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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프리섹스의 요부 미실얘기


 

프리섹스의 요부 미실얘기

 

-고현정이 분한 미실-

미실의 아버지(미진부)는 법흥왕의 외손자로 진골이었고, 어머니(묘도)는 법흥왕의 후궁인 옥진의 딸 이였다.

옥진은 법흥왕께 색공하다 꿈에 칠색조가 날아와 가슴에 안는 꿈을 꾸자 왕에게 길몽을 꾸었으니 동침을 하자고 졸랐다.

왕은 칠색조면 필시 딸일 테니 남편(영실공)과 동침을 하라, 대신 아들을 낳으면 내 소생의 태자로 삼고 딸이면 후궁으로 삼겠다고고 언약했었다.

그래 낳은 애가 딸 이였고 이름이 묘도였다. 하여 법흥왕은 묘도를 후궁으로 맞는다.

묘도는 날씬한 미인 이였으나 엉덩이와 음문이 작아 거구인 법흥왕을 맞느라 여간 힘들어 했다.

묘도는 어느날 왕의 외손자(미진부 장군)와 눈이 맞아 임신을 하게 됐는데 왕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승하한다.

묘도와 미진부는 왕비(지소태후)의 허락으로 결혼한다.

진흥왕이 즉위하던 해 옥진(외할머니)은 칠색조가 날아와서 묘도의 가슴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게 되자 묘도부부에게 참으로 귀한 딸을 낳게 될 것이다라고 귀띔을 해준다.

그렇게 해서 낳은 딸이 미실(美室, 549~606) 이였다. 외할머니 옥진과 어머니 묘도는 미실에게 색공의 노하우를 전수하니 미색에 교태까지 겸비한 천하의 여자가 됨이라. 게다가 문장력까지 갖췄으니 6세기 신라상류사회를 프리섹스로 업그레이드시킨 전설적 요부였다.

 

                     -신라 때 미실의 머리스타일-

 

미실의 동생 미생(美生)도 천하미남이라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했고 따라서 아들만 100명을 두었는데, 후에 미실과도 통정을 한다.

진흥왕에겐 의붓동생 세종이 있었다. 진흥왕과 세종의 어머니는 지소태후다.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딸로 법흥왕의 동생과 결혼하여 진흥왕을 낳고, 또 신하 태종과 눈이 맞아 세종을 낳았다.

세종은 배필로 미실을 택하였는데 미실의 색사(色事)에 녹아나 정신이 혼미해진다하여 지소태후의 분노를 산 미실은 출궁 당하게 된다.

궁에서 쫓겨난 미실이(21)16세의 화랑 사다함을 만나(세종과 결혼하기 전 두 사람은 이미 연인관계였다) 애욕의 불꽃을 튀기는데, 가야국이 반란을 일으키자(561) 사다함은 난을 평정하러 간다.

전장을 향하는 사다함을 위해 미실은 풍랑가를 지어 바친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이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아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라고 이별을 노래했다.

 

그 노래 소리가 아직 귓가에 쟁쟁한데 그녀는 다시 세종한테 달려가 육체를 불태운다. 세종은 미실과 헤어지고 난후 보고 싶어 환장해 지소태후를 졸라 그녀를 다시 불러들인 거였다.

이때 전장에서 승리한 사다함이 귀가했는데 미실은 다시 입궁하여 세종과 붙어있었다.

사다함은 미실을 그리다 1주일 만에 상사병으로 죽는다. 그가 남긴 시가 한 수를 옮겨본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물렀나

파랑새야 파랑새야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 구름위로 가버리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나 말지 또 갈 것을 왜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고 마음상해 여위어 죽게 하는가.”

사다함의 미실을 향한 사랑은 일편단심이었지만 그녀는 프리섹스의 상대 일뿐이었다.

지 가랑이에 빠진 세종에게 미실은 옥문(玉門)을 닫고 애간장을 태운다. 정비(正妃)인 용명을 내치고 대신 자기를 정비로 삼으라는 거였다. 세종은 할 수 없이 용명을 차비로 강등시키고 미실을 정비로 삼은 후 옥문을 무시로 드나들며 살을 태울 수 있었다.

진흥왕은 동륜을 태자로 책봉하고(566) 왕비 사도왕후는 미실에게 동륜과 교합하여 득남하면 차기 왕후로 삼겠다.”고 꼬득였다.

색공실력을 여지없이 발휘한 미실은 동륜의 애를 임신하게 되는데 진흥왕까지도 색공을 하여 사랑을 나눈다.

미실이 딸을 낳자 진흥왕은 태자의 씨인 줄 모르고 애송공주라 칭하며 공주례(公主禮)까지 치렀다. 실로 미실의 천하였다.

6년 후, 부왕의 예쁜 후궁과 밀회를 즐기던 태자는 월담하다가 개에 물려 죽는다.

진상조사 결과 태자는 아버지의 후궁과 7번쯤 밀교를 했다니 부자간에 미실과 후궁을 번갈아 교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실은 태자의 동생인 금륜(후에 진지왕)과도 놀아났다가 다시 출궁 당하게 된다.

쫓겨난 미실은 본남편인 세종과 다시 합궁했고, 둘 사이에 하종을 낳았으며, 진흥왕과의 사이에서도 수종을 낳았는데 진흥왕은 출궁한 미실이 보고 싶어 환장하여 수종을 핑계로 미실은 다시 찾는다.

미실은 세종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진흥왕께 안기지만 왕은 얼마 후 승하한다.

금륜이 왕위에 오르니 진지왕이다. 어린 진지왕은 미실의 손안에서 어색(漁色;계집질)만 일삼다가 4년 만에 폐위되고, 동륜태자의 아들(백정)이 즉위하니 진평왕이라.

 

                -신라시대의 토우, 우측에 남녀가 통정하고 있다- 

미실은 13세의 진평왕에게 색사를 가르치며 색공까지 길들였으니 진흥왕-동륜태자-진지왕-진평왕에 이르는 왕가 3대를 색공한 천하의 여인이였다.

게다가 신라를 신국(神國)이라고 부르게 된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 4(세종, 사다함, 미생랑, 설화랑)을 가랑이 속에 넣고 맘대로 요절을 냈으니 그녀의 교태와 방중술의 경지는 신기(神技)였지 싶다.

왕께 섹스를 제공하는 전문여성집단인 대원신통의 수장이 된 미실은 미색과 교태와 방중술과 춤과 문장으로 신라왕실과 상류층을 쥐락펴락하며 프리섹스요람으로 만들었다.

16년간 진평왕을 색공으로 연마시키며 프리섹스를 꽃피우다 왕실을 떠나 영흥사에 머물게 되는데 이때 설원장이 미실은 따라와 둘 사이에 보종이 태어났다.

미실이 영흥사에서 죽자 보종은 미실의 책 700권을 필사하여 간직하고 초상을 걸어놓고 조석으로 절을 올렸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이상국씨가 미인별곡에 풀어쓴 걸 일부 요약 발췌하다.-

*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신라왕실의 문란한 난교를 임의로 삭제하고 기록했다.*

 2010. 01

 

                     -안압지에서 출톧된 목재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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