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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창덕궁의 만추(晩秋)

창덕궁의 만추(晩秋)

낙선재 뒤 전각 승화루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응봉자락에 1405년 태종이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은 조선의 궁궐이다. 응봉자락의 지형을 살려 배치한 궁궐은 정자와 연못과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으로 자연친화적인 한국형 정서가 물씬 배어나 사시사철 탐방객들로 붐빈다.

숙장문 용마루끝의 단풍
칠분서와 삼삼와

서울을 에워싼 멋들어진 산세가 사계(四季)를 담아내어 아름다운 수도서울을 선사하지만, 도심에 있는 창덕궁은 사계의 진수를 암때라도 찾아가면 기다렸다는 듯 시시각각 연출해 우릴 행복케 한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 여차하면 창덕궁을 찾는다. 계절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게 하는 창덕궁이 가까이 있다는 건 나에겐 커다란 행운이다.

▲통명전의 단풍, 주변에 장희빈이 인형왕후를 저주하는 흉물을 묻었던 곳▼

올해 단풍도 다 사그라질만한 오늘 오후 나는 늦깎이 창덕궁탐방객에 나섰다. 고운 단풍이 낙엽으로 수북이 쌓인 고궁을 소요하며 아직 울긋불긋한 단풍이 흐드러진 후미진 곳에서 만추의 서정에 취한다. 낙엽을 밟는 소리, 단풍이 낙화하는 공기의 파장(波長)과 바람소리, 춘당지의 삼차원그림 데칼코마니에 빠져드는 낭만은 창덕궁만의 은전이다. 창덕궁은 언제 찾아가도 나를 열락케 한다.     2022. 11. 20

성종태실과 태실비

 조선왕실에서는 왕손이 태어나면 명당지를 찾아 태항아리를 묻어 보존하였는데 창덕궁을 세운 성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선지 성종의 태실을 이곳에 옮겼다

▲성종태실주변의 단풍▼
▲춘당지와 단풍▼
▲춘당지의 데칼코마니는 변화무쌍하다

 위쪽 작은 연못이 춘당지였다. 연못의 원래이름은 내농포로 국왕이 궁궐 안에서 직접 영농의식을 행했던 곳이었다. 1909년에 일본이 이곳을 연못으로 확장했했고 해방 후에 우리전통식의 연못으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관광객이 젤 많이 찾는 창경궁의 아이콘이 됐다.

원앙들의 아지트였는데 오수에 들었는지 오늘은 인사할 줄을 모른다
▲춘당지와 후원의 경계 담장주변의 단풍▼
위쪽 연못(원조 춘당지)
▲대온실 주변의 단풍▼
대온실
▲대온실단풍과 추국▼
▲관덕정과 주변의 단풍▼

관덕정은(觀德亭) 누에 치던 곳이었다. 인조 때 활궁터인 사정(射亭)을 지어 취미정(翠微亭)이라 불렀으나 현종 때에 관덕정으로 개명했다. 관덕정 아래 넓은 뜰에선 군사들이 활쏘기와 말타기 연습을 했다. 근래에 들어선 고양이들이 관덕정의 주인행세를 한다. 놈들도 여기가 사냥터로 그만이란 걸 아는가?

▲찍사와 고양이 & 관덕정의 단풍▼
▲자생식물정원의 단풍▼
▲월근문주변의 단풍▼
춘당지
춘당지
춘당지
백송
▲관리사무소부근의 단풍▼
낙선재담장
▲월근문주변의 단풍▼

 홍화문 북쪽에 있는 월근문(月覲門)은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廟)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 3)에 건립하였다. 매달 초하루 참배행차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였기에 월근문이라 이름하였다.

왕이 신하들과 경연을 여는 함인정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물은 사방의 연못에 가득하도다.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 구름은 뭉게뭉게 기이한 봉우리를 만들었구나.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 가을 밤 휘영청 밝은 달은 유난히도 빛나는구나.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겨울 산마루의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돋보이는 구나.

                                                                  함인정에 걸린 <도연명 사시(四時)>

숭문당 앞 주묵, 숭문당은 왕이 경연을 연 곳으로 영조는 종친이나 성균관 유생들을 접견하던 장소였다
함인정과 향나무
▲낙선재와 창경궁의 담장▼
경춘전의 굴뚝
환경전 앞
통명전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장희빈이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어 인형왕후를 저주하다 발각돼 사약을 들었던 역사의 장소다.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샘물이 마당으로 넘치는 걸 막기 위해 연지를 조성했다.  

오층석탑부근의 단풍

지척에 있는 문정전 앞뜰에서 뒤주에 7일간 갇힌 채 아사한 사도세자의 비명이 유난히 검붉게 물들었지 싶은 단풍숲을 거닐며 그날의 비애를 상상해 봤다. 사도세자도 당파싸움의 희생물이었다. 편 가르는 정치는 지금도 목하 진행 중인데 우린 뭣 땜에 그치들을 뽑곤 할까? 담 총선 때 걸러내지 못하면 쪽팔려서 어쩌나!   

양화당 뒤 풍경

영화당은 인조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청태종한테 치욕적인 항복을 한 후 환궁하여 머문곳으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한 곳이다. '강화도 나뭇꾼' 임금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풍기대 앞의 단풍나무
후원입구
희우루
성정각 뒤창문을 통한 조화어금
낙선재 앞 정원
낙선재 삼랑정
▲한정당▼
금천
희정당 후원

희정당(熙政堂)은 왕이 평소에 가장 많이 머물렀던 집무실 이라.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연산군이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옛 정취는 사라지고 지금은 내부를 쪽마루와 카펫,유리 창문,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몄다.

함원정
▲대조전후원▼

대조전(大造殿)은 창덕궁의 왕비침전(寢殿)이며 생활공간이다. 주변에 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그 중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낙선재

1847년 헌종은 경빈(慶嬪)후궁을 맞아 낙선재와 석복헌(錫福軒)을 지었다. 낙선재(樂善齋)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다. 역대 왕들 중에서 후궁을 위해 궁궐을 지은 헌종의 석복헌은 인도 타지마할궁을 연상케 한다.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부인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하여 1632년에 지은 아름다운 궁전말이다. 검소하고 순박했던 헌종의 순애보가 찡한 울림이 됐다.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궁궐이다

인정문 뒤로 인정전 & 숙장문(우)
양쟈당
양자당에서 본 인정전 뒷담
만수문
양지단 앞 마당에서 본 인정전지붕
▲구선원전 풍경▼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숙종때 선원전이라 했다.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간결하고 소박한 건물로 왕실 제사용건물로 쓰였다

진설청
금천교와 귀목

금천교(錦川橋)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의 돌다리다. 명당수를 금천(禁川)이라고도 하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 화강석으로 멋들어진 돌다리를 설치함에 이름하여 금천교다. 태종(1411년)3월에 축성된 다리는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전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창덕궁 돈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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