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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센트럴 파크 & 메트로 폴리탄

센트럴 파크와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센트럴 파크는 미국의 얼굴이라고 해도 될 만큼 스케일이 크고, 자유와 질서가 조화를 이루며 다양성이 혼재한 가운데 정체성을 잃지 않는 미국적인 쉼터였다.

직사각형의 인조공원이기에 더욱 가능했을까? 우리가 휴식하면서 즐길 수 있는 시설들이 웬만큼은 다 구비된 완벽한(기능면에서도) 도심의 거대한 공원(843에이커)이기에 세계의 도시들이 공원을 조성할 때 견본이 된다고도 한다.

5월 첫 토요일, 주리.유리.성훈이를 대동한 나는 뉴요커래도 된 듯 센트럴파크를 찾았다.


공원입구에서부터 나는 우선 인종의 다양성과 그네들의 자유 분망함에 주눅 들다시피 했다.

보행자, 경보자, 달리는 사람들, 자전거 타는 사람, 인라이스케이터들이 잘 다듬어진 길들을 잘도 빠져나가고 있었고, 이곳저곳 운동장에선 각기 다른 운동을 하느라 간간히 고성이 바람에 실려 울창한 나무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그 나무란 게 수령이 몇 십 년 내지 백년을 넘긴 것들이어서 원시림 같았고, 작년 가을에 떨어진 도토리들이 지천으로 포도와 숲에 널려있었다. 그 왕도토리(엄청 컸다)가 아까워 나는 얘들에게 생뚱맞은 제안을 했었다.

‘이 도토리로 웰빙식품(묵. 칼국수 등)을 만들어 팔면 돈 벌겠다.’고-.

공원안의 도토리 채취를 허가받을 수 있고, 구멍가게나 포장마차라도 인근(공원을 낀 에비뉴 5번가는 고급주택가여서 땅값이 엄청 비싸다)에 낼 수 있다면 말이다.

아무튼 살판 난 놈은 청설모를 비롯한 야생동물과 조류, 이곳 청설모란 놈은 먹이 걱정이 없어서인지 덩치도 크고 살도 토실하게 쪄 날렵하지 않을뿐더러 세계인들과 공존함이 체질화되어 우리가 가까이 가도 냉큼 달아나질 않는다.

해서 철없는(?) 성훈이는 생포하겠다고 재킷을 벗어 덮치길 여러 번 시도 했으나 번번이 ‘날 잡아 봐라, 용용 죽겠지?’하며 힐끗힐끗 뒤돌아보며 요리저리 빠져 달아났다.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은 청설모뿐이 아니었다.

벤치위의 떨어질 줄을 모르는 커플하며, 대단한 웅변가인양 고래고래 고함치는 독야청청, 가슴에 닿는 수염과 난삽한 머리칼에 후줄근한 장옷를 치렁치렁 걸친 인도(?)의 수도승,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붙어 낄낄대고 있는 게이, 쫌만 더 따뜻했다면 홀랑 벗고 스트리킹이라도 할 반 나체족들, 넝마 같은 히피족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과시하겠다는 듯 활보하고 있었다.

못 볼 것을 본양, 기이한 세상에 입문한 난 어리벙한 눈길을 어디다 고정시켜야 할지를 몰라 내가 어쩜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의 정체성이 잘 조화되어 끈질기게 개척하고 추구해가는 프런티어 정신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기에, 각자의 개성을 중요시하는 사회의 단면이 센트럴파크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856년 조경건축가 페드릭 로 옴스테드(Predesick Law Omsted)와 칼버트 복스(Calvert Vonx)에 의해 시유지에 조성된 센트럴파크는 조깅, 산책, 승마, 자전거길, 놀이구장, 동물원, 아이스링크, 회전목마, 테니스장, 야구장, 농구장 등의 스포츠 시설물과 분수가 있는 호수까지 휴식에 필요한 모든 걸 완벽하게 갖췄다 할 것이다.

근래엔 오노 요코가 기부한 찬조금과 남편 죤 레논의 유품을 기증하여 만든 ‘죤 레논을 위한 평화공원’인 스트로 베리 필즈엔 세계 각국에서 기증한 식물들이 전시장을 이루고 있어 볼거리를 더 함이 그네들의 현대 예술에 대한 애착과 보전에 각별함을 엿보게 한다.

우린 공원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눈요기하다 이름모를 아마 야구팀의 야구경기를 구경할만한 잔디밭에 자리를 마련했다.

야구구경도 시들해지자 우리 나름의 게임(끝 말 잇기 등)을 하면서 한때를 즐겼다. 뉴요커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싼 교통비로 입장료 없는(미국의 공원은 대게 입장료가 없다) 이 완벽한 공원엘 찾아 결코 무료하지 않을 휴식을 맘껏 취할 수 있을 터여서 행복하지 않겠나!

스산한 겨울 어느 추운 날, 텅 빈 스케이트장에서 죽은 제니를 생각하는 올리버의 쓸쓸한 뒷모습에 흐르던 테마송 ‘Love story'의 애잔한 선율에 잠시 침잠한다.

1970년에 에릭시갈은 그의 소설 ’러브스토리‘를 손수 각색 영화화시켜 세계의 청춘남녀들을 울렸던 촬영현장이 센트럴파크였고 후에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의 마지막 헤어짐의 장소도 여기였다.

그런 즐거운 상념에 젖어 한 블록 걷다보면 동쪽에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세계 4대 박물관: 대영. 르부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이 있어 휴식하면서 세계의 문명사를 관찰하기 딱 좋아 난 정말 환장하게 그네들이 부러웠고 부러웠다.

Metropolitan Museum Of Art는 1870년에 문을 열었고, 전시품 중 이집트 미술품과 근세이후의 미술 조각 작품들이 압권이라지만 총 17개 부문으로 나눠 전시한 모든 갤러리들에 넋을 뺏길 뿐이다.

입장료도(성인20$. 학생10$) 정액 제를 꼭 고집하지는 않아서 유리가 성금 식으로 몇$을 지불하고(Recommended price라 괜찮다고 딸애는 말했다) 뱃지(미술관의 상징인 M을 새겼고 매일 색상이 바뀐다)를 받아와서 옷깃에 꽂고 입장했었다.

이집트의 룩소르 신전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이집트관은 스핑크스와 보물, 핱셒스트 여왕의 동상 앞에 서서 새삼 미국의 힘(자본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여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13~18세기의 유럽의 유명화가들-램 브란트, 할스, 반 아이크, 루벤스, 보티첼리, 벨라스케스, 라루트, 브뤼켈, 앙투안 와트, 뒤러, 엘 그레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고야, 로트랙 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되었다.

또한 19세기의 회화와 조각 - 다비드, 들라크라, 터너, 고야, 마네, 모네, 쿠르베, 르노아르, 고흐, 세잔느의 걸작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에 난 행복하였고, 피카소, 모딜리아니, 모리스 루이스, 워홈, 폴록이 자기의 혼을 주입한 20세기 작품들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첼망정 가슴 뿌듯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북쪽 건물 1~3층은 미국관 이였는데 그네들의 역사물인지라 방대함과 섬세함을 다 말할 수야 없겠다.

중국관과 일본관도 꽤 규모가 크고 내용도 알차서 그네들의 역사와 문명을 관람객들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는데 우리 한국관은 너무 작고 소장품도 초라했기에 속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자부하는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은 나라치곤 말이다.

몇 일간을 품 팔아 관람해야만 될 정도로 방대한 전시관 이였지만, 주마간산 식으로나마 일별한 감회는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두 딸들에게 고마웠고, 명작들 앞에 선 흥분과 감격은 오래도록 가슴에 살아있을 것이로되, 한 가지 떨떠름한 아쉬움은 어떻게든 부자나라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쩌다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행운아였다고 자위해 보지만, 뉴요커들, 아메리칸들은 맘만 먹으면 푼돈으로 세계 인류의 문명을 목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운이며 선택받은 복덩어리들인가!?

전시관 내 도처에서 카메라와 노트를 들고 현장학습 하는 초.중등생들을 목격했었는데 얼마나 부러웠던지 물끄러니 쳐다보다 한숨을 삼키곤 했었다.

우리가 조그마한 사진으로만 접했던 문명의 유물들을 그들은 어릴 적부터 저렇게 실물 앞에서 관찰하고 기록하고 서로의 관점을 비교 토론하는 ‘살아있는 교육’을 하고 있음에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하여 자식은 서울로 보내고 또 세계로 유학을 보내게 됨이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생생한 현장학습에서 얻게 되는 지식의 양질을 말함일 터-.

우리 후손들에게 모조품이래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선, 우리네가 열심히 살고 그래 부자나라를 만들어 모조품 박물관이라도 많이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앞은 언제나 인파로 넘친다.

미술관 견학을 하기 위해서건 아니면 만남을 약속한 ‘만남의 장소’건 간에 넓고 높다란 계단엔 뉴요커들이 붐빈다.

그네들의 표정이 밝아 보이기만 함은 그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가 장소인지라, 라고만 말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어 보였다.

03.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