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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아파서 피 토하는 철쭉축제 - 황매산


아프고 피곤타, 핏빛 각혈하는 철쭉축제 - 황매산


산청과 합천을 가르는 1026번 도로 떡갈재(황매산터널)에서 황매산을 찾아드는조붓한 숲길은 그지없이 좋다.

연둣빛에서 연초록 파스텔 톤으로 붓질한 숲 터널을 걷느라면 5월의 싱그러움이 일상에 쪼그라든 우리네의 심신을 얼마나 빨리 치유하고 있는가를 실감케 한다.


두터운 부엽토길이 발바닥에 전해주는 쿠션은 몸뚱이가 연초록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듯 하게한다.

간혹 좀은 빡센 오름도 있긴 했지만 너배기쉼터를 지날 때까지의 한 시간쯤의 숲길은 5월의 신록이 주는 최상의 맛깔일 것이다.

그 숲 터널을 이룬 나무가 떡갈나무다보니 커다란 이파리로 켜켜이 햇볕을 차단한 녹두 빛의 투명한 역광이 빚는 실루엣은 가히 환상적이라.

철쭉은 황홀했던 흔적을 무성한 연초록 이파리에 상흔으로 남겼다.

철쭉군락지에 들어섰지만 이젠 진홍의 바다는 파시의 씁쓰레한 부유물들만 떠다니는 슬픔처럼 처연했다.

늦게 찾아오는 간절한 손님(벌`나비)들을 위해 군데군데 늦깎이로 피우고 있는 철쭉무리의 마지막 불꽃을 우리는 잘도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착각은 자유다’라지만 매파를 고대하는 철쭉에게 사람들은 훼방꾼일 뿐인데 말이다.

그들에겐우리가 곤충인 벌`나비만도 못한 기피동물로 보일게 뻔 하다는 사실을 묵살한다.

삼봉을 향했다.

바위들을 쌓아올린 연봉들은 숲을 키우고 있어 오르고 내리는 긴장의 맛이 등산의 묘미를 알게 한다.

삼봉(1108m)에 올라 팔각정에 인증 샷을 했을 땐 정오가 막 지나쳤다.


이글댄 태양에 초록 숲이 뿜어낸 숨결 탓일까?


동편 저 아래 합천댐이 아롱대는 숨결만큼 아른거린다.

누군가는 이곳 철쭉이 피바다를 이룰 땐 저 담수도 빨갛게 타들어간다고 했었다.

그 불분명한 미혹의 실체는 산 정상에 서 본 자만이 상상의 날갯짓을 맘껏 펴 볼 열락의 자유인 것이리라.


천길 단애가 삐쭉이 빚어놓은 바위에 걸터앉아 점심자릴 폈다.

등산 시작부터 여태 홀로산행이고 그 호젓한 맛은 날머리 약속시간인 오후 3시 반까지 즐길 참이다.

여기서 황매산정, 배틀봉, 모산재로 이어지는 능선이 질펀하게 펼쳐놓은 저 아래 분지의 수 만평이나 되는 철쭉단지는 이미 황적색으로 빛바랬고, 흰 모스크처럼 연결된 차일과 줄 선 승용차들이 볼썽사납게 철쭉단지를 파고들어 확성기로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어떤 미친놈이 “영화마을에 들러 구경하세요.”라고 미치게 앙칼을 떨고 있었다.

1시쯤 황매산정을 밟고 모산재를 향한다.

나무데크 계단은 수 만평의 철쭉단지 능선을 갈라 사람 띠를 이뤘고, 단지 속은 두더지가 뚫어놓은 길처럼 밟힌 자국들이 얽혀있다.

찬란했던 선홍의 철쭉은 아직 미련이 남아 사그라지는 불꽃을 붙들고 있는데 그 놈들을 에워싼 산님들의 분장이 더 현란하다.

정자에 서자 아까 그 미친놈의 “영화세트장 구경―-”소리가 지금도 앙칼져지게 고막을 찢어 발길을 뜨게 한다.


배틀봉(946.3m)을 찍고 모산재를 향하는 광활한 철쭉단지를 걸으면서 일주일 전쯤의 만개했을 진홍의 철쭉바다를 생각해보며, 명년엔 꼭 그 핏빛의 바다에 몸 담가 헤엄쳐 보고 싶어졌었다.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도 ‘이건 아니다’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활주로만큼이나 넓어져 누더기 된 등산로와 무분별하게 헤집고 다니는 단지 속의 관광객들, 더는 난장판을 벌린 축제식장과 주차장과 갈지 자 찻길들이 어떻게 해발 1000m 가까운 곳에 버젓이 들어서 왁자지껄 돛대기시장을 만들었는가?

이런 축제가 계속된다면 황매산철쭉은 얼마나 버틸까?

지금 마지막 피우고 있는 철쭉의 선홍빛은 몸부림 친 각혈일지도 모른다.


축제는 우리들의 전통적인미풍양속이나 자연의 은전을 기리고 기념하며 그 아름다움을 후예들에게 이어주기 위한 겸손한 제의(祭儀)의 마당이 아니던가?

배금사상이 낳은 장삿속은 지자체까지 만연해 축제는 허위와 허례, 돈벌이로 병들어 감이다.

각성하지 않으면 자연은 물론 우리마음까지도 황폐화 되 갈 것이 뻔하다말다.


제임스 프레이져는 그의 유명한 <황금가지>에서 말했다.

“옛 게르만족은 숲은 ‘신전’이라 여겨 나무를 신성시 하며 숭배했다. 나무는 우리에게 주기만 하고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데 함부로 베는 것은 어머니를 죽이는 행위와 같다하여 중죄로 다스렸다. 나무껍질을 벗긴 자에겐 배꼽을 도려 나무의 상처에 말아 붙여 치료했다. 이는 나무의 생명이 곧 사람의 생명이라 여겼던 것이다. 나무에 꽃이 피면 임산부와 똑 같이 여겨 꽃 핀 나무 옆에선 큰소리도 내지 않았고 밤엔 등불 들고 근처에 가지도 안했다.” 라고.


경외심을 갖고 자연을 대하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는 걸 고대인들도 안 사실인데, 오늘날의 우리들이 나아가서 선도해야할 지자체간부들이 개판을 쳐서야 그들의 배꼽뿐이 아니라 그 아래 물건까지도 내놓고 벌 받아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철쭉축제를 치루는 합천지자체는 이 높은 곳에 설치하는 온갖 시설물 비용을 축제기간동안 철쭉단지를 지키고 안내하는 알바비용으로 전환하면 고용창출도 되고 철쭉단지도 보호 될 것 같다.



더는 알바비용이 모자라면 축제기간엔 관광객들에게 1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인원도 통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호하는 의식고양과 일자리창출까지 이어지는 전통으로써의 축제를 말이다.


모산재는 인파로 꽃피웠다.

바위산이기망정이지 흙산이면 뭣이 될 텐가?

모산재에서 돛대바위, 순결바위를 훑고 영암사쪽으로 하산하는 바위산들은 천하절경 이였다.

온통 바위로만 이뤄진, 그 바위가 붙들고 수백 년 동안 놓아주질 않는 질곡의 삶의 표상이 된 소나무들을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황매산은 백두대간이 마무리한 보물산 이였다.


시간이 있었으면 그 바위산에서 한나절쯤 뒹굴고 싶었다.

예닐곱 살 먹은 애를 데리고 온 부산에서 왔다는 젊은 커플이 마냥 행복해 보였다.

거기선 아무리 짓밟아도 망가질 게 없는 바위로만 이뤄진 휴식처였다.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는 천하의 도량 같았다.


그 바위산을 내려오기란 여간 지난하다.

가팔라서다.

허나 울창한 나무들이 캐노피`숲을 일궈 천천히 하산하면 일념에 드는 맛도 쏠쏠하다.


내가 덕만주차장 버스에 오른 시각은 오후 3시20분을 막 지나서였다.

모두가 나만을 기다리고 있었던지 반가이 맞자마자 출발이라.

이럴 땐 좀 애매머쓱해진다.

약속시간에 늦진 안했는데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말이다.


5시간 반의 옹골찬 산행이 의자에 날 푹 파묻게 했다.

피로가 전신을쫙 감싸왔다.

혼자 좌석을 독차지함도 좋았다.

2012. 0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