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과 조선호텔


오후3시에 조선호텔 1층 라운지에서 만나 와인 한잔을 하다가, 퇴근 때 앨`내외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다면서 승용차를 보낸다는 율의 전화를 받고 울`부부는 서둘렀다. 참 오랜만에 찾는 조선호텔이었다. 1층 베이커리 카페는 환구단이 빤히 보이는 명소다. 그 환구단(圜丘壇)을 어쩌다보니 여태껏 자세히 탐방하질 못했다. 와인을 마시다가 층마다 8각 지붕을 올린 3층의 멋진 황궁우(皇穹宇)의 매력에 빠져 호텔을 나섰다. 오늘 일별(一瞥)하기 절호의 찬스란 생각에서였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壇)이다.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기 때문이다. 황궁우는 고종황제가 제천의례를 행하던 곳으로, 현재 황궁우와 3개의 돌북, 그리고 석조 대문만이 남아 있는데,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터에 지은 3층의 원형 제단이다. 당시엔 경운궁에서 빤히 보일 언덕이었는데 지금은 마천루숲속의 기이한 유물로 찾는 이도 별로이지 싶다. 마천루 숲에서 출입로 찾기도 헷갈려 관심 밖이 된 터일 것이다.




남별궁은 선조 26년(1593)에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이 주둔한 이후 중국사신이 머물던 곳인데 그곳에 환구단을 세운 뜻은 중국과의 주종(主從)단절 및 대한제국의 독립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최고 도편수였던 심의석이 설계, 10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돼 10일 만에 완공했다. 8각의 황궁우는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외부에서 보면 지붕이 3층이다. 3층은 각 면에 3개씩의 창을 냈으며, 천장의 발톱이 7개인 두 마리의 칠조룡(七爪龍) 조각은 황제를 상징한다.




북[石鼓]는 1902년 황궁우 앞에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제천을 위한 돌북 악기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무늬가 있다국가적인 제천의례는 삼국시대부터 정월에 시행되어 존폐를 되풀이하다가 세조3년(1457)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다 1416년 중단된다. 현재는 1899년(고종)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 환구단의 황궁우와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화려한 용무늬 석고 3개가 남아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황제(高宗皇帝)는 황룡포(黃龍袍)를 입고 황금색가마를 타고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앞세운 채 환구단에 섰다. 천지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황제등극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 순간부터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왕후와 왕세자를 황후와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예로부터 천자라 한 중국이나 천황이라고 한 일본과 대등한 황제의 위용을 과시하며 서구열강을 향해 독립국가임을 천명했던 정치적ㆍ역사적인 의미를 담은 의식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핑계로 대한제국의 성역(聖域)인 환구단을 1913년에 철거하고 그곳에 철도호텔을 짖고 '황궁우'만 남았다. 해방 후 철도호텔 자리에 웨스틴 조선호텔이 세워졌다. 환구단의 정문은 호텔정문이 되었고, 제사 때 황제가 머물던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호텔의 음식점 및 연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철저히 철거되어 건축자제로 여러 곳에 사용됐는데 다분히 정책적인 흉계였다. 그런 비극적인 애환의 환구단을 오늘 맘먹고 순례함이다. 2024. 03. 15


상천(上天)의 덕은 무성(無聲)이며 / 생물이 그로 인해 살아갑니다.
나라의 근본은 식량에 있으며 / 사람이 그로 인해 살아갑니다.
봄을 맞아 수확을 기대하며 제사 드립니다. / 상제(帝)의 은혜가 아니면 민(民)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고려왕조의 시상제 축문> -이규보 지음-

















'느낌~ 그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축제의 날이 온다 (1) | 2024.03.30 |
---|---|
2천명 의대증원 발표에 부치는 글 (0) | 2024.03.22 |
NYT 1면에 등장한 김건희 여사와 디올백 (0) | 2024.02.03 |
물 없이 사는 우아한 게레눅 (0) | 2024.02.01 |
마리 앙투아네트와 김건희 (1) | 2024.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