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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싱그러운 북 베트남 (호치민&하롱베이)

싱그러운 북 베트남(호치민&하롱베이)



pm7:30. 3/27. 05-인천 국제공항 3층 국제선 탑승대 no34 게이트에서 하노이행 아시아나 비행기에 탑승키 위해 우리 부부는 다소 들뜬 기분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조금 전 세 딸들과 사위 그리고 막내의 남친(민주)까지 출영 나와서 우리를 환송하여 더욱 격양 된 감정 이였다. 그 실 결혼 34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는 해외여행 한다는데 출영치 않을 수 없다는 그들의 성화가 자못 가상스럽기도 했다.

30여 분 늦은 pm8:00에 비행기는 땅거미 짙어지는 활주로를 힘차게 박차며 어둠 속으로 솟구쳤다.

G여행사에서 주관하는 4박5일간의 북베트남 관광여행을 인터넷으로 계약 했었고, 좀 전 pm5:00 공항3층 bc카운터에서 그 쪽 직원으로부터 탑승권과 몇 마디 주의사항을 주문 받은 우리는 그야말로 아는 이 한 분 없는 홀가분한 부부여행 이였다.

늦은 출발로 기내식(저녁)이 없을까 봐 애들이 김밥과 공항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 주었는데, 한 시간쯤 후 기내식이 나와(결국 깁밥은 호텔 냉장고에 방치 해 버렸었고 빵은 귀국행 비행중에사 먹어야했다) 먹거리 풍요에 고소했음은 또 하나의 즐거움 이였다.

5시간의 비행 끝에 pm11:00(시차가 2시간 늦다)에 하노이 Noi Bai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마치고 입국 라운지에서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여행사 직원 K씨와 현지인 보조 가이드(여)를 만나서야 일행이 30명인걸 알 수 있었다.

짙은 어둠속에 어슬렁대는 뿌연 안개속의 시골길을 1여 시간 달린 버스는 Hanoi Hotel에 우리를 토해 냈다. 자정이 넘어서야 체크인 한 우리 부부는 트윈. 싱글 두침대가 놓인 쓰리룸에 여장을 풀었다.

am8:00. 3/28. 호텔 1층 레스토랑에서 뷔폐식 조반으로 포식한(아내가 맛있게 식사 해 좋았다) 우리는 am9:30 투어버스에 올라 땀꼭을 향해 투어버스에게 몸둥이를 맡겼다.

하노이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구릉 한 곳 없는 드넓은 평야지대를 시속 5~60km로 고속도로(오토바이. 자전거 땜에 속력을 낼 수도 없다)를 달리며 안개 속에 드리워진 연초록의 싱싱한 수채화를 차창 안으로 실컷 담아오고 있었다.

막 모내기를 끝낸 안개속의 그린필드엔 아낙네들의 모 때우기며 도랑 길의 풀을 뜯기는 군데군데의 소 떼들과 수로 웅덩이에서 유영하고 있는 오리 떼가 한 폭의 수채화로 다가와, 내 어릴 적 정겨운 고향의 풍광 속에 빠져드는 노스탈지어에 젖어들게 하고 있었다.

너무 한가롭고 티 없는 연푸른 초원의 들녘에 촉촉이 내리고 있는 뿌연 안개비(무안홍) 드리운 풍정은 가슴 시리도록 담고 싶은 풍요의 낙원 이였다. 갸날픈 몸매라서 더 청빈스러 보이기도 한 그네들의 모습과, 군데군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묘역들의 을씨년스럼을 관망하기를 2시간-우리는 닌빈에 도착하여 Bal long Hotel 레스토랑에서 푸짐한 현지 정식으로 점심을 들었다. 정원 귀퉁이 시골 아낙네의 목판에 올려진 초라한 과일(파파야, 바바나, 쟈몽 등) 한 꾸러미는 1$, 굵은 갈대로 엮은 월남 모자 “누”(삼각뿔의 여자용과 넓은 채양의 남자용) 한 쌍도 1$에 살 수 있었으니 ‘정말 싸다’는 감탄을 아니 할 수 없었다.

Pm12:30. 우리는 늪지 속 하롱베이라는 땀꼭 호아루에서 ‘삼판’이라는 나룻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기암괴석사이를 미끄러지듯 유람하는 신선놀음을 장장 6km를 하고 있었다.

나룻배 ‘삼판’은 굵은 대나무를 쪼개 엮어 만들어 뱃사공이 긴 대나무 장대를 늪 바닦에 찍어 밀어 배가 앞으로 나아가게 운행 하는데 거기엔 딱 두 사람이 탈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마 배 이름을 ‘삼판’이라 함도 세 사람이 탈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삼판이 다니는 수로의 깊이는 채 1m도 아니 될 성싶었고 주위 늪지대는 벼농사를 2~3모작 하며, 해아릴 수 없이 많은 석회암의 돌출 섬들이 수 없이 흩어져 솟아있어 조금만 떨어저서 볼라치면 가 없는 봉우리의 산맥을 이루고 있슴은 이곳이 수 억 년 전 바다였다 지각 변동에 의하여 해면이 융기 되어 생긴 기괴한 자연현상의 걸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하여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것은 수초를 뜯고 있는 군데군데의 소떼들과 군무를 이루며 유영하는 오리떼들의 한가로움이 한 폭의 거대한 풍경화를 감상함이리라.

석회암 바윗 사이에 기생하는 나무군들, 늪 가장자리 풀대에 꽃처럼 매달려 있는 빨간 곤충알들과 이름모를 꽃들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쪼아 먹고 있는 두루미의 늠름한 자태에 몽롱히 빠져든 시간은 가히 신선놀음이 아닐 수 없었다.

삼판 사공(?)에게 1$짜리 지폐를 팁이랍시고 건네고 땀꼭을 떠나 하노이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안마소를 찾아 전신마사지를 받으며 여독을 풀었다. 근데 자기당착적 모순은 여자 안마사로부터 마사지를 받은 남정네가 자기 부인이 남자 안마사로부터 마사지 받았음을 못마땅해 하는 거 말이다. 남자의 에고이즘이란게 고소감일 수밖에---.

교포가 운영한다는 식당에서 상치(이곳 상치는 넓고 연하며 부드럽기가 극치다)로 포식을 한 후 우리 부부는 호텔 주면 시내 밤거리를 한 바퀴 소요하다 잠자리에 들었다.

am9:00. 3/29. 체크 아웃한 우린 기대해마지 않던 호치민 묘역참관 길에 올랐다.

하노이 서북쪽 홍부홍거리 입구 Ba Dinh광장(약35.000ha)에 높이 40m의 주홍색 대리석20개를 열주(列柱)한 사각형의 묘역은 모스크바 레닌 묘를 그대로 모방했다나.


묘역의 바딘 광장은 호치민이(1945.9.2) 베트남의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던 곳이란다.

호치민은 1890.5.19일 태어나 1969.9.3일 사망하였으나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하여 1975.8월 베트남 통일이후에 그의 시신을 공개 했단다. 묘소는 평일(08:00~11:00) 일.공휴일(7:30~11:30)오전만 개관 참배할 수 있고 월.금요일과 9~10월(이때는 시신이 러시아에서 보존처리하여야 함)엔 휴관한다. 우리가 묘역에 닿았을 땐 이미 수 백m를 참배객들이 줄 서 기다리고 있어 놀랐는데 일일 참배객이 천명을 상회한단다.

묘소엔 200m 전방에서부터 도보해야하며, 참배시 반바지차림이나 모자 그리고 호주머니에 손 넣는 등 불경한 어떤 행위나 사진기 휴대도 용납되지 않는다.


줄 서 기다리는 동안 마침 위병 교대시간이어서 그들의 근엄하고 절도 있는 교대식도 눈요기감 이였다. 냉방시설 된 대리석 묘실엔 예의 그 하얀 수염에 삐쩍 마른 호치민이 옅은 핑크빛 조명 속에 홍조 띈 얼굴 모습으로 갈색 셔츠 상의 가슴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포개놓은 체 누워 있었는데, 그의 양 옆엔 흰 제복의 위병 2명씩 4명이 시신을 엄호하고 있었다.

호치민을 대하는 베트남 인민들의 모습은 경건, 경외심을 넘어 신격화(?)이지만 그를 호칭함엔 ‘호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어 얼마나 친근한 이웃 할배며 다정한 아비인가?!

그가 그토록 추앙 받는 까닭은 그의 투철한 민족주의와 독립에 이은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헌신적인 일생 땜이리라.


1911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운동의 시작으로 모스크바 코민테른에 가담, 1923년 중국 광둥에서의 ‘청년’조직,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 설립, 1945.9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선언에 이어 1968년 월남전의 뗏(구정)공세, 1975.4 사이공 점령까지의 베트남 통일에 기여한 그의 불굴의 민족-독립혼은 전설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100년간 베트남을 지배한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끈질긴 독립전쟁을 이끈 그의 용기와 지모에 베트남인민들이 어찌 그를 신격화(?)하지 않겠는가?

그의 묘역 전면엔 국회(공산당원만 선출)가 자리하고, 왼쪽엔 호사스런 프랑스풍의 건축물인 총독관저가 있는데 호치민은 1954-5년 그곳에 거주하다 묘역 뒤 연못을 사이에 두고 단아하고 조촐한 2층 목조건물을 지어 집무실을 옮긴다. 프랑스 총독관저는 너무 사치스러웠던 걸까? 암튼 지금은 국빈들의 영빈관으로 사용된단다.


그의 집엔 그가 평소 사용해 마지않던 간소한 생활도구들(침대,책상,의자,전화기,책,시계등 그는 생전에 무소유의 삶을 영위)이 그대로 보존되어 참배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호치민 박물관은 묘역 남서쪽에 자리한 현대식 콘크리트의 웅장한 건물로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인 1990.5.19에 개관했단다.

호치민에 관련된 서신,서류,기록,유물,사진,선물,그에 대한 세계의 評등을 1층에 전시했으며 2층엔 베트남의 미래를 제시하는 비젼을 전시하려 했다고 할까?

박물관에서 호치민을 보면서 아쉬워함은 우리도 그런 인물의 전시실이 아직 없다는 점이다.

‘바딘’광장에서 그의 묘역을 배경삼아 기념사진 몇 장을 찍으며 묘역 좌우에 붉은 글씨로 써 있는 현수막“호치민이여! 베트남 민주공화국이여 영원하라!”에 씁쓸한 또 다른 상념에 젖어본다.

‘죽은자가 죽지 않고 냉동되어 산자들의 참례를 받는<사자의 전시>는 레닌이나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이나 할 일이지 호치민에겐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불경(不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인 즉 그는 결코 독재자는 아니었기에 독재자들의 시신 참배를 굳이 흉내 냄이 잘못 아닐까함이다. 더구나 그는 생전에 ’호 아저씨‘로 불러주길 그리고 시신을 화장해 줄 것을 유언하지 않았던가.

호치민도 부정부폐, 관료주의, 마키아벨리즘의 술수, 독신 이였으나 일본, 불란서, 중국계 여인들과의 로맨스 등 과오도 있었지만 지금 그것에 대한 언급이나 어떤 불손도 용납치 않는다. 그는 베트남의 국부로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로써 숭앙받으며 인민의 가슴속에 살아있다.


과연 우리네도 그런 위인이 없었을까? 아니 장점과 공적을 기리려는 마음보단 폄하하고 비방하려는 마음이 앞서지는 않았음인지 자괴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어떤 인물의 박물관(기록관)이 꼭 훌륭한 업적이 많아야만 존재해야 함은 아닐 것이다. 공과 과를 있는 그대로를 전시하여 후세의 귀감이 되게 함에 진정한 의의가 있지 않을까. 다만 우리에겐 그렇게 할 국민적인 컨센스를 구하고 만들어야 되겠다는 지도층의 의지가 부족한 땜이라 생각된다.

언젠가 TV-History체널에서 우연찮게 시청했던 ‘호치민의 일대기’에서 감회한 그에 대한 경외와 흠모심을 오늘 그의 묘역에서 절감하면서 베트남 인민들의 행복감을 통감했다.

가없는 그들의 경외심을 곱씹어 보면서 자연문화유산 ‘하롱베이’를 찾았다.


하롱은 하룡(下龍)의 변성어고 어원대로 옛날, 용이 하강하여 머물던 절경이라. 전설에 의하면 해적의 침입으로 수난을 당하던 이곳에 어느 날 용이 하강하여 해적을 물리치고 보석까지 하사 했었는데 그 보석이 후에 기암괴석으로 변하여 바다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아주고 있다나. 무안홍 속에 질척거리는 고속도로를 오토바이족들과 곡예를 하며 시속5~60km로 투어버스는 예의 소 떼와 묘역과 농부들이 듬성듬성 흩어져 있는 뿌연 초록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이따금 초록수반위의 수석처럼 돌출한 기이한 산들이 무분별한 채석으로 하여 희멀건 속살을 내 보이지만 않았다면 농촌풍광은 장대한 산수화였다.

당장의 돈 몇 푼 땜에 돌 공예품을 만들기 위한 채석으로 망가뜨린 자연 - 후에 그걸 복원하기 위해서 또 얼마나한 돈과 수고와 시간이 소요 될 것인가는 그네들에겐 아직 호사스런 생각일까? 하는 탄식을 하며 어둠이 짙어진 땅거미 속 하롱시 바이차이 Sunlight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am9:00 3/30. 1시간여를 달린 버스는 베이차이 선착장에서 우리일행을 쿠르즈 투어에 승선시킨다. 6명의 승무원이 우리일행을 맞는 유람선은 점심까지 선상에서 자체 해결할 만큼 제법 큰 편이였다. 유람선은 미끄러지듯 자욱한 안무(按撫) 속 해수면을 가르면서 짐짓 은밀하게 숨겨진 섬들을 하나씩 베일을 벗기고 있었다. 곧 떨어져 바다에 풍덩 빠질 것 같은 석회암 덩어리를 매달고 있는 크고 작은 수직의 섬들은 촘촘히 박혀 있어 멀리서 보면 그대로 한덩이의 바위 봉우리의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1년 중 대개 안개에 휩싸여 있다는 기이한 3.000여개의 섬들은 1,500Km²의 베이만에 솟은체 수 만가지의 형상으로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옛날 해저의 융기로 생성된 기암괴석의 석회암들은 오랜 세월 비바람과 풍화작용으로 침식되어 돌-선인장 숲을 이루고 있어 내 짧은 촌철로는 어찌 표현할 바가 없음이다.

‘수반 위에 올려놓은 아름다운 수석들의 전시장’이라고 할까. 더욱이 그 수반의 깊고 푸른 바닷물엔 누가 수많은 사금파리들을 뿌려 놓았는지, 안무 속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은빛 물비늘을 일궈 우리들의 시계를 누부시게 착란 시키는 황홀경을 연출하매 어찌 자연의 비경에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또한 섬에는 동굴이 많다는데 우린 항한(Hang Hanh, 길이2km)동굴을 답사하고 가장 전망이 좋다는 티톱섬에 올랐다.


티톱(TiTop:1962년 러시아 국방상이 이곳을 관광하다가 호치민에게 이 섬을 자기네 우주인 이름으로 명명 해 줄 것을 요청하여 붙인 이름)이란 섬엔 전망대가 있었는데 300여개의 계단

을 올라가야 했고 거기서 조망하는 하롱베이의 유려한 섬들의 군웅은 가히 조물주의 걸작품이라고 밖엔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티톱섬 가장자리 모래사장을 거닐며 하롱의 바닷물이 얼마나 청정한지를 목도 해 보라. 눈이 시려 발을 담그면 금세라도 얼어버릴 것 같았다. 우리 일행(11명)은 수상가옥 활어장에서 다금바리(우리나라 근해에선 잡히지 않아 비싸다) 1마리(12kg)를 300$(덤으로 딸려 온 활어가 많았다)에 구입하여 선상에서 회 파티를 했었는데 비싼만큼의 맛은 못 느꼈다. 하루 내내 청명한 날씨가 아니어서 아쉽긴 했지만 운해(雲海) 속의 섬들의 신비스런 자태를 관광할 수 있었다는 걸로 자위함이었다.


일행 중 중국 ‘계림’을 관광한 자가 탄식한다. “계림은 하롱의 아우다”라고-.

아니 계림은 육지호반(이강) 속의 바위 숲이지만 하롱은 바다위의 바위 밀림지대이니 그 스케일 면에서도 압도할 것이라. (깟바에서 이용하는 보트투어는 하루 8$씩 이였다)

아쉬움과 하 많은 미련을 떨치지 못한 체 우리는 다시 버스에 몸을 담고 안개 속 몽환처럼 닦아오는 초원의 풍경을 즐기면서 하노이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늦은 밤, 한 프랑스 신문이 “수상인형극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능숙한 솜씨로 조정하는데, 마치 마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라고 찬사 했던 수상인형극을 관람했다.

땅과 물, 바람, 불, 안개 속에서 농민들의 농사일을 극화시킨 그들의 민속예술이란다.

거기서 놀란 일은 장내 아나운서 멘트를 한국말로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우리네 관광객이 많다는 증좌여서 뿌듯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은 어글리 코리언이 더는 없기를 기우(?)처럼 해 보기도 했다. 삼성. LG, 현대. 대우를 비롯한 기업들이 일군 ‘잘 사는 나라 코리아’의 좋은 이미지를 일부 졸부들의 저질 행위로 퇴색시키고 있다는 가이드의 말이 맘에 갱킨 땜이다. 비록 지금은 우리보단 좀 못 사는 그들이지만 그들의 풍부한 자원(세계2위의 쌀 생산. 천연 고무, 석회석을 비롯한 광물, 연안에서 발견되고 있는 엄청난 유전층과 가스), 상온의 기온과 풍부한 강수량, 천혜의 관광자원들을 잘 선용하면 머지않아 부(富)국민이 될 거라 여겼다. 그들의 끈질긴 민족성과 불굴의 의지와 높은 교육열은 무지갯빛 베트남의 미래를 확신 해 갈 거였다.

또 하나, 내가 흐뭇했던 점은 아내의 여행관(돈 써가며 하는 고행 길)이 좀은 달라지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는 것이다.

여행은 알려고 노력한 만큼만 재미와 보람을 안겨 준다는 단순한 진리를 아내가 빨리 터득 해 주길 못내 기도해 본다.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준비 없이 미지의 사물에 접 한다는 자체는 오만이고 그래 실망스런 고행일 뿐이란 사실을, 그래서 아내의 그 간의 여행은 대개 진한 감동보다는 고생의 여독일 뿐이었다는 점을 자각을 해야 함이다.

이번 우리 부부의 여행은 누굴 의식 할(한 사람도 지인이 없었다)것도 없는 단촐 하고 오붓한 이순(耳順)의 예행-허니문 이었다고 할까.

아내와 난 다음 여행도 이번처럼 낯선 곳에 끼어가자고 했다. 여행은 삶의 윤활유인 것을 ---.


2005.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