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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상록의 낙원 & 고산의 유토피아 (보길도)

★상록의 낙원과 고산 (보길도)★


<압개에 안개 것고 뒤뫼희 해 비친다

배떠라 배떠라

밤물은 거의 디고 낟물이 미러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고지 먼 비치 더옥 됴타> -고산,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에서-

am 10시. 나른한 봄잠에서 막 일어난 바다는 땅끝을 잡고 기지개를 펴려는데, 우리들 갈뫼버스까지 통째로 삼킨 배는 고요한 그를 올라타 미끄러지고 있다. 배가 개구쟁이처럼 푸른바다에 흰 줄을 그어대며 헐떡거리기를 반시간 남짓, 노화도는 흰 돌무덤으로 산을 만들어 선착장을 밟고선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들고 있다. 납석(蠟石)이였다. 건축자재에서 화장품원료까지의 다양하게 사용되는 원석을 분쇄한 집하장이라.

그 흰 돌덩이 사태를 뒤집어쓰지 않으려 버스는 뺑소니를 친다. 노화도 한 가운데 들판은 섬 같잖게 넓고 버스는 그 연초록들을 물살 가르듯 헤엄을 친다. 20분쯤 달리니 빨간 아취다리를 산뜻하게 앞세운 보길도가 옷고름을 풀고 초록 속살을 내보인다. 보길도의 속내는 녹색의 향연이다. 초록색 외의 크레파스는 쓸데가 없다.


초록의 보길섬을 감싸고 있는 푸른 바다는 간밤에 누가 장난질을 해댔을까? 장난이 아니다. 이건 상습범의 난도질이다. 푸른 얼굴에 칼질 당한 바단 선혈이 선지로 엉킨 채 곳곳의만이 촘촘히 할퀴었는데도 극히 평온하다. 섬사람들은 바다 따먹기 하느라 칼질을 저렇게 무수히 해도 되는 건가?

470여 년 전에도 이렇게 상처투성인 바다였담 고산(1587~1671)이 보길도에 눈길이나 줬겠는가?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고산은 여기다 유토피아를 만들어 외지인들을 불러 돈을 뿌리게 하고, 상처뿐인 지금의 바단 전복을 키워 섬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있다.

녹색의 장원인 보길섬은 그래서 더욱 풍요가 넘실댄다. 반시간을 눈 팔다보니 뵤족산이 뾰족하게 서서 우릴 가로막고 있다. 뵤족산은 앞산의 바위를 쪼아내어 길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문득 아까 노화도의 납석 채석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암튼 버스를 떼놓고 격자봉을 향해 산길에 들어선다.

예의 상록수림은 터널을 만들고 등산로는 최적의 산책길이라. 얼핏 봐도 상록수종은 죄다 모아 놓은 전시장 같고 낙엽수는 자연 명함도 못 내밀 처지가 된 거다. 간혹 수십·백년을 산 소사나무와 팽나무가 알찬 옹두리를 빚어 푸른 이끼 옷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있다. 이끼와 난종류도 헬 수가 없어 태곳적 분위기를 발산하는 녹음은 뽀래기재 오르는 길을 산뜻한 기분으로 즐기게 하고 있다.

반시간도 채 못 왔을 거다. ‘하늘새’가 새가슴 돼 숨차있다. 아픈 게 아니다. 바빠서 산을 멀리한 탓이라. 아무리 낮은 산도 산은 결코 호락호락하질 않다. 산을 가벼이 알면 코 다친다. 그와 ‘옛골’이 뜬금없이 따라나서겠다고(섬 나들이여서일 테지만) 했을 때 이미 짐작은 했지만 이건 아니다. 난 하늘새의 배낭을 짊어졌다. 섬의 녹음은 그를 안아 감싸느라 조심스럽다.

빽빽 울창한 상록이파리가 햇살을 부수느라 살랑거리다 이내 파란 하늘까지도 산산조각을 내고 있다.

조각난 파란 하늘이 부서진 햇살을 안고 숲 바닥에 떨어져 뒹굴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참으로 산보하기 좋은 초록장원의 터널길이라.

한 시간을 그렇게 즐기고 있는데 언제 세치기(?)를 했는지 숙녀 두 분이 ‘일공산악회’란 꼬리표를 달고 내 앞에서 S자로 숲길을 헤집고 있다. 뒤 따르던 난 또 망상에 풍선을 달아보려 시도를 한다.

“아주머니, 일공산악회의 ‘일공’은 무슨 뜻입니까?”

“저희도 처음 따라와서 잘 몰라요.” 난 어쩜 그걸 노렸는지도 모른다. 허나 음흉한 속내를 까발릴 순 없잖은가.

“뭘 어렵게 일공이라 했답니까? 쉽게 그냥 ‘십’이라고 하면 될 걸-.” 이라고 푼수 짓을 하자마자 일공 숙녀분 앞에서 선도를 하던 젊은 갈뫼사람들이

“맞아요, ‘십’이죠.”하며 박장대소를 하고 있다. 그들도 차마 된소리[쌍시옷]는 못한 채다. 이윽고 ‘일공’사람들이 모여 쉬는 장소엘 닿자 숙녀분 왈,

“일공이 무슨 뜻 이예요?”라고 동료들께 묻는다.

“일공이 일공이지 뭐요?” 심오할 거란 일공답잖게 투박한 맹물 답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아직도 일공은 ‘십’인 셈 이였다.

격자봉이 저 앞에 왔다. 줄곧 내 뒤를 따르던 갈뫼아줌니께서 오이 한 토막을 주면서

“배낭을 어째 두개나 메고 계세요?” 다분히 동정적이다.

“네, 집사람이 힘들어해서요.”

“어디 아프신가요?”

“아니요, 원래 그래요. 좀 못 됐죠.” 난 아주머니를 뒤돌아 쳐다본다.

“애초에 하나만 갖고 오시지?”

“그러게요, 제가 아침에 그리하자고 했거든요. 허지만 노상 그래요." 아주머닌 고개를 갸웃했다.

격자봉 코앞인데 집체만한 바위들이 모여 있고, 갈뫼인들이 마당바위에서 오찬장을 펼치고 있었다. 천상천하 망해의 요람에 선착한 햇살, 개나리, 홍길동, 오아시스, 덕-를 비롯한 미시들 댓 명이 식욕을 탐하다말고 나를 부른다. 엉거주춤한 내게, 내 뒤 아줌마 꽁무니를 이은 중년의 사내가 이제까지의 얘기를 죄다 들었다는 듯 하늘새를 가리키며 저분이 기냐고 묻고 있다. 하늘새가 유일하게 배낭이 없는데다 일행 중 앞에 있었던 터였다.

“예, 맞아요.” 내 대답에 중년 사내가 하늘새를 빤히 쳐다보며 “젊으시네. 몇 살이에요?”라며 물고 늘어지다 말고 이젠 나를 보곤 의미심장하게 “조으시겠어요?”라고 독설(?)을 쏘아댄다.

우리도 마당바위에 점심자릴 깔았다. 옛골이 준 도시락을 들고 먹으려는데 아까 아줌마 왈,

“도시락 보니까 부부가 맞긴 맞네요.”라고 그간의 궁금증을 일소시키는 거였다.

밥이 같음은 한솥밥일 테고 그건 곧 한식구란 뜻이다. 아줌마께선 수수께끼가 확 풀린 게다. 젊고 아픈 것 같지 않은 하늘샌 억울하게도 쬐끔은 못돼 먹은 여자로 보길도 마당바위에 낙인을 찍고 온 셈이다. (보길도에 간다는 나의 주둥이에 옛골과 하늘새가 같이 가자고 춤출 때 도시락은 옛골이 싸겠다고 했었다.)

격자봉, 수리봉을 밟고 큰길재에 닿으니 pm2시가 넘었다. 고산의 유적지가 있는 부용동골로 접어든다. 곡수당이 보수공사로 해서 황토먼지 날리며 옛 정취를 빼앗겼다. 가뭄이 아니면 호수에서 흐르는 물이 굽이치며 소리 내어 운치를 더 할 텐데 왠지 휑덩하다. 난 고산이 85세를 일기로 저 위에서 풍류를 잠재웠을 모습을 상상하며 건너편 산 중턱의 바위골에 안치한 동천석실을 향한다.

동천석실도 보수공사로 옛 멋을 훔칠 수가 없어 아쉽다. 다만 격자봉에서 광대봉을 잇는 산릉이 하늘을 가둬 부용동 골자기를 만들어 안온한 쉼터에서 그것들을 맘껏 완상했을 고산을 생각해 보았다. 바위위에 한 칸짜리 와가를 날아갈 듯이 안치고 다시 아래에 한 채를 안쳐 오르랑 내리랑 거리며 시상에 빠지고 독서에 파묻혔던 고산의 일탈을 유추해 보았다.

병자호란(1637년)이 없었으면, 인조가 남한산성을 내려와 평복을 입고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치욕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절 한 번에 땅바닥에 머리를 세 번 찧는, 세 번 절에 아홉 번의 이마 찧기)를 하지만 안했다면 고산이 보길도에 오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해보았다. 설사 그가 여길 왔어도 그의 재력이 뒷받침 되지 않았으면 여기에 그가 어떻게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가 있었겠는가?

세연정을 향한다. 그의 천국이라. 자연에 그의 기발한 머릴 녹여 인공미를 보태어 우리나라에 전무후무한 사설정원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정원인 담양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자연에 물 흐르듯 정원을 꾸몄다면 이곳 세연정은 자연에 인공이란 호사의 극치를 더해 고산만이 해 낼 수 있는 빼어난 정원을 조성함이다.

판석보, 흑약암, 회수담, 비흥교, 사투암을 시간 없어 주마간산으로 훑는다. 차라리 여태껏 상상 속에 머문 세연정이 더 아름다울지 모르겠다. 눈여겨 볼 시간 없어 디카에 담는다. 버스가 아가리를 벌리고 부르릉거리고 나를 부르고 있잖은가!

<석양이 빗겨시니 그만하야 도라가쟈

돋 디여라 돋 디여라

안류(岸柳) 뎡하(汀花)는 고비고비 새롭고야

삼공(三公)을 불리소냐 마낫를 생각하랴>

-석양이 비추니 그만 돌아가자, 버스창 닫아라 버스창 닫아라, 세연정 굽이굽이가 새롭고, 고산이 부럽긴 하나 다음일을 생각하자-고 내 딴의 심사를 빗대어 보았다.


나는 뜬다. 나를 실은 버스가 뜬다. 예송리 바닷가로 가서 고산의 어부사시사의 해조음이라도 들어볼 희망으로 아쉬운 마음을 뜬다. 하지만 맘만 뜰뿐이다. 그곳으로샛길 빠져나온 갈뫼인 몇 사람을 태우곤 버스는 또 창닫아라, 창닫아라를 하면서 내빼기 시작했다. 예송리 모래사장은 송림사이로 힐끗힐끗 혀를 낼름거리며 나를 놀리고 있다.

“다 봐 버리면 미련이 안남아 담에 올 필요가 없잖아요!” 갈뫼장이 나를 달래(?)고 있었다.

라비아타와 그들 커플이 한 없이 부럽다. 언젠가 여름 그들 커플은 두 애를 대리고 와서 예송리모래밭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어부사시사 노랠 부르며 보냈단다. 그리곤 다음날 우암의 글씐바윌 찾아가서 애들 앞에서 씨부렁거리고(글자가 망가져 판독이 어렵다) 다시 세연정을 찾아 맘을 씻고 곡수정에서 자맥질까지 했을 테다.

그들의 멋진 낭만을 삶의 맛깔을 익히 엿보고 있는 나지만 오늘은 나비아타의 보길도 1박2일이 샘나서 자조감에 빠져든다. 그들 커플의 멋도 멋이지만 애들은 보길도의 역사와 아름다운 풍광과 자연을 얼마만큼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었겠는가! 애들에게 상세한 역사는 희미해져도 추억의 그림은 세월과 같이 더 아름다워지리라.

pm5시에 노화도를 뒤로 하고 반시간 뒤엔 땅끝에 닿아 땅거미 어슬렁거리는 거리의 어느 회관을 찾아들어 땅끝에서 잡은 생선회로 거나한 만찬파티에 빠졌다.

내 얼굴이 그렇게 빨개진 적은 없었다고 일행들이 비난인지 비아냥인지 추임새인지 한 말씩 뱉는데 헷갈린다. 기분 좋은 만큼 헷갈린다.

미련이 있어야 담을 생각하는 거다. 미흡은 내일을 위한 양분이기도 하다.

보길아! 다시 보자.

09. 0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