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시간 ①

가족의 시간 ①

어제 오후 늦게 타이베이에 사는 큰애네 식구가 도착했다. 여름방학을 기해 네 식구가 귀국한 건 5년만이다. 아낸 손자들을 맞는답시고 요 며칠간 맘도 몸도 바빴고 나도 덩달아 맘이 싱숭생숭했다. 내 어릴 때에 여행은 외갓집이나 누님 집에 간다는 게 유일한 방학 때의 이슈였다. 어쩌다 차가 지나가면 뽀얗먼지로 뒤덮이는 신작로와 초록들판을 구불구불 이어가는 시골길을 걷는 여행(?)의 정취는 다시 재현하고 싶어도 이젠 불가능한 아련한 로망이 됐다.

두 손자들의 저녁식사를 시골풍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택한다고 찾은 '서문객잔'은 서대문음식거리 후미진 골목안에 있다

새우튀김과 닭튀김요리

 그런 기대와 설렘을 울`집에 온 손자들도 품고 있을까? 중`고교생이 되도록 도회생활의 메카니즘에 길들여진 그들이라 서정적인 시골의 정감은 상상도 못할게다. 그런 생각들은 가난했지만 옛날 시골생활이 인성을 살찌우게 했지 싶어 각박한 현대의 손자들이 짠하단 생각도 들었다. 큰애식구들이 도착하자마자 우린 서대문음식거리 퇴락한 골목 안 식당 ‘서문객잔(西門客棧)’에 들어섰다, 몇채의 폐가들이 식당으로 리모델링 된채 외양은 옛 시골집 분위기를 풍겨 택한 장소였다.

야채요리와 비빕국수, 국수발이 흐물흐물 물러터져 한 입 먹다가 자릴 떴다

새우튀김과 탕수육은 그런대로였으나 비빕국수 면발은 물러서 어떤 식감도 못 느껴 그냥 일어섰다. 테라스에서 담장이넝쿨로 휘장한 시골집정취만 맛본 셈이 됐기에 애들한테 미안했다. 우리는 시간차 여독을 생각해 일찍 귀가했다. 두 손자에게 안방침대를, 큰애부부에겐 작은방을, 울`부부는 거실에 침구를 깔았다. 상전(上典)은 두 손자다. 각자 침실을 쓰던 넓은 공간생활에서 갑자기 비좁은 외갓집에 옹색하게 적응하며 버텨내야 할 생활이 나름대로 보람찬 여행이 될련지 의심스럽고 한끗 미안해서였다.

덕수궁돌담길

덕수궁돌담길은 울`집에서 가까워 시내외출시 부러 산책길로 이용한다

풍요로운 여행보단 고생한 여정이 진한 추억으로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면 내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삶을 굳이 합리화 시킴일까? 앞으로 한 달간을 비좁은 공간에서 땀내 맡으며 아등바등 붙어사는 게 식구란 걸, 끈적끈적한 유대감이 가족의 터울이란 걸 애들이 체감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게 손자들이 이번 여행에서 얻는 귀한 혈연체험이고 인성교육이 되길 바란다. 오늘 아침엔 율과 앨이 합세해 여덟 식구가 덕수궁돌담길 정동극장 옆 ‘roundnd'에서 커피와 빵으로 아침식살 했다.

빵과 커피 전문집인 Roundnd

간편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독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며칠 후엔 덕수궁을 관람하면서 우리나라근대사 얘기도 하자고 아내가 제안했다. 근데 애들이 정작 우리나라의 근세사에 흥미를 느낄지? 외국에서 교육받는 초`중등생이, 짬만 나면 휴대폰에 매달리는 애들인데 말이다. 아낸 애들이 오기 전부터 나더러 고궁관람을 시키면서 수박 겉핥기일망정 역사얘기를 해주라고 권유했었다. 애들이 좋아하던 아니던 고궁관람은 한 번쯤 할 참이다. 역사를 견문하다기 보단 고궁을 구경했다는 관광이라도 좋다.

울`식구들은 음식주문할 때 한 번에 넘 많이 시켜 테이크아웃 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아침에 빵도 그랬다

정동극장 옆 Roundnd 빵과 커피는 일품이라 늘 손님이 많다

시청 앞에 들어서자 태평로를 뒤덮은 시위군중과 진압에 나선 전경들과의 대치국면은 소음난장판이 됐다. 일본의 후크시마 오염수 방출에 정부는 뭣 땜에 동조하여 국론을 분열시키면서 혈세낭비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설마 마셔도 될 오염수라면 일본인들이 음용하고, 이어서 세계가 괜찮다고 수긍할 때 뒷북쳐도 될 일을 말이다. 총리는 어쩜 일본정부의 대변인 같다는 소릴 들으면서 국민들을 편가르는 귀중한 시간낭비와 경제적 손실을 자초할 사안인가?

정동극장, 코로나팬데믹 직격탄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을 터

타이완정부는 반대여론에 입도 뻥긋 안 하는데, 일본주변국들이 반대하는 오염수 방류를 왜 한국정부만 ‘괴담’이라며 일본 편드는지 모르겠다는 애들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선진국이란 말 듣는 한국이 정치는 후진국수준 같다는 애들의 조소가 서늘했다. 명동에 들어섰다. 애들의 운동화`티셔츠 매장에서의 쇼핑 트렌드를 지켜보는 나는 세대차의 괴리를 통감해야했다. 애들의 쇼핑에 걸림돌이지 싶은 나는 점심약속도 있어 도중에 빠져나왔다.

서울시청 앞

둘째의 사무실 '소공 한국빌딩'  옆엔 조선호텔

명동입구

오후6시반, 나는 북창동 양미옥에서 다시 가족들과 합세했다. 저녁식사를 양미옥양곱창으로 예약을 했었다. 두 손자는 양곱창이란 음식이 금시초문이란다. 소와 양의 내장(창자)요리란 말에 얼굴 찌푸리면서도 어른들이 한사코 맛있고 영양풍부하단 예찬론에 침묵했다. 이윽고 대창과 곱창구이가 완료돼 한 점씩 씹기 시작한 애들은 오묘한 맛깔에 ‘엄지 척’을 몇 번이나 했던지!

▲신발과 티셔츠 쇼핑 중애 나는 자릴 떴다▼

손자들의 엄지 척에 화답하듯, 오랜만에 울`식구들이 먹는 곱창구이가 불티나듯 해 추가주문을 하다 보니 아홉 식구가 포식을 하고 남겨야 했다. 값비싼 양곱창을 예 일곱 점 남겨놓고 자릴 뜬 아내는 아깝다는 푸념을 했다. 손자들은 소나 양 창자에 어떤 식재료를 첨가해 그런 맛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식후감(食後感) 상찬에 밤거리가 떠들썩했다. 양미옥의 곱창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단골집으로 유명세 탈만큼 소문난 맛집이다.

태평로 시위대

남대문로를 따라 숭례문야경을 훔치며 대한상공회의소 옆길(세종대로7길)에서 이어진 중앙일보 앞 서소문에 이어진 밤길은 한적한 공원을 걷는 기분이 든다. 오피스빌딩숲속의 길은 밤엔 텅 빈 도심의 공동화를 엿보게 한다. 서소문고가로엔 페이스플레이스호텔과 옛날 울`집이었던 브라운스톤쌍둥이 건물이 우뚝 서있다. 브라운스톤에 살 때 초등생 윤이와 유치원생 현이 1년간 머물렀다.

시위장의 풍경, 사인하는 ~!

북창동 음식거리

싱가포르에서 살던 큰애가 관세사시험응시를 위해 1여년 국내에 머물면서 윤이와 현이도 국내전학생으로 울`부부가 돌보던 때였다. 그때 길 건너 페이스플레이스호텔 사우나수영장회원인 둘째의 카드로 울`식구들은 짬만 나면 호텔수영장에서 노닥거렸고, 특히 윤이와 현인 물 만난 물고기처럼 수영장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우린 호텔 앞 벤치에 앉아 그때 그날들의 추억을 되새김질 하면서 한여름 밤을 즐겼다. 세월 참 빠르다.

양미옥을 향해 북창동거리를 소요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애용했다는 양미옥,  대창구이▼

아침엔 윤이를 미동초교에 데려다주고 방과 후엔 다시 학교에서 데리고 오던, 데리고 오면서 아이스바 아님 콘을 하나 사주면 기뻐 신바람 나던 모습을 즐겼던 풋풋한 정경, 현인 내 등목을 타고 유치원스쿨버스정차장엘 가곤했던 - 벌써 십여 년 전의 기억저편에 알사탕처럼 남았다. 손자들은 어쩜 내가 늙어 왜소해진 몸뚱이 보다 더 훨씬 성장해 어른반열에 섰다. 아련한 기억은 나를 다소 슬프게 한다.

곱창전골

울`부부가 애지중지 애틋하게 사랑하는 마음과는 상관없이 두 손자의 마음은 온통 휴대폰속의 가상의 세계에 머물고 있나싶어서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학교수업과 휴대폰창이지 싶어 안쓰럽다. 휴대폰에서 쏟아지는 각종 정보의 바다는 그들의 성공한 사회인으로의 자양분이 될지는 모르되 적어도 감성과 인성을 풍요롭게 하는 멋있는 추억거리는 아니지 싶어서다. 다시 5년 후나 십년 후에 오늘 같은 온 가족이 모여 한여름 밤을 수놓고 있을까?

세종대로7길 빌딩 소공원은 한적한 밤풍경이 이채롭다

아름다운 밤, 2023년 여름밤이 무르익어가는 6월의 서소문로 빌딩숲은 아름답다. 그 황홀한 불빛 속을 울`식구들이 활보한다. 모레는 영광 부모님 산소엘 성묘키로 했다. 처제아들 영현이가 신형 스타리아를 빌려준댔다. 코로나팬데믹 핑계 대며 성묘 안 간지가 4년차인가? 손자들을 앞세우고 성묘 가는 길을 나는 벼르고 벼른 참이다. 잊혀져가는 조상에 대한 불효의 길을 내가 앞장서는 것 같아 부모님께 더더욱 죄송스런 삶이였다.                                 2023. 0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