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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봉래산이 품어온 얘기

봉래산이  품어온  얘기

영도(影島)의 말[馬]은 달릴 때 그림자도 안 보일만큼 빠르다 해서 절영도라 할 만큼 명마(名馬)전설이 유명하다. 신라 33대 성덕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공을 치하해 그의 손자인 김윤중에게 절영도(絶影島) 명마를 하사 했고, 후백제 견훤은 고려 왕건에게 선물했다는 얘기가 옛 문헌에 남아 있다. 영도 명마목장은 조정에서 관활했는데 원나라로 수출하려고 제주도 말을 들여와 임시 사육시켜 보낼 때마다 멀쩡했던 말들이 영도를 떠나자마자 병들어 죽었다. 그 원인은 최영 장군이 첩(妾)인 탐라국 여왕을 동반하여 영도에 왔는데 주위의 모함과 음해로 여왕이 유배된데서 찾기도 한다.

백련사, 산행 들머리로 택했다
송도 끝머리 앞 두도가 선명하다

탐라국여왕은 억울하여 영도에서 군마로 나가는 말들을 병들어 죽게 했다. 하여 탐락국 여왕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봉래산에 사당을 지어 해마다 제를 올리는 산제당의 의식이 행해지고 있다. 봉래산에 영도 할매귀신을 모신 산제당이 현존하는 연유다. 또한 삼국시대 도참사상엔 후백제의 성지인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땅에 들어가면 후백제가 망한다는 전설까지 보태어 일제강점기엔 일본인들을 해코지한다는 유언비어가 횡횡하자 일제는 봉래산 조봉에 쇠말뚝을 박고 고갈산(枯渴山)이라 부르게 했다.

백련사에서 숲길을 오르다보면 우측에 암자가 있는데 똥개 두 마리가 어찌 짖어대는지 빠꾸했다
너덜지대

천리마가 달리면 그림자가 끊어질 정도로 빠르다는 절영(絶影) 섬(島)을 일제는 영도를 떠나면 죽는다는 절명(絶命)도로 바꿔서 영도에서의 탈출을 막으려 했다. 당시 영도는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강탈한 온갖 물자들을 일본으로 보내는 항구로써 수많은 부두노동자들이 강제노역을 당하고 있어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영도탈출을 꿈꿨었다. 그 꿈을 좌절시키려는 일제의 음흉한 간계는 우리의 민족정기까지 끊으려고 봉래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 그 쇠말뚝을 근년에 정상석을 세우려다 발견해 뽑아냈던 거다.

태종대 앞바다의 화물선
둘레길에서 정상을 향하는 갈림길

봉래산 정상에 서면 사방이 확 트인 조망에 특히 끝없이 펼쳐진 창해의 시원한 바람맞이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해무(海霧)를 휘두른 짙푸른 수면 위에 붙박인 화물선들은 한 편의 동화를 꿈꿀만한 서정을 자아낸다. 정상 바위 사이에 멋지게 폼 잡고 서있는 소나무 뒤쪽 구덕산에서 승학산, 장유봉, 불모산, 천마산, 장군봉이 하늘 금을 긋고, 발아래서는 남항의 송도해수욕장, 남항대교, 자갈치시장, 영도·부산대교와 용두산공원이 파노라마 치듯 조망된다. 짙푸른 오월의 산자락 속에서 하얗게 솟은 고층건물들은 언`바란스를 이룰 것 같은데 기이하게 멋지다.

태종대 감지해안은 화물선 낮잠장소인가?
신록의 계절에 깨벗은 오리나무, 오리나무 잎은 애벌레들의 최상의 먹잇감인지 거의가 잎사귀를 다 띁긴 채였다
봉래산길도 바위가 많아 트레킹 하기 좋은 코스였다

봉래산(蓬萊山·396.2)은 정상을 할아버지봉인 조봉(祖峯), 아들봉인 자봉(子峯·391), 손자봉인 손봉(孫峯·363)의 삼대(三代)능선이 태종대를 향해 어깨를 맞댄다. 영도는 삼국시대부터 말을 키우는 국마장[牧島]이 있어 영도 말이 달리면 그림자가 채 못 따라와 끊긴다고 절영도(絶影島)라 불렀다. 또한 봉래산 정상바위 모습이 구부정한 할머니를 닮아 할미바위로 불린다. 산신(山神) 할미바위의 전설은 영도을 떠나려면 할매가 잠든 깊은 밤에 떠나야지 할매가 알게 떠나면 하는 일이 망해가지고 불행하게 다시 되돌아온다.’는 거다.

8부능선쯤 올랐을 때 그늘사초카펫을 깔아 환영하는 통에 나는 신바람이 났다
▲어느쩍에 쌓앗던 성일까? 허물어진 성벽의 사연이 궁금했다▼
봉래산 이정표가 기똥 찬 건 흰말=하산길, 초록말=둘레길, 남색말=상행길을 나타내 산행에 도움이 된다

그 말은 일제가 지어낸 흉계고 진의(眞意)는 ‘고향을 떠나더라도 영도를 잊지 말라’는 끈끈한 정을 함축하는 정서적인 전설이다. 암튼 근래까지도 영도 사람들은 낮에 이삿짐을 먼저 보내고 가족들은 다음날 새벽에 택시타고 영도를 빠져나갔다는 실화가 있을 만큼 영도주민들의 토속적인 풍습이 됐단다. 영도 토박이들은 2011년부터 매년 6월 11일 할미바위 앞에서 삼신할매와 영도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기원제를 지낸다. 2009년 6월 11일 할미바위 앞에서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아낸 날짜를 기원으로 삼았다.

자연석 원탁쉼터에서 모처럼 베낭을 풀고 입가심을 했다
정상을 밟고 자봉과 손봉을 더듬을 참인데 여기에 이정표가 있어 잠시 헷갈였다,

매년 9월 영도다리 축제 때는 삼신할매 모양의 조형물을 만들어 퍼레이드도 연다. 이 전설은 ‘밤에 떠나더라도 영도(봉래산)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사 가야 삼신할매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다’거나 ‘택시를 타고 나가야 삼신할매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내용으로도 전해진다. 정상에서 노익장 한 분을 만나 내게 인증샷을 해주고 풍경설명도 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오늘 대체로 시계가 양호한 편인데 해무 탓에 대마도가 안 보인다고 그쪽을 가리킨다. 허나 그쪽 해무 속에 거뭇잡잡한 그림자가 있다. 한때 대마도는 우리의 영토였다.

▲남항대교와 연결된 송도, 그 뒤 아미산(다대포), 그 뒤로 을숙도인가 싶은 섬이 한 폭의 묵화로 재탄생했다▼
부산 남항, 뒤로 승학산과 구덕산이 곧 내려앉을 회색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구덕산 간짓대가 하늘차일 받침대인가?

일본이 독도를 자기내 것이라 어거지 쓸 땐 우린 대마도가 우리영토라고 떼거지를 썼으면 싶다. ‘부산시 대마도구‘라고. 맑은 날 부산 어디서나 보이는 대마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구마 도래지다. 1758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된 조엄(趙曮)이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귀국길에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를 접한다. 고구마의 유용성을 안 그는 고구마 싹을 튀워 줄기를 뻗쳐 그 줄기를 끊어 밭에 심어 가꾸는 고구마 재배법과 저장법을 소상히 알아냈다. 귀국할 때 그는 씨고구마를 가지고와 그의 연고지인 동래와 제주도에 시험재배에 든다.

송도와 다대포의 뾰쪽 튀어나온 땅끝이 멋지다
부산남항, 부산항에 입항한 어선들은 죄다 여기서 생선을 이륙시켰을 테다, 고인이 된 Y의 삶터였던 공동어시장을 찾느라 한참을 머뭇댔다
정상 할매바위 옆에서 수호수가 된 소나무의 멋들어진 폼

그의 재배법과 저장법은 주민들에게 전수되고 우리의 식량자원의 한 축을 담당케 되었다. 부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구마 재배지가 됐음을 조엄이 1763년에 쓴 해사일기(海擄日記)에 나온다. 오늘날 헤외출장 뻔질나게 하는 공무원들 관광에 정신 팔려서 귀국시 남의 보고서 빼겨 재출하지 말고 조엄 본받았음 싶다. 자봉을 향한다. 눈앞에 감만 컨테이너 터미널과 그 뒤로 오륙도가 제법 또렷하게 얼굴을 내민다. 여기서 보니 5개의 섬은 확연하다. 발아랜 한국해양대학교가 있는 조도가 알몸으로 다가서고. 감만만엔 화물선들이 깊은 오수에 빠졌나 꿈쩍도 안한다. 낮잠 자봐야 꿩 너만 춥다. 이래저래 경비만 더 나간다. 참 그런 생각하는 내가 푼수인가?

놈이 심심할 것 같아 잠시 동무가 된 필자
통치마를 입고 고개 갸우뚱한 할매바위 (봉래산 정상)
이 인증사진을 선물한 어느 이름모를 산님께 감사드린다
▲부산항, 부산대교가 반토막이 됐다▼

손자(손봉)놈을 향해 잰걸음 질하는데 울퉁불퉁 바위길 난이도가 여간이 아니다. 급살 맞은 하강 길은 암송의 연애질로 짬짬이 간장을 해소시켜준다. 바다를 낀 섬 트레킹의 멋과 맛은 내륙의 산들과는 차원이 다른 옹골참이 있다. 고도가 낮아도 가파른 바위섬이란 태생적인 한계와 깊숙한 골짝의 다양한 수목군(樹木群)들이 빚는 생태의 오묘함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가 있다. 평일이어 설까? 이 멋있는 산길에서 마주치는 산님이 다섯 분이었던가? 내가 급경사 날머리 길을 내려오는데 나보다 연상일 노인과 마주쳐 반갑게 인사를 했다.

감만 화물선 터미널
감만터미널-오륙도-조도가 한 눈에 펼쳐진다
부산항과 부산대교 & 영도시가지
조도와 한국해양대학교 전경

 “반갑습니다. 오늘 산행 중에 세 번째 뵙네요. 늦게 나섰네요? 길도 험한데~!”가쁜 숨을 몰아쉬는 노인께 묻지도 않은 말을 나는 씨오리고 있었다. “집에 있는 것 보단 낫지요. 가다가 못가면 되돌아옵니다. 고맙습니다.” “예, 조심하세요.” 지나치다 나는 되돌아봤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노인장의 폼은 든든해 보였다. 연세가 얼마나 됐을지 모르지만 나도 저 노인마냥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해 봤다. 노인장은 바로 아랫마을에서 살면서 좀 편한 둘레길 보단 험한 트레킹코스를 부러 택한 까닭을 알 듯 싶었다. 속맘으로 박수를 쳐 응원하고 팠다.  기분 좋은 하루다. 여행의 진수는 낯선 것들과의 스킨십이다. 그 낯섬에서 나를 본다.     2024. 05. 17

대마도가 신기루처럼 보인다
송도, 다대포, 을쑥도가 파도처럼 남해로 치닫으며 겁박한다
정상바위를 치장한 찔레꽃이 아마 때를 놓친 게을뱅이지 싶고 산꼭대기에 매파가 올런지 갸우뚱 했다
오륙도에 대해 늘 회의적이었던 난 봉래산에서 그 실체를 확인했다
나는 여기서 아들놈과 손자놈을 찾아 내려갈 참이라 흥얼댔는데 그 길이 장난이 아닌 급경사 코스였다
측백나무 숲
자봉에 서니 조도의 한국해양대학교는 한꺼플씩 벗어 재켜 실체를 뵈줬다
감만만과 이기대 공원
바위무덤 꼭지에 있는 멋들어진 소나무를 체포하려고 무던히 여쉈는데 놈은 근접할 자리를 끝내 내주지 안했다
이정표를 앞세운 오리나무 숲, 모조리 이파리를 뜯겨 5월의 신록을 도둑맞아 안타까웠다
송도해안
두도와 다대포전망대 앞 바다
송도와 감천항
오륙도와 감만항 방파재
송도
태종대가 가물가물 보인다
감지해안
사자바위
암송의 연애질은 결국 석부작이란 예술품으로 태어나는가 싶다. 그 척박함 속에서 새싹도 무성하다
▲빠개져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바위를 방치(?)하다니~. 아랜 아파트촌이다. 주민들은 알고 있을까? ▼
동백숲길
맹감덩쿨은 작년도 빨간열매와 금년 초록열매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열매 따먹던 어릴적 생각이 났다. 아니 근래엔 새순을 따서 무침나물로 식욕을 돋구었는데 맛 보다는 자연산 새싹이라는 신선함이 도회지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했지 싶다
흰여울전망대-백련사-둘레`정상갈림길-354고지-정상-할매바위-자봉-손봉-절영초교 = 빨간선이 주행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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