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의 만추(晩秋)
지금쯤이면 소요산은 활활 불타고 있을 테다. 가을이면 매번 소요산이 불타는 화톳불의 절정을 놓치곤 했던 나는 오늘 집을 나서며 그렇게 점괴(苫塊)를 봤었다. 일요일11시, 소요산역전은 미어터졌다. 울긋불긋 차려입은 관광객들은 울긋불긋 불타는 소요산의 불소시게 마냥 소요산입구로 빨려들고 있었다. 단풍향연에 신음하면서 갈수(渴水)로 뭉텅뭉텅 메말라버린 고엽(枯葉)에 한숨짓는다. 단풍이 고엽으로 쭈그러들면 참으로 허접하다.
소요산 깊은 골짝의 물길도 포도시 흉내만 내고 쌓인 낙엽이 갈색물길을 냈다. 하여도 단풍은 소요골짝을 이쁜 꽃터널을 만들어 황홀경에 이르게 한다. 일주문을 통과 원효굴과 원효폭포 앞에 섰다. 찔끔찔끔 흘러내리는 폭포수는 원효굴에서 누가 기우제(祈雨祭)라도 올리기를 염불하나 싶었다. 구절터를 향했다. 골짝을 파고 오를수록 단풍은 고엽으로 차환된다. 구절토가 어째 스산한 건 갈색고엽 때문만은 아닐 테다.
큰소리로 고함치면 메아리 맥놀이로도 소통할 수 있을 서방님께서 수도정진 한다고 움막에서 두문불출하니 섭섭한 감정 어찌 없으리오. 원효스님은 저편골짝 자재암에서 가부좌 틀고 있었다. 요석공주가 서라벌 요석궁은 나와 물어물어 찾아왔는데 외면하자 공주도 구절터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공주의 기도는 무슨 뜻이었을까? 원효의 성불을 기원함이었을까? 아님 청상과부 가슴에 불지펴놓은 애증의 갈구였을까?
원효의 성불을 기원하는 기도였다면 요석궁이 더 편리했을 것이다. 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불 지핀 열정 탓에 천리 길을 물어왔을 터다. 그 발길을 무색케 한 원효스님은 요석공주한테는 독종(?)이다. 요석궁에서 공주와 사흘간 천당지옥을 내왕하느라 숨넘어갈 땐 언제고, 예까지 찾아 온 애인을 푸대접하는 건 무슨 불심(佛心)인고? 여인의 가슴에 사랑의 불 지폈으면 고엽이 되도록 달궈야 함이다. 원효스님은 에고이스트였지 싶다.
드넓은 공주봉에 올라섰다. 애증도 다 태워버린 요석공주의 텅 빈 마음은 애써 올라선 산님들을 모두 품어 편히 쉴 수 있게 한다. 산 정상 넓이가 공주봉만한 데가 있던가? 요석공주 품에서 심호흡 하곤 의상대(義湘臺)를 향했다. 급살 맞게 가파른 데크계단이 아찔하다. 우측에서 포천시가지가 숨바꼭질을 한다. 소요산에서 젤 높은 의상대도 데크를 깔았다. 편리해 좋긴 하지만 산 정상까지 나무판을 깐다는 게 결코 잘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나한대(羅漢臺)에 올라섰다. 아까 오른 절벽위의 의상대가 한 폭의 그림처럼 멋지게 다가선다. 칼바위능선을 밟고 선녀탕 계곡으로 하산한다. 5부능선 위의 단풍은 몽땅 고엽상태라 골짝산행을 할 요량이라. 선녀탕 골짝의 단풍은 고왔다. 골짝에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은 단풍을 더욱 화사하게 채색시키고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아 소요산의 만추에 녹아들었다. 사람도 나이 들면서 단풍처럼 곱게 늙어감 좋겠다. 고엽이 되고 낙엽이 되는 그 순간까지 곱디곱게 말이다.
자재암(自在庵)에 내려섰다. 촛대바위는 언제나 위풍당당한데 옆의 청량폭포는 기세가 약하다. 원효스님이 움막에서 수행하던 어느 날밤 장대비를 피해 움막을 노크하는 여인을 맞는다. 젖은 옷을 말리는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려 움막을 나와 청량폭포에 뛰어든 스님, 그 뒤를 따라 뛰어든 여인과의 실랑이를 상상해봤다. 이미 요석공주와 파계를 한 스님인데 나신의 젊은 여인의 유혹은 내쳤을까? 여명이 트자 여인은 사라졌다. 원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기에 세운 암자가 자재암이라.
다시 원효폭포수 앞에 섰다. 좋은 자린 상추객(賞秋客)들 차지다. 포도엔 한껏 치장한 관광객들로 요란스럽고 골짝을 훑는 가을바람은 단풍잎을 날려 꽃비를 뿌린다. 소요산단풍이 왜 회자되는지를 절감케 한다. 하루가 아니, 단풍속의 소요를 밤낮이 없이 며칠간 이어가면 싶다. 소요산의 단풍소요는 주름진 마음을 펴고 낭만까지 가득 채우는 힐링의 시간이다. 네 시간의 소요가 거뜬하다. 그냥 단풍 숲에 주저앉고 싶었다. 행복한 하루~! 2022.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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