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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폭포에 눠 하늘을 품다 - 오봉산 & 득량만

폭포에 눠 하늘을 안아보라! -오봉산과 득량만


25번 고속도와 27번 국도가 곡성군 삼기천을 끼고 새끼 꼬듯 달리는 냇가에 개나리도 떼 지어 쫓아온다.

노랑머리 휘날리며 죽자고 달려오는 개나리는 노랑 띠를 시오리나 뚝방에 깔아놓다가 푸른 주암호에 몸을 풀었다.

그리곤 곧장 벚꽃으로 탈바꿈 하여 15번 국도를 하얗게 뒤덮어 득량만을 향해 다시 십리를 달린다.

쫓아오는 건 또 있다.

산뜻한 초록 옷을 입은 들판과 연초록옷가지를 막 꺼내 몸에 걸치는 산골이 줄 차게 따르는데 그들에 정신을 뺏기다가 난 눈을 감았다.

저리 아름답고 싱그런 자연의 신비를 <달팽이의 별>의 영찬씨에게 그의 아내 순호씨는 어떻게 알려줄 수가 있을까? 하고.

시청각중복장애인인 영찬씨는 척추장애인인 아내가 손끝으로 찍어주는 점화(點話)로 세상과 소통한다.

듣도 보도 못하는 그에게 색깔은 어떤 것이고, 느낌의 언어표현은 어찌할까?

그가 손가락으로 촉감 하는 세상은 정녕 추함이 없는 아름다움뿐일까?

더러운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그래 순수한 사유의 세계는 아름다운 상상 만으로 채워졌을 것 같아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어쩜 아름다운 것 보다 추한 걸 더 많이 보아왔을지도 모르는 우리들이기에 영찬씨는 우리들보다 더 행복하겠단 생각을 해봤다.

오직 촉수로만 세상과 소통하는 영찬씨는 달팽이일 수 있고 그 촉수에 우주를 밝혀주는 아내는 빛나는 별 같아서 두 장애부부의 일상을 찍은 영화 <달팽이의 별>을 생각하며 잔인한 4월의 오봉산을 올랐다.

오늘은 아름다운 것만 보자면서-.

10시 반, 해평저수지에서 시작한 등산로는 대나무와 시누대가 터널을 만들어 우릴 빨아들이고 구들장돌이 포도인양 깔린 산길은 완만해 기분 좋다.

반시간도 채 안 돼 도새등은 득량만을 펼쳐놓는다.

바다는 수억 년 동안을 뭍을 파고들어 원양 끝엔 거뭇한 산등성이만 남겨 보기 민망했던지 해무로 감싸 놓은 게 기막힌 수묵화가 됐다.

저 엉큼한 바다에 누가 잉크를 부었을까?


남색잉크는 밤새 번져 내가 서있는 절애 바닷가는 아직은 옅은 청색이다.

여기서도 바다 속이 훤히 보일 것만 같은데 짓궂은 해풍은 미끄러지듯 달려와 바다를 부순다.

쪼개지는 거울조각들이 밀려 해안선을 하얗게 덧칠하고 그놈, 바람은 나의 볼을 간지럽힌다.

너무나 좋다.

쏟아지는 햇살은 간척지들판에서 초록으로 문드러져버리고 분홍진달래는 수줍어 고개를 숙인다.


저 태곳적 신비를 순호씨는 영찬씨에게 어떻게 점화를 찍을까?

간질대는 바람의 언어를 어떻게 표현할까?

저기 몽유도 같은 수묵화를 어떻게 보일까?

마냥 미소를 잃지 않는 그들 부부를 보면서 내가, 참으로 답답한 건 나였고, 멍충한 건 나란 생각이 불현 듯 들었었다.

더럽고 나쁜 건 생각을 않는 거다.

아예 보질 않는 거다. 미치지 못 하드라도 아름답게 보면 될 성싶었다.

오늘은 나쁜 것, 추한 것은 보질 말자.

거뭇거뭇한 나뭇가지들은 연둣빛 혀를 총총히 내밀곤 미풍을 입맛 다시는데 쪽빛 바다는 갈매기 한 마리도 얼씬 않는다.

내가 서 있는 천길 단애 아래 그림 같은 한 뼘의 어촌에도 강아지 한 마리 내다보지 않는 정갈하고 나른한 풍광이 따스한 봄날을 노래한다.


오후 1시가 지나서 칼바위미궁 앞에 섰다.

엄청 큰 반원형의 칼을 지붕 삼은 바위미궁은 바위사이 미로(迷路) 끝에 입구가 있는데 커다란 바위덩이로 막아놓아 음침한 구멍을 통한 지하세계는 들여다볼 엄두조차 안 생긴다.

필시 지난달 어느 야심한 밤에 지하여왕 페르세포네는 여기로 빠져나왔을 게다.

근데 그녀는 무슨 심통이 났기에 금년 봄을 이렇게 굼뜨게 했을까?

나는 비운의 페르세포네를 생각하느라 한참을 미궁(迷宮)입구에서 서성였다.

그녀가 와야만 지구상의 모든 식물들은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풍요를 일구고 겨울문턱에 이르면 다시 저 입구를 통해 지하세계로 향하는 절세의 미녀인 그녀를 상상해보는 거였다.

칼바위궁전 앞엔 진달래가 만개했고, 좀 더 오르자 노란양지꽃과 민들레, 자줏빛 제비꽃과 깽깽이풀꽃, 까치 옷을 걸친 산자고가 누런 낙엽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페르세포네는 만삭의 봄을 이제 해산하나 싶었다.

수평선이 해무에 먹혀버린 하늘 끝에 팔영산과 소록도가 회색그림자로 남았고 반대편엔 천관산이 그 시늉을 내고 있는 바다 위 완만한 절벽 길은 등산 아닌 트레킹코스로 최상이다.

이 길에 들어서면 곧장 일상은 까맣게 잊고 마음은 끝없는 원양(遠洋)에 이른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오봉산코스는 득량만과 질리도록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어 산님들의 아낌을 받을 게 틀림없어 보성군은 정성을 쏟아 부었나싶었다.

오봉산정상을 밟고 오후3시에 용추폭포 사타구니 앞에 섰다.

폭포수는 하늘에서 곤두박질치다가 배꼽 아래쯤에 돌기한 물건(바위)에 나눠져 쫙 벌린 가랑일 타고 거친 물살을 쏟아낸다.

그 폭포수를 고스란히 품어야하는 검푸른 웅덩인 아파서 천둥소릴 질러대고 있는 거였다.

억겁을 폭포수에 씻긴 바윈 질펀한 마당을 만들었는데 나비아타신랑은 자릴 펴더니 나더러 누워보란 거였다.


서서듣는 천둥소리와 눠서 듣는 지동소리가 어떤지를 가늠해보라는 거였다.

난 큰대자로 나자빠졌다.

근데 바위가 우는 소리보다도 더 기막힌 건 하늘이 타원형으로 바위에 잘려서 나를 덮칠 기세로 떨어지고 있는 거였다,

아차하면 개구리신세가 될 판 이였다.

그래도 난 땅이 돼 하늘을 보듬고 싶어 그대로 나자빠져 있는데 보름달에 계수나무가 있듯 하늘에도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게 아니가!


산님들이여!

기회가 되면 폭포 아래 눠 하늘을 안아보시라!

그 기막힌 오감을 어찌 말 하리요.

나비아타신랑과 저녁노을은 깨복쟁이 동심이 돼 물 싸움질에 삼매경에 들었지 싶었다.

아~! 멋있는 트레킹 이였다.

다섯 시간이 조금도 피곤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오늘을 선물한 갈뫼에게,

더딘 봄 탄생시킨 페르세포네에게,

트레킹코스 개발한 보성군에 감사드리고 싶다.

2012. 0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