 들녘의 새싹들이 내뿜는 숨결로 자욱한 안무에 젖었다.

여긴 게을러터진 철쭉 몇 송이가 어쩌다 웃고 있다. 그 놈을 배경으로 득량만을 훔치려고 디카를 몇 번이나 꺼냈다. 한 땀이나 거뒀는지 모르겠다.


숲 산책길엔 신록 이파리 사이를 대각선으로 뚫고 들어온 햇살이 뉘엿거리며 춘정(春情)을 핥고 있다. 문여사와 수피안 봄 사냥하느라 시간을 잊고 있다. 뒤 따르는 노신사분이 사냥한 취를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 향기에 취한 것 같아 심사가 꼬였다(?). 나도 취나물 보따리를 매고 향에 찌들어 보고싶었다. 근데 냉정하게 거절을 한다. 신뢰감이 돋질 않는단다. 그도 그럴 것은 오늘이 첫 대면 아니면 두 번짼데 취나물 빼돌리면 말짱 헛농사 아닌가 말이다.

요는 자주 찾아[산행] 대면하고 신뢰도 쌓아야 한다는 투여서 나도 그들 눈에 들려고 봄 사냥에 끼어들었다. 그 사냥이란 게 일념 찾는 행선(行禪)일 것이다.

방장산정(536m)에서 맞는 오후 3시의 하늘은 너무나 청명하다. 아기연녹색의 산야는 부신 햇살을 포식하느라 금방 터질 것만 같다.


장장 14km남짓의 초암산행길은 비 오는 날의 풋풋함이 아니더라도 지명도가 아직 처녀인지라 난장(亂場)이 아니어서 좋았다. 그래서 빡세다는 느낌을 갖질 않음인가!

4월에 이어 두 번짼데 만수 산우님들이 살갑게 느껴짐은 동행한 분들과 총무님, 장후배님들의 넓은 품 땜이려니~.

초암산도 처녀일 적이 좋은 시절임을 몇 년 후엔 절감하리라.

09. 05.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