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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오시리아 해파랑길

오시리아 해파랑길 - 시랑대,해동용궁사,오랑대, 대변항

해동용궁사 진신사리탑
곰장어촌해안

간밤에 내린 빗발이 만추의 타는듯한 갈증을 적시기는 했을까? 푸석한 흙길이, 쌓인 낙엽이 살짝 물기가 배어 호젓한 산길이나 해변을 소요하기 딱 좋을 날씨다. 문득 오시리아 해파랑길이 떠올라 집을 나섰다. 10시 반쯤 오시리아역사(驛舍)를 나서 기장곰장 어촌해변을 찾아가는 눈길은 어리둥절했다. 3년 전만해도 덩치 큰 롯데몰이 허허벌판에 기형적이었는데 어느새 신시가지에 둘러싸였다.

해국
▲스님은 어딜 가고 빈 절은 적막만 삭히고 있는가? 푸르른 쌍사철나무는 정자 앞에서, 빨간 감은 목 빼어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곰장어촌 해안 길은 시랑산을 휘둘러 시랑대에 올라서면서 해동용궁사 뒷담장 후문에 이르는 코스다. 군부대지역이라 상상의 나래로만 익혀왔었는데 해금(解禁)됐단 소식이 들려 초행길에 나섰다. 곰장어촌에서 시랑산해안길을 들어서며 산책 나온 주민에게 묻자 이미 폐쇄됐고 마을 뒤 우회 언덕길이 있단다. 밭두렁 언덕길은 해동용궁사주차장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송죽화(松竹花)문을 통해 대밭 길로 들면 우측에 용궁사 뒷담을 타는 공로(空路)가 시랑대길이라.

일란성 쌍사철나무는 정자 앞에서 망부목이 됐다. 근디 이렇게 잘 생긴 사철나무 이름을 몰라 낭패다
▲주차장 뒤의 해동용궁사와 시랑대 출입후문

관광객이 몰릴까봐 부러 어떤 이정표시도 안했지 싶었다. 시랑대 곶바위의 초소도 사라지고 출입구도 막았다. 용궁사 뒷담벼락의 총석바위에 새긴 ‘시랑대’ 앞 전망대서 용궁사~대변항에 이르는 아기자기한 해안절경에 빠져들었다. 시랑대는 동해의 노도(怒濤)가 영겁을 두고 씻겨낸 말발굽형의 절애(絶崖)다. 시랑대는 원래 원앙대(鴛鴦臺)라 불렀다. 원앙새처럼 아름다운 비오리가 원앙대 절애 아래서 떼 지어 날아다닌다고 하여 ‘비오포’라고 부른데서 기인한다.

후문과 이어진 조붓한 대숲길
시랑대는 용궁사담벼락을 타고 돈다

영조때 이조참의(시랑직) 권직(權樀)이 기장현감으로 좌천돼 부임하여 귀양살이하듯 유유하다 원앙대 바위에 ‘侍郞臺’라고 새기고 시제(詩題)로 삼아 시를 한 수 지은 데서 시랑대라 불렀단다. 시 한 수가 지명이 됐으니 필(筆)은 검(劍)보다 강함을 웅변함이다.

“귀양살이라 하지만 오히려 신선이 노는 봉래산을 가까이 두고 있다

‘侍郞臺’를 써서 푸른 바위에 밝혔으니…시랑대로 남으리라.”

시랑대 아래 시랑대만과 군초소 안테나
시랑대, 애초엔 원앙대였다

권직은 박문수가 영남어사로 있으면서 안동서원을 철폐하고 여색을 탐했다며 호남관찰사로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다(조선왕조실록 영조9년 1733년 4월 22일)가 영조의 미움을 사서 기장현감으로 좌천됐었다. 시랑대만(灣)을 부딪치는 파도의 신음은 권직의 한(恨)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느 스님과 용녀의 애틋한 사랑의 절규인가 싶었다. 그해 가뭄은 유별났다. 초목이 다 타들어가는 혹서에 마을주민들이 젊은 스님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달라고 간청했다.

시랑대의 돌탑

젊은 스님 미랑은 일주일째 버티다 원앙대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흡족해 하는 마을주민들을 앞서 보내고 미랑은 원앙대에 앉아 달빛이 녹아든 파도 춤과 요요한 절경에 도취됐다. 그때 원앙대 아래 혈암(穴巖)에서 선녀 같은 여인이 나오는 걸 보고 놀라 탄성을 지른다. 긴 머리의 여인은 미랑의 탄성에 위를 보다 수려한 용모의 스님과 눈빛이 마주쳤다. 첫눈에 반한 젊은 남녀는 원앙대에 앉아 얘기꽃에 빠지고 이내 사랑의 불꽃으로 번졌다.

돌탑 뒤로 힐튼호텔
해동용궁사의 십이지상

원앙대에서 남녀는 보듬고 열정의 밤을 태웠다. 그렇게 두 연인-미랑과 용녀는 보름달이 뜨는 날밤에 만나 사랑의 불꽃을 튀기다 용녀가 임신을 하게 됐다. 동해 용왕의 딸이 인간의 아이를 배선 안 되는 불문율은 용녀의 불행이기도 했다. 암튼 용녀는 홀로 시랑대에서 해산을 맞이하고 미랑은 바위 뒤에서 용녀의 애태움을 지켜봐야 했다. 해산의 신음소리를 들은 용왕은 진노하여 해일을 일으켜 용녀와 갓난애를 휩쓸려 가버렸다.

시랑산 골짝 배수로와 교통안전탑(우)
해동용궁사 일주문과 나옹선사 시비(우)

깜짝 놀란 미랑이 용녀와 애를 구하려 바다에 뛰어들었다. 용왕의 화풀이 파도는 미랑 인들 무사할 텐가. 용녀와 애와 미랑을 삼킨 파도는 이내 잠잠해 지고 달빛만 적요해졌다. 이 정경을 주시하던 옥황상제가 용녀의 사랑에 감동하여 천마를 바다로 내려보내 용녀와 애기를 하늘나라에서 살게 해줬다. 허나 미랑은 바다에서 구천을 헤매는 신세가 돼 보름달이 뜬 밤엔 용녀를 애타게 부르는데 원앙대의 파도소리에서 지금도 미랑의 절규가 들린다.

진신사리탑과 영월당(우)
용궁단과 원통문

용녀가 나왔던 혈암, 그 바위구멍을 들락거리는 미랑의 애타는 소리를 듣고 보는 시랑대만을 접근하여 일별할 수가 없어 아쉽다. 미랑과 용녀의 한 서린 파도는 오늘도 거품으로 시랑대를 씻어내고 있었다. 그 연인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시랑대의 엘레지와 빼어난 풍광은 중국까지 입소문 나서 중국의 저명한 시인묵객들이 해동국의 시랑대를 보고 죽으면 원이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일컬어지는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를 향한다.

광명전와불
용문석교

해동용궁사는 바다와 가장 가까운 절이라는 유명세도 치른다. 조선시대 기장은 승려들의 유배지였다. 태종은 등극하자 불교개혁을 단행했는데 1405년(태종 5년) 국가 지정사원을 제외하고 사찰전답과 노비를 환수해 국가에 귀속시켰다. 글자 승려 혜정(惠正)이 반기를 들었다. 그는 “내가 간직한 참서(讖書·주술적 예언을 기록한 책)에 의하면 승왕(僧王)이 개국하여 태평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태종 6년).

대웅전 삼존불

역모행위였다. 태종은 혜정을 잡아들여 유배형을 내렸다. 그를 참형하지 않음은 정승들이 ‘500년간 이어져 온 것을 개혁하면서, 중을 죽이면 반드시 뒷말이 있을 것’이라고 청했기 때문이었다(이조실록). ‘승왕의 개국’은 해동용궁사를 의미함일 테다. 용궁사는 언제나 인파에 휩싸인다. 불자(佛子)던 아니던 불토(佛土)에 중생이 운집하는 건 상서로운 길이다. 불음을 들어야 깨우칠 수가 있고 처처불상의 수행에 입문할 수 있어서다. 배산전해 속의 용궁사는 빼어난 불국토임을 확신한다.

용궁단과 원통문 뒤로 해수관음대불 입상, 우측에 비룡이 보인다.
쌍향수불전

고려 때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아침에 불공을 드리면 저녁에 복을 받는 신령스런 곳이다.”라며 토굴을 짓고 수행정진한 곳이 봉래산이었던바 용궁사자리를 말함이라. 사찰은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1970년 초 정암화상(晸庵和尙)이 관음도량복원을 서원하며, 기도 중에 관세음보살님의 승천을 꿈속에서 친견하여 보타산(普陀山) 해동용궁사로 개칭했단다. 암튼 해동용궁사는 사시사철 탐방객들로 몸살을 앓을 정도다.

해동용궁사 전경
해돋이 바위의 황금불상은 문득 미랑의 화신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 頌 曰 - 시 한 수 읊는다 >

“萬古蒼蒼無邊海  옛적부터 푸르고 푸른 끝이 없는 바다 위에

一朝光明遍照天  아침마다 붉은 태양이 온 우주를 비추도다

三佛入定滅海波  세분의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모든 파도 없어지니

衆生朝誠暮福地  모든 중생 누구나 아침에 기도를 하면 저녁에 복을 받는 자리로다 "

힐튼호텔을 향하는 오시리아해안의 파도소리는 바다의 낭만을 새삼 일깨운다
털머위

해동용궁사의 일출과 동해 망망대해에서 달려온 파도가 노을바위와 시랑대를 덮치는 물보라 풍정은 압권이다. 수평선 저쪽 해원의 사연들을 안고 오는 해풍의 속삭임은 만경창파 속에 일탈을 꿈꾸는 고독한 탐방객에게 세레나데가 된다. 해돋이바위의 황금불상은 미랑의 현상불로 용녀와 아이의 안녕을 기원하나 싶어 눈자위가 시큰했다. 사랑을 잃는 아픔은 그 비통함에 비례해 마음도 성숙해진다. 그래 사랑은 위대하다.

오시리아해변의 아난티 팬트하우스

파도 드센 거북바위동네를 지나니 오랑대(五郞臺)가 먼발치에서 아는 채를 한다. 3년 전에 찾아가 바위벼랑에 간신히 들어선 사당을 훑느라 방정을 떨었었다. 용왕신이 있다면 싸대기 한 대 맞았을 테다. 오랑대는 바다 새들의 쉼터요, 들 고양이들의 요람이며 여인들의 기도터였다. 본시 원앙대라 불렀는데 윤선도가 기장 죽성리에서 6년동안 유배생활을 할 때 친구 다섯 명이 찾아와 시음(詩飮)한 장소여서 오랑대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오랑대 넓은 상판은 쉼터로써 그만한 자리가 없을 테다.

패랭이 꽃과 야생쑥부쟁이
거북바위 동네

윤선도는 이이첨의 국정농단을 광해군에게 상소했다가 되려 이이첨의 역공을 당해 함경북도 경원으로 유배된다. 1616년 30세 때 유배돼 16년을 귀양살이 했던 것이다. 기장은 잔읍(殘邑·황폐한 고을)으로 조선시대 14번째로 많은 유배인을 보낸 곳으로 윤선도는 기장 죽성리에 적거(謫居) 했었다. 근처에 황학대(黃鶴臺)가 있는데 30여 그루의 소나무를 안은 누런 바위가 바다를 향해 학처럼 날갯짓한다고 부른 이름이다. 윤선도는 매일 황학대에 올랐다.

패랭이 꽃(하)
거북바위

대변항만은 오강처럼 생긴 천혜의 항구로 전국 멸치어획고의 60%를 담당한다. 울`식구들이 지난 5월에 왔을 때 입항한 멸치어선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털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해안 길 건너 용암초등학교는 얼마 전까지 ‘똥초등학교’라고도 불러 학생들이 창피해 했던 학교다. 애초의 ‘대변초등생’를 ‘똥초등생’으로 놀림을 받아 학생들이 개명운동을 벌려 ‘용암초등학교’가 됐는데 캠퍼스가 단아하고 정갈해 보인다.

오랑대 앞 해송군락지는 그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온전하게 성장한 놈이 한 그루도 없다.

‘똥초등학교’ ‘똥항구’란 웃기는 해학은 대변항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됐다. 대변항방파제에 올라서 항구를 조망하면 대변항이 얼마나 아름다운 미항인지를 실감한다. 시가지를 빙 휘두른 야산의 울긋불긋한 가을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병풍이라. 나는 방파제에서 입가심을 하며 그림 같은 대변항의 매력에 한참을 빠져들었다. 다만 사유지인 무인도 죽도를 지자체가 나서서 어떤 방법으로든 시민들의 휴식처로 개발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욕심이 솟구쳤다.  죽도에 들어서고 싶다. 울창한 원시 숲과 해안의 파도와 스킨십을 하고 싶다.                 2022. 11. 14

오랑대
대변항의 방파제와 등대
외톨박이 소나무에 기댄 등대가 넘 멋지다
동암항
동암항해변 산국밭에서 약초를 캐는 할머니, 관절염과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했다
죽도, 사유지로 애용됐으니 지금은 무인도가 돼 폐허화 되고 있어 안타까웠다
죽도를 잇는 다리, 그러나 이 다리와 죽도를 잇는 실질적인 길은 없다,
대변항 방파제와 등대
강태공과 동해어업관리단(건너편 건물)
대변항
죽도; 사유지로 무인도다. 신발을 벗고 바닷물을 건너야 되는데 통행금지 된지 오래됐단다. 어떻게 쉼터로, 힐링센터로 개발할 수 없을까?
해물포장마차촌,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휴업상태였다
해녀촌 해물포장마차에서의 푸짐했던 한 상차림(지난5월)
죽도와 방파제로 대변항은 어항 같은 천혜의 항구다
건어물센터
활어위판장과 동해어업관리단
대변항포구
용암초등학교, 옛 '대변초등학교'를 '똥초등학교'라 부르는 통에 학생들이 교명 개명운동 끝에 용암초교로 바꿨다
대변항 상징물 - 멸치
공수항에서 대변 해녀촌까지 빨간 선이 오늘의 트레킹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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