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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남해 앵강 다랭이 논 - 다숲길 기행


다랭이논`다숲 길 & 느닷없는 돔 경매 - 남해앵강 기행

이맘때쯤 이였을 테지요.

농부가 모내기 하러 다랭이논을 갈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봄볕에 노곤해진 농부는 이마의 땀을 훔치다 한 배미, 두 배미, 세 배미--- 열 배미까지 세다가 다시 한 배미, 두 배미, 세 배미---열 배미를 세곤 정신이 머쓱해 졌습니다.

한 배미가 모자란 겁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릅니다. 부채질을 하러 삿갓을 벗습니다.

이때 한 배미가 삿갓 속에서 떨어지지 뭡니까!

농부의 만면엔 행복한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나는 이 얘기를 ‘남해관광가이드’에서 읽고 가천다랭이논을 한 번 꼭 가보고 싶었지요.

가천다랭이논은 108계단에 680여개의 다랭이논이 있답니다. 물론 아까 농부의 삿갓 속에서 떨어진 ‘삿갓논’도 그 중에 하나구요.

그 논둑길에 서서 다랭이논에 얽힌 피와 땀과 희망과 행복을 읽고 싶었던 겁니다.

난 오늘 오전 10시 반에 그 곳에 섰습니다.

남해엔 하늘도 바다도 없습니다.

어제 밤 누군가가 심통이 났던지 회색물감을 퍼부어 문질러버렸습니다.

당연히 태양도 없는 남해는 지금 오로라에 들었나 싶었지요.

그래도 내가 선 주위 다랭이논엔 초록 마늘이 무성하고 노랑유채꽃도 흐드러졌습니다.

저 아래서 사람들이 웅성웅성 합니다.

기가 똥찰 일이 벌어진 게지요.

새까희번덕한 대물(大物)이 빳빳하게 허공에다가 삿대질을 하고 있지 뭡니까!

잘도 생긴 그 물건이 얼마나 좋았던지 여자분들이 ㅋㅋ대고, 남정네들은 ㅎㅎ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태양이 없어도 낮은 낮인데 무슨 일이당가요?

남해-ㄴ 깜짝 매직 쇼를 하나 싶네요.


숲길에 들어섰습니다. 나무엔 막 핀 연초록 이파리가 싱그럽습니다.

찔레, 아그배, 노린재나무가 하얀 면사포를 휘둘렀고, 철쭉과 병꽃이 화사합니다.

숲 바닥엔 꽃마리, 피나물꽃, 민들레가 지천이고 천남성이 자주색 혀를 빼 오므리고 꽃이라고 웃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온 바람 몇 올이 내 코끝에 걸치네요.

꽃마리`피나물꽃에도 바람이 닿았는지 꽃 이파리가 바르르 떨고 있습니다.

꽃의 신 폴로라가 여간 바쁜 게 아닙니다.

아주 먼 옛 봄날,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길을 잃고 헤매는 폴로라를 발견하곤 유혹의 손길을 뻗칩니다.

그 유혹을 따돌리러 달아나는 폴로라에게 제피로스는 간질거리는 미풍을 불어 그녀를 나른하게 만든 후 혼곤한 잠에 빠져 꽃의 신을 만들었다지요.

폴로라는 이 봄날에 실큰 잠을 자고 싶지만 온갖 식물에 꽃을 피우게 하려 눈코 뜰 새가 없답니다.

우리를 위해서였을까요?

어쨌거나 난 행복합니다. 낯선 곳, 매직 쇼를 연출하는 남해에서 여행의 맛깔이 어떤 건지를 만끽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하늘과 바다가 한 통속이 된 앵강만은 뿌연 해무 속에서 숨을 몰아쉬느라 몽돌사이에 흰 거품을 토하고 있습니다.

지칠 만도 하지요. 돌멩이를 얼마나 얼렀으면 저렇게 맨들맨들 할까요?

지친 숨소리만 아니면 앵무새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바다!

그래서 앵강만은 파라다이스라서 서독서 살다 온 간호사와 광부들이 정착 했다지요.

앵강만을 품은 마을들은 이젠 다랭이논에서 팍팍한 삶을 일궜던 어촌이 아니라 행복이 넘치는 휴양지 같았습니다.

한 폭의 그림엽서였습니다.


독일마을 앞에서부턴 다숲길은 비좁은 편도 일차선 차도여서 아슬아슬 위험천만 이였습니다. 어떻게든지 갓길이라도 좀 넓혔어야했지요.

트레킹(관광객)족에게 그 길을 가라 함은 남해지자체의 오만입니다.

뿐만은 아닙니다. 화장실은 뭣 땜에 자물쇠를 채웠는지?

화장실청소가 귀찮아서였다면 화장실주변에 싸버린 건 괜찮다는 걸까요?

앵강만 바닷물은 청정한데 몽돌 밭의 쓰레기는 보고도 모른 채 하란 걸까요?

남해둘레길 만들었노라고 홍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관리가 더 중요함을 모를 리 없을 지자체일 텐데~?

땜인지 그 바닷가에 기상천외한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홀라당 깨 벗은 나목이 죽어서도 양팔에 양식용 스티로폼을 껴안고 몽돌 밭에서 안쓰러운 시위를 하고 있었지요.

남해지자체 양반들 가보시라요.


드디어 날머리인 벽련마을에 닿았습니다.

내가 그토록 몽매했던 노도가 손 내밀면 잡아당길 것 같더군요.

그 노도는 다숲길 걷는 내내 내 앞 멀리서 해무 속에 긴 가민가로 애태웠지요.

올바름이 아니면 뒤도 안돌아 봤던 매월당 김시습은 강화도를 떠나오는 배에서 탄생하여 이곳 노도에 귀양 와 위리안치 돼 몽사(夢死;꿈꾸다 죽다)했었습니다.

선생은 자신의 묘비명에 ‘몽사’만을 쓰라고 유언했다지요.

난 선생의 일생이 어찌나 심금을 울렸던지 몽사한 노도가 그토록 연연했었지요.

선생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절절한 귀감일까요!

가카와 고관들은 귀 닳토록 새겨야할 말인가 싶은디-.


“나라 곡간에 쌓인 재물은 전부 백성들이 거둬준 것이며, 고관들의 옷과 신발은 백성들의 살가죽이고, 우리가 먹는 음식은 백성들의 기름이요, 궁궐은 백성들의 힘으로 이뤄졌으며, 세금, 공물, 모든 용품이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백성들이 세금을 내는 까닭은 군주와 고관들이 총명과 예지를 다하여 백성들이 잘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애민의>에서”


한 시간쯤 버스가 어둠속을 질주하고 있었지요.

‘지기’님이 느닷없이 한자 쯤 될 성싶은 강성돔 한 마리를 들고 (경매) ‘쟁이’님이 됐습니다. 여성의뢰인이 돔 한 마리를 경매에 내놨답니다. 까닭이 궁금하여 웅성댑니다.

'쟁이'님이 석명합니다. ‘미친 돔’ 아니면 ‘치매 돔’일지도 모른다고.

의뢰인이 강력히 부인합니다. 금방 앵강만 해변에서 건져 올린 거라고.

다른 여성분이 훈수 둡니다.

‘아까 바닷가에서 건진 건 맞다. 발견은 내가 했고 건진 건 의뢰인 했다’고.


‘쟁이’님이 경매를 시작합니다.

“이천 원이요” “오천 원입니다” “만 원입니다” “천 원 얹어 만천 원이요” 순간 뜸해지더니 이내 잠잠해 졌습니다.

의뢰인께서 택시비는 빼야 한다고 차비 하한선 이만 오천 원을 제시한가 싶었습니다.

‘쟁이’님이 다시 호객을 합니다.

이때 누군가가 “살아있는 놈이면 십만 원에 사겠소” 장내 뒤숭숭하다가 순간 고요-.

‘쟁이’님이 안 되겠다 싶었던지 “명년 이 때 살려 갖고 오겠답니다”라고 폐장을 선언 합니다.


뜬금없는 돔 새끼가 맬급시 바닷가로 흘러와선 삽상한 여성분의 맘을 싱숭생숭 해놓곤, ‘지기’님께 자랑 한 것까진 좋았지요.

근데 이것저것 다 잡처버리게 만든 건 ‘지기’님이 ‘쟁이’님으로 변신을 해 웃전 좀때서 배불려 볼까 하다가 죽 쒀 버린 거였습니다.

누군가는 깜박잠 깨워 입이 다섯 자가 튀나왔을지 모르지만 버스 속은 한바탕 배꼽 잡는 카타르시스에 ㅋㅋ-ㅎㅎ.

‘지기’님, 오늘 무척 행복했습니다.

2012. 0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