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센트럴역의 사랑의 약속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진실성과 정직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생겼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미인이라면, 나는 당신이 단지 그것 때문에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떨쳐 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는 내가 그냥 평범하게 생겼다면 난 당신이 단지 외롭고 대화상대가 필요하여 나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겠지요.

나는 그런 류의 사랑을 혐오합니다. 내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지 마세요. 당신이 뉴욕에 오면 언제든지 날 만나게 될 테고, 그때 당신은 결정을 내리면 되겠지요. 기억하세요. 우리 둘 다 거기서 끝을 낼지, 아니면 만남을 계속 이어갈지 선택은 자유라는 것을-.”

그랜드 센트럴 역사(Grand Central Terminal. 驛舍), 벤더필드 홀 중앙의 시계탑(사방에서 볼 수 있다)을 처다 보는 공군소위 존 블래포드는 쿵쿵거리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담배 한 개비를 물며, 사진을 보내달라는 자기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던 사연을 되씹어 보았다. 그녀는 서른 살이라 했다.

13개월 전 플로리다 군도서관에서 서머섿 모옴의 ‘인간의 굴레’를 대여 받기 전, 아니 그녀가 책갈피에 빼곡하게 독후감을 낙서해 놓지만 안 했어도, 그 독후감에 매료되지만 안 했어도, 그리고 장서표의 그녀를 수소문(전화번호부에서 알게 된 건 실로 운명적 이였다) 하여 주소를 알지 못했다면 오늘 멀리 플로리다에서 여기까지 오진 안했을 터였다.

지난 13개월 동안에 그와 그녀는 편지로 서로를 탐지했고, 마음을 나누다 이젠 서로의 삶에서 떨칠 수 없는 의지와 지향점이 되버린, 어쩜 그녀의 격려와 위안으로 해서 고된 군 생활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그는 오늘을 얼마나 오매불망 고대했는지 모른다.

하루에 600여 편의 열차가 발착하고 50여만 명이 이용하는 중앙 홀에서 그는 빛바랜 파란 가죽 표지의 ‘인간의 굴레’를 손에 꼭 쥐고 오직 하나, 가슴에 빨간 장미꽃을 꽂은 숙녀를 찾는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나는 유리(둘째 딸)를 가이드 세워 시내 관광을 하면서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꼭 찾아봐야 되는 까닭을 얘기 했었고, 유리는 공감하여 ‘사랑의 약속’속의 연인들의 행적을 같이 쫒자고 의기투합해 오늘 이곳을 찾게 됨 이였다.

2년 전에 읽었던 숄라밋 이쉬 키쇼르의 ‘사랑의 약속’은 나를 너무 감동시켰었고, 그래 뉴욕에 온 김에 필히 ‘약속의 장소’를 찾아 블래포드와 메이넬의 러브스토리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은 역사라기보다 중세의 바로크식 성당 같았다. 정문 위엔 날개 달린 머큐리가 우측에 미네르바(지성의 여신)를 왼쪽엔 헤라클래스를 끼고 곧장 비상이라도 하려는 듯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랜 이 역의 건설자인 벤더필드의 동상이 있었다.


1871년 42th st에 철도왕 벤더필드는 이 역사를 건축하였고, 공해문제로 인해 1913년 개축하여 지금에 이르게 됐는데, 철골조에 대리석을 덮씌워 장엄미를 풍기게 했으며 337평의 벤더필드 홀엔 자줏빛 대리석을 깔아 고급스런 격조미를, 사방의 대리석 계단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아취형 돔 천정엔 2500개의 별자리를 새겨 밤하늘을 수놓은 건축미는 역사라기보다는 성당이나 박물관이라 해야 할 것 같았다.

특히 정문 맞은 편 벽의 커다란 3개의 창문의 모자이크와 천정의 샹들리에는 더욱 더 그랬다.

25개의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인파 속에 장미꽃을 꽂은 숙녀를 쫓았을 블래포드의 눈을, 초조한 마음을 상상해 본다.

이윽고 저쪽에서 다가오는 연두색 원피스의 팔등신 미녀에 눈길을 뺏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그녀에게로 향했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속삭이며 지나치던 그녀에게 관심도 잠시, 그녀의 뒤에 나타난 빨간 장미를 꽂은 여인! 그녀가 나타남 이였다.

그가 그토록 보고파했던 그녀는 30살을 훨씬 넘겼을 40대의 중년 여인 이였다.

그는 불현듯 한 생각을 했다. 그것은 자기가 지금껏 소중하게 간직하고 키웠던 감정이 사랑이 아닐지 몰라도, 그것은 어쩜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고귀한 감정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냐?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소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다.

“저는 존 블래포드 소위입니다. 당신은 메이넬 양이겠지요?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되서 기쁩니다. 제가--제가 당신을 저녁식사에 초대해도 될까요?”

그는 손에 든 ‘인간의 굴레’를 40대 여성에게 건냈다. 서로를 확인하는 표시로 책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좀 망설이다 책을 받아 든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써 말문을 열었다.

“난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젊은이, 방금 내 앞에 지나간 연두색 옷 입은 처녀를 보았나요?

그 처녀가 나더러 옷깃에 이 장미꽃을 꽂고 있으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기를 당신이 나에게 같이 있기를 요청하면, 그녀가 길 건너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그렇게 말 해 달라고 했답니다. 젊은이,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 했으니 길 건너 레스토랑으로 그녀를 찾아가 보세요.”


유리와 난 역사를 나왔다. 그리고 길 건너편 레스토랑을 찾았으나 보이질 안했다.

혹시 다른 문을 통한 길 건너였을까 싶어 여기저기 찾아 헤맸지만 허탕 이였다. 정문 앞 길건너편에서 커브를 돌아 경양식과 티를 파는 스타벅스가 유일했다.

그들이 상견했던 레스토랑이 그간에 사라진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던 우린 스타벅스 안으로 들어서 그들 커플이 앉았을만한 자리를 찾아 커피와 빵 몇 개를 주문했다.

유리와 나는 그들의 뒷얘기를 유추해 보면서 ‘참한 사랑’의 이야기꽃으로 뉴욕의 한나절을 즐기고 있었다. 모든 길은 역에서 시작하여 역에서 끝난다. 해서 인간의 역사도 역에서 비롯하여 역에서 마감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뉴요커들의 사랑도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경유치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뉴욕의 심장이고 허파이기에 말이다.

블래포드와 메이넬의 사랑도 비로써 그곳에서 확인하고 시작함은 결코 우연이 아님이라.

그들, ‘사랑의 약속’을 믿기에 난 행복하였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 하여 사랑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유리에게도 그런 ‘사랑의 약속’이 빨리 와 주었음 하는 바램을 해 본다.

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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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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