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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호구보고 호구되는 남해행

★ 호구 보고 호구 되는 깨소금 맛의 남해 행 ★


- 어젠(09.05.16) 진종일 단비가 내렸다. -

10번 고속국도 하동 나들목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남해대교를 건너뛰면 옥색바다와 숨바꼭질을 하다 질펀한 마늘바다에 빠져든다. 십여 분을 햇마늘 밭에 눈길을 뺏기다보면 평현리 외금마을에 닿는데 여기서 입산하여 호구를 잡으려 들었다.

까만색의 부엽토는 습기 물씬 배어 미끄럽고 메케한 냄새까지 뿜어 숲 속 가득한 향은 묘한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그 향을 미풍이 일렁이며 나의 폐를 후비면서 자연의그윽함에 빠져들게 한다.

집 나설 때의 찌뿌대한 잿빛구름을 거둔 파란 하늘은 신록사이로 살짝살짝 밝게 웃고 있다. 완만한 경사로 숲길은 이따금 옥색 진주만을 한 컷씩 선보이고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동행하는 햇살 팀(평화,개나리,겨울바다,홍길동)과의 입담으로 신바람을 피우는데, 그 바람에 날개를 하나 더 달개 한 것은 정아님의 인사였다.


카페에서, 특히 ‘산·친’이란 카페에서 나를 접했다 해서 나는 발길을 멈칫했다. 나를 어떻게 알아보고 아는 채를 함도 그렇다지만, ‘산·친’을 들락거리는 산님들이 걸출한 입담께나 뱉는 수준급일가를 이루는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 카페를 여태 겻 눈질만 하며 얼른 주둥이를 내밀었다 오므리는 나로썬 의외의 일격을 당한 기분이 들었던 땜이다. 가보고 싶었던 카페의 정아님이 의외의 곳에서 인사를 함에 놀랐다. 동시에 정아님의 언니, 소나무, 마담 `영광(설악 공룡사냥 때 대면했다는 데 몰라 봐 미안했다)에 달봉님까지를 넘나들며 주둥이를 나불대다보니 괴음산(605m)정을 지나 한 시간을 즐기다 송동산(617m)이 발아래에 깔린다. 남해 섬은 허리를 세 토막으로 졸라매 구부리고 바다를 가둬 진주만을 만들었다. 아니다. 바다가 뭍을 파먹고 있는지 뭍이 바다를 밀쳐내고 있는지는 모르나 그 거친 숨결로 진주만은 엷은 해무를 쓰고 푸른 진주의 만을 만들었다.


섬산행의 맛이 얼마나 감칠맛 나는지를, 일테면 올망졸망한 섬들이 옥색물감을 있는대로 짜내어 바다에 풀어놓고, 보이지도 않는 수평선 끝에서 하늘소식을 안고 온 파도는 그 섬에 소식을 전하느라 개거뿜까지 토하고 있는, 그들의 시원(始原)의 사랑싸움이 질리지도 않는 그 은근함 말이다.

우린 그들의 애무를, 사랑을, 멈출 줄 모르는 작업(?)을 목도하며 한호하고 흠모하려 섬산행에 미치는지도 모른다. 거기다 통통배가 방귀를 뀌며 창해에 흰 꼬리를 남기고 궹이 갈매기가 그 위에서 군무라도 칠 때면 그 한가롭고 넉넉함에 나의 마음도 한 없이 가난해진다.

그 가난해지는 행복을 맛보려 난 섬산행을 좋아한다.

달봉님이 빌려놓은 구릉터에 점심자릴 깔았다. 십여 명이 빙 두른 오찬장이 됐다. 수만큼 먹거리가 풍성했다. 복분자술에 백세주를 받치는 인삼·오징어회무침과 돼지머리고기, 김에서 상치, 토마토에서 밀감까지의 풍요에 난 술도 두어 잔 목구멍에 부어넣었겠다. 오후 1시를 넘겨 자릴 거뒀다. 달뜬 내 시야 속으로 호구산정이 수풀사이에 얼굴을 지척에서 숨기고 있다.


그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많은 바위를 모아다 바위산을 만들었는데 한사코 접근을 뿌리친다.

그가 원숭이(猿)던, 호랑이(虎)던 간에 뿔따구가 날대로 났다. 그를 해할 생각이 없는 우린대도 그는 사나운 바람을 일으켜 우릴 꼬꾸라뜨리고 있다. 애초에 호구 잡아들일 생각은 없었고 호구노릇이나 면했음 싶었는데 사람 좋은 달봉님과 홍길동님은 아예 호구대장이 돼 버렸다.

달봉님은 호구가 사납게 굴면 그의 뜻에 순응해, 산님들이 주문하는 데로 서고 앉고 박고 찍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수히 박으며 싱글대는 달봉님 뒤엔 홍길동님이 뒤치다꺼리 호구노릇을 하느라 열심이다. 두 분은 호구노릇 하기를 타고난 팔자인성 싶었다. 홍길동님은 맨 뒤에서 특히 천방지축 개나리(본인도 시한폭탄이라 했다)를 챙기느라 좋은 경관 보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암튼 사진 쟁이 달봉님이나 민중의 지팡인 홍길동님이나 직업도 호구노릇이어야 함이니 천직이란 생각이 든다. 그 두 분은 그 호구를 즐김이 천성인가 싶다. 호구를 아무나 즐길 수는 없다. 거긴 비움과 희생이란 절대적인 심지가 따라야 함이다. 자기를 삭히는 절제 말이다. 난 약아빠져 호구노릇은 근처에도 못갈 것 같아 입방아 찧는 호구 짓이라도 해야 할 참이다.


호구(虎丘)산 정상(619m), 바위 고수락엔 돌멩이를 쌓아 봉수대를 만들었고, 앞 쪽엔 앵강만을 만들어 깨끗한 쪽빛 바다에 삿갓섬이 그 뒤에 새끼섬을 거느리고 있다. 유배지로선 안성맞춤이라.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中. 1637~1692)이 말년을 그곳에 유배당하여사씨남정기를 쓰고 비명에 가시신을 초분에 안치한 쓸쓸함이 여기까지 묻어나는 듯하다. 난 그 외롬을, 서포선생의 곤한 고혼(孤魂)을 가두려 디카를 몇 번이나 꺼냈었다. 긴가민가하면서…….

호구산은 제법 길게 바위 뿔갈개를 뻗치고 바위산의 위용을 갖추었다. 남해가 자랑하고 보호할만한 위세당당함 이였다. 앵강만을 뒤로하고 진주만쪽 바위길을 내려온다. 다시 울창한 숲이 참으로 걷기 좋은 산책길을 만들었다. 더구나 그늘사초는 연둣빛물감으로 염색한 머리를 곱게 빗고 길섶에 나와 곤한 발부릴 위무한다. 다소 진정된 바람은 숲을 흔들고, 숲은 그들이 천상만태로 찢겨놓은 하늘을 더 잘게 부수면서 울고 있다. 따스한 햇볕은 숲을 달래려 어루만지다 나무의 몸부림에 놀라 떨어져 미아처럼 해매고 있다. 바람이 울고 숲이 흔들리자 햇살이 흔들리고 그림자가 요동을 치니 나도 흔들린다. 아까 마신 술기운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 리드미컬한 흔들림이 째지게 기분 좋다.

공동묘지를 벗어나 안골로 드니 방금 내려온 호구산정이 삼나무사이로 우뚝하다. 진한 향을 내뿜는 찔레꽃의 새싹을 꺾어 껍질을 벗겨 노스탤지어를 음미하다 개나리에게 추억 한 토막을 선물한다. 그러다 나는 마담·`영광의 추억을 얻어 나눠 씹었다. 그녀는 동료와 새 칡 순을 맛깔스럽게 씹고 있었던 것이다. 탐스런 칡 순을 꺾어 껍질을 벗겨 씹으니 당과 쌉싸래한 수액이 입안에 가득 찬다. 칡이 약용식물에 즙이 많으니 산님들껜 좋은 해갈식물에다 구강세척까지 하니 얼마나 요긴한 군것질인가! 더구나 숲에 무익한 칡덩굴을 제거하는 자연보호에 솔선하는 셈이니 산님들이여 칡 순을 사정없이 꺾어 씹으시라.

칡 순을 씹는다. 4시가 넘었다. 주차장엔 새 이리떼들이 칡 순이 아닌 음식을 씹고 있다. 칡순예찬을 해야 함인데 나도 입에 먼저 음식을 퍼 넣고 있었다.

난 호구노릇 하긴 싹수가 노오란 놈이라. 맘 비울 줄을 모르니 말이다. 호구되기 위해 호구산을 찾음은 여름 무더위에 와도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09. 0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