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친구의 사부곡(思婦曲)에 부쳐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볼 수가 없다는 절망일 것이다”
지난 1월18일 한 달 내내 벼르던 문상(問喪)길에 고향에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어제 쏟아지던 강설(降雪) 끝에 길 잃은 눈발이 차창에 달라붙다 버스가 남행을 할수록 뜸해진다. 한 달 전에 친구부인의 부음(訃音)을 접했지만 영광(靈光)지방의 폭설로 차일피일 미뤘던 조문(弔問)길이다. 영광터미널부근 식당에 지우들 여섯이 모여 환대해줘 조문길이 희열의 자리가 됐다.
집을 나서며 상주(喪主)Y와 친구B에게 전활 했기에 전혀 예상 못한 자리라 감개무량하고 고마웠다. 모두들 6년여 만에 해후하는 자리여서 기뻐 날뛰어야할 텐데~? Y가 눈시울을 붉히면서 글썽인 채 내민 손을 잡은 나도 눈물을 훔치며 잠시 외면해야했다. 본시 까무잡잡하고 까칠한 Y가 굵은 주름살에 흘리는 눈물은 부인에 대한 애틋한 정과 미련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인의 급서(急逝)에 대한 자책감과 원통함이 눈물이 되어 나와 동숙한 2박3일간 내내 흐느끼고 있었다.
50여 년간 동고동락한 부부의 삶의 터울 - 집과 가재도구와 농장과 우사(牛舍)와 창고가, 마을과 주변 환경이 눈뜨면 보이는데, 새록새록 생각나는데, 진하디 진한 애환의 추억으로 떠오르는데, 그 많은 기억들을 무심하기 버거울 터다. 그나마 눈물이 그 모든 애통함을 달래는 카타르시스지 싶었다. Y와 그의 부인은 태어난 그 자리, 그 동네를 멀리 벗어나질 않고 평생을 살아오면서 모범적인 낙농가를 이룬 입지의 터전이다.
더구나 Y는 6.25때 아버님을 여위고 어머님을 모신 혈혈단신으로 가난에서 오늘의 보금자리를 일군, 그 지난한 세월을 동반해준 아내에 대한 애정을 어느 부부도 감히 상상도 못하리라. 나는 십여 전 농번기에 일손을 보탠답시고 며칠간 Y의 집에서 머물면서 그들 부부의 일상을 엿봤었는데 그들 부부는 전형적인 농사꾼 - 참 농민의 표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Y를 연민하게 되고 그가 부르면 기꺼이 응했다.
참 농부 - Y부부는 슬하에 1남5녀를 뒀고, 그들 다 모범적인 사회인으로 부모와 사회에 효행하고 있다. Y의 집안은 자녀들이 가져온 선물들로 어지럽다. 내가 얼른 느낀 건 Y는 청소와는 담 쌓았지 싶어 아쉬웠다. 하긴 우사와 농장을 돌보느라 청소할 짬도 없을 테다. 게다가 젊은이가 없는 마을에서 Y는 마을주민들의 도우미고 그의 농기계는 마을의 공용이나 마찬가지여서 다른 데에 신경 쓸 여지가 없을 만큼 바쁜 일과를 살고 있었다.
Y가 부엌의 조리기구들을 어떻게 쓰는지, 밥은 어떻게 짓는지도 모른다는 걸 이번 2박3일간의 동거에서 인지했다. 그렇기에 부인생각이 더 절절할 터다. 부인생각이 떠오르는 건 전부 치웠다지만 그가 그곳 집과 농장과 마을을 떠나기 전까진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빨리 각오해야 한다. 나는 그가 애들의 요청에 응한 나머지 모든 걸 정리하고 도회지 자녀들 옆으로 이사 가는 걸 극구 말렸다.
모든 일거리를 정리하고 편하게, 오직 건강을 챙기는 삶과 운동에 전념하면서 지금 그 자리에서 부인의 체취를 느끼며 사는 게 현명한 노후생활이 될 거라고 조언해 줬다. 그가 부인의 급사에 책임이 있는 영광병원을 상대로 재기할까말까 번민하는 의료소송에 대해서 체념할 것을 권고했다. 그의 부인은 토욜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서 복통을 느껴 담날(일욜) 아침 구급차로 영광병원 응급실로 옮겨 진찰을 받았으나 당직의사가 방관한 채 의식불명상태로 하루를 허비했단다.
월욜 아침에야 전문의가 광주종합병원으로의 전원을 주문하여 광주조선대병원에 이송했을 땐 포도시 온기만 느낄 상태였단다. 배설을 못해 가스가 차고 부패하여 장기가 파손 돼 회생불가 - 괴사(壞死) 했단다. 어제 영광병원에서 빨리 조치를 했으면 능히 살수가 있었을 원통한 죽음이었다. 골든타임은 일욜 아침이었다. 하여 Y는 자기가 멍청하고 무능해 죽였다고 자학하고 있었다. 영광병원에서 통증을 말해준 게 최후의 대화(?)였으니 Y의 자책과 분통은 상상을 절한다.
어찌 영광병원 응급실의 담당의사를 힐책(詰責)하지 않고 애통함을 달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의료소송을 감당하려면 지난한 여정과 분노심 탓에 스트레스생활이 야기할 부작용은 Y가 감내할 고역인 것이다. 마음 불편하게 하는 건 무조건 내려놓아야 나머지 인생 편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욕심을 버리는 지혜와 행복만을 추구해야 한다. Y와 내가 2박3일간 동거하면서 무수히 나눈 씁쓸한 흉금털이의 대안(代案) 이였다. 우린 언제 다시 만날까?
그는 내일부턴 또 어떻게 애통함을 삭히며 건강한 의지의 삶을 영위하는 용기를 발아할 수 있을까? 비 추적추적 흩뿌리는 영광터미널에서 눈물 머금으며 배웅한 Y의 애잔한 뒷모습이 아른댔다. 그의 지근거리에 지우 B가 살고 있어 위안이 된다. B는 2박3일 동안 부식을 마련해 매일 찾아와 Y의 지팡이가 되고 있었다. 불편한 자신의 몸도 지팡이에 의지한 채---. 6여년 만에 만나 오만 흉금 다 털어 박장대소한 지우들의 성의도 고맙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모두가 건강하길 기원한다. 2024.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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