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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백십년 전의 고향 - 부산박물관에서

백십년 전의 고향 - 부산박물관에서

영광풍경도 ; 안중식의 1915년작품. 비단에 수묵담채, 170.0×473.0㎝ (리움미술관 소장)

영광풍경도(靈光風景圖)10폭병풍은 조선말기 안중식(安中植)의 1915년작품으로 근대회화의 여명을 연 작품이다.  안화백은 관념산수화로 작풍을 날렸는데 이 작품은 그의 몇 안 되는 실경산수화여서 더 유명하다. 체화정(棣花亭)에서 조망한 영광고을의 모습은 그의 실경산수화 중 규모가 큰대다 전통화풍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감각을 선 뵌 전통회화에서 근대회화로의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마을 뒤쪽의 웅장한 우산(牛山)과 그 아래 펼쳐진 넓은 들판과 성곽과 초가집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이 그림은 안중식이 서양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듯 맑은 담채화로 영광고을 풍경을 잘 표현했다. 그림 상단의 발문(跋文)엔 안중식이 호남의 거부 조희경(曺喜璟) 형제의 초대를 받아 영광에서 40여일간 머물면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썼다.

영광풍경도6폭병풍(한국중앙연구원 사진)은 위 10폭병풍의 일부다.

안중식은 뛰어난 서예가에다 시인이며 인물,꽃,새, 산수묘사의 독보적인 화가였다. 그는 장승업에 이은 산수, 인물, 화조, 영모(翎毛) 등 모든 유형의 그림에 탁월하여 고종과 황태자의 초상화는 물론 궁중의 그림을 도맡아 그렸다.


체화정(棣花亭)은 현재 난원 사회복지센터 상단쯤인데 100년전 영광읍 전경이 사실적이면서 깊고 부드러운 기운을 자아낸다. 영광풍경도를 보면서 애향심이 일깨워지는 건 세상은 너무나 급하게 상전벽해를 이뤄 애틋한 향수마져 잊혀지는 세태를 어쩌지 못한다는 체념이 무서워서다. 한 세기 전의 나의 고향 영광읍 풍경에 발길을 잠시 멈췄다. 나의 선고(先考)세대는 이 그림 앞에 노스텔지어가 될듯 싶었다.

▲부산박물관 정원▼

 초의선사(草衣禪師) 속성은 장(張), 법명은 의순(意恂)으로 15세에 나주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는 한국다도(茶道)를 정립한 다성(茶聖)으로 존경 받는데, 동다송(東茶頌)은 1837년 우리나라 차에 대해 쓴 68행의 7언 고시체(古詩體)의 송시(訟詩)다. 동다송은 차를 연구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심층적으로 체험한 바탕을 저술한 다서(茶書)다. 책에는 차에 관한 신기한 전설을 중심으로 차의 효능, 생산지별로의 차의 이름과 품질, 차 만드는 일, 차물에 대한 품평, 차 끓이는 법, 차음용 대한 구체적인 예법등에 관한 내용이 기술됐다.

 동다송은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洪顯周)가 진도 감목관(監牧官) 변지화(卞持華)를 통해서 차도를 묻자 답을 송시(誦詩)형식으로 쓴 저술이다. 이 책은 조선후기 경화세족(京華世族 서울에 대대로 사는 권력가문)간에 차문화가 유행하는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후 중국 다서(茶書)를 베껴 쓴 서적이 간행 됐단다. 초의선사의 다맥(茶脈)은 부산의 유력인사들과 문인들로 이어져 현재까지 활발하게 다도에 진념하면서 다향을 즐기고 있단다.

초의선사
곽분양행락도

곽분양행락도(郭分讓行樂圖)는 중국 당나라의 유명장수 곽자의(郭子儀)의 생일잔치를 묘사한 그림이다. 곽자의는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고 장안과 낙양을 점령한 영웅으로 왕이 ‘분양군왕(汾陽郡王)’이란 호칭을 하사했다. 그는 85세까지 장수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슬하에 아들8명과 딸7명을 거느리고 다복한 가정을 꾸려 집안을 번창시켰다. 하여 그의 일생은 다양한 문학작품과 회화의 주제가 되었다.

그림에는 곽분양의 집을 찾는 손님들, 자손들이 무희의 춤을 감상하며 잔치를 즐기는 곽분양과 평안한 일상을 즐기는 부녀자들과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조선후기 왕실에선 다남과 자손번창으로 화목한 가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곽분양행락도를 제작하여 일반인의 혼례나 잔치에 활용했다. 이 그림은 곽분양행락도 중에서 화폭이 매우 크고 색채가 선명하며 묘사가 치밀한 걸작이다.

초당독서도

 초당독서도(草堂讀書圖)는 초가집 안에서 독서삼매에 빠진 한 선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거대한 절벽의 큰 바위 사이에 있는 초가집과 바위 위에서 뿌릴 내린 채 높이 솟은 소나무가 일품이다. 속세와 떨어진 깊은 암송계곡에 초가를 짓고 차를 마시며 글을 읽는 초연한 삶을 즐기는 선비의 모습이 사실적이다. 선비는 머리에 은사(隱士)가 쓰는 두건(頭巾)인 복건()을 착용했는데 이는 그를 은일(隱逸)의 삶을 즐기는 선비임을 암시한다.

“여러 해 동안 책을 읽었더니 (讀書多年) 어린 소나무가 모두 늙은 용의 비늘처럼 되었구나 (種松堦作老龍蹸)”

()의 유명한 시화가인 왕유(王維)의 시가 소나무가지 위에 걸려있어 그림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명기는 정조의 어진은 물론 당대의 주요 인사들의 초상화를 도맡아 그린 최고의 초상화전문가였으며 산수화도 뛰어났다.

책가도병풍

책가도(冊架圖)8폭병풍 서가 - 책꽂이에 진열된 책과 각종 문방구 등을 묘사한 책가도는 정조가 바빠 독서할 시간이 없으면 책가도를 보며 심적희열을 즐겼다. 이 책가도엔 문방사우 외에 두루마리, 수선화, 불수감, 향로, 중국자기, 공작깃털, 산호 등 수입물건도 묘사돼 있다. 이 그림의 정교함은 궁중화원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책가도는 고관대작과 양반들의 필수가구가 되어 부와 명예의 상징이 되다보니까 졸부들도 책가도를 집안에 들여 놓는 게 유행이 됐다.

삽살개

삽살개는 조선후기 김두량 작품이다.  “사립문을 지키는 것이 (紫門夜直) 너의 소임인데 (是爾之任), 어찌 낮에 길 가운데에 (如何途上 나와서 이와 같이 하는가 (晝赤若此) "

이 글은 영조가 자신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대낮에 길 가운데 서서 함부로 지져대는 개를 비유한 어제(御製)이다. 작금엔 입바른 백성들이(?) 왕궁 앞에서 항의하며 시위를 밥먹듯 해도 독불윤왕은 마이동풍 허공을 향해 어퍼컷만 날리는 소통부재가 환장하게 답답하다. 나라꼴이 어찌 될런지? 

"자문야직(紫門夜直) 시이지임(是爾之任) 여하도상(如何途上) 주적약차(晝赤若此)"라고 일갈한  영조대왕이 하림하여 촌철각성 시켰음 싶다.

김홍도의 수하오수도
박물관 후원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