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강씨(晋州姜氏) 추향제(秋享祭)에 가다
- 강시(姜蓍).강회백(姜淮伯).강회중(姜淮仲).강석덕(姜碩德)선생 추향제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능말[陵洞, 安月里]의 이름은 진주 강씨(晋州姜氏)의 묘가 많아 명명됐단다. 강석덕의 묘 아랫마을은 진주 강씨 집성촌이었는데 1945년 해방 후 38선 획책으로 북한공산치하가 됐다. 6.25전쟁 후 행정권이 수복돼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민간인이 살지 않고 출입영농만 가능한 민통선 지역이 됐다. 엊그제(음10월2일)깨복쟁이 친구 C와 J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서 시행하는 추향제에 난생 처음으로 참례했다.
C와 J는 바쁜와중에도 몇 번쯤 참례한 참한 후손이란 생각에 자조감이 든 나는 고마워 하며 뒤따랐다. 연천군 능촌[陵洞] DMZ구역 진주 강씨 선영에서 恭穆公(시 蓍), 通亭公(회백 淮伯)), 통정공배위 정경부인 성주이씨, 戴慜公(석덕 碩德) 세 분 선조님을 기리는 시제는 음력 3월20일 춘향제와 음력 10월2일 추향제가 있단다. 오늘 추향제에 200여명의 후예들이 모여 엄숙이 거행됐다. 통정공은 고려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고 조선시대 명신 강희안, 강희맹의 조부이다.
공목공 강시(姜蓍)는 공민왕6년 성균시에 등제하여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던 박사공(博士公)6세손으로 슬하에 통정공(通亭公), 통계공(通溪公), 소감공 회순, 재신공 회숙, 진원군 회계, 5형제를 두었는데 진주강씨 후손들은 이를 오룡(五龍)으로 부르고 있다. 공목공 묘소는 연천 임진강지류인 사미천을 거슬러 올라 DMZ 북방한계선에 위치한 장단군 황학산에 있단다. 하여 강내리 묘역에 세운 단은 가묘다.
그 공목공의 가묘 옆에 동생 양희공 강서의 묘가 있고, 5룡의 묘도 묘역에 같이 있어 남북분단으로 DMZ안에 이들 7기의 묘역이 있게 된 게다. 하여 후손들이 쉽게 선조의 묘소를 참배할 수 없는 아픔을 오늘 진주강씨 박사공파 후손들이 추향제를 거행하며 통절함이라. 그래도 묘역에 사당과 기념각 등이 단아하게 건립되고 그런 청정한 모습을 참배하는 후손들에겐 다소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추제는 제각 옆의 묘소에서 엄숙하게 행해졌는데 묘주인인 선조에 대한 무지(無知)의 나로썬 시건방진 말이지만 그냥 흙무덤을 향해 올리는 재배 이외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님이라. 다만 선조에 대한 경외심만은 좀은 있었다할까? 묘주(墓主)에 대해서 최소한의 약력이나마 알고 뫼시는 제사여야 할 것임에 나는 참 멋쩍고 불경한 후손이었다. 암것도 모르고 그냥 남들 따라 재배 올린다?
오늘 참례한 후손들 중에 나 같은 불충한 사람이 비단 나뿐일까? 한문학자가 아니고 그간 여기 묘역에 대한 공부를 아니 한 사람은 ‘이웃이 장에 가니까 덩달아 따라나선 얼간이(?)’가 되는 셈이다. 한문투성이 비문을 읽고 해석한 분이 과연 몇 분이나 있겠는가? 누구의 묘인 줄도 모르고 제사를 올리는 불효를 지양키 위해서도 오늘의 제주는 묘주에 대해 간단한 약력을 포스팅해 나눠주는 성의를 발휘해야 함이다.
오늘 추향제에 참석한 후손들은 모두 60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다. 왜일까? 젊은이들에겐 매력 없어 관심가질 필요성이 없어서일 것이다. 젊은이들이 자랑스러운 선조에 대한 애정을 갖도록 하는 일은 오늘 여기 온 우리들 - 노인들의 몫이고 사명인 것이다. 젊은 후손들이 제사에 참례할 수 있는 유인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음 앞으로 10년도 채 안가 춘`추향제에 참석하는 후손이 아마 없지 싶다.
묘소에서 오늘의 시주가 한문축문을 낭독하고, 제수음복이나 하는 제향에 젊은이가 참석할 소이를 찾겠는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불편하게 큰절을 해야하는 묘소 앞에서, 더구나 교통불편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단막극일망정 버스킹이라도 펼치면서 축제마당을 열어야 활성화가 될 것이다. 더불어 묘주에 대한 간단한 약력을 소개한 글을 포스팅 주면서서 말이다. 뭔가를 알아야 흥미가 돋운다. 따라서 묘소의 옛전에 세워진 한문전용 비석 옆에 간단한 한글석문을 세울 필요가 있다.
소귀에 경 읽어봐야 온통 낭비다. 요즘도 묘소를 일구면서 한문비석을 세우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다. 누굴 위한 비석인가? 돈 자랑하기 위한 만행(蠻行?)쯤으로 여겨진다. 전국의 명문가의 고묘(古墓)비석 옆에 한글비석을 병립시킬 것을 아니, 진주강씨 문중만이라도 필히 실행하기를 제안한다. 후손이 찾지 않는 묘소유지는 낭비고 자연훼손일 뿐이다. 상당한 문중재산을 보유중이라 가능한 사업일 것이다. 문중의 어르신들이 발상의 전환을 꾀하시길 기원해 본다.
음력10월4일엔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경덕재(景德齋) 후원 묘소에서 통계공 회중(淮仲)의 추향제가 거행됐는데 이번엔 C와 J와 M이 동행하여 4명이 됐다. 통계공은 공목공(恭穆公)의 아들이며, 통정공의 동생으로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건국 후 이색과 난을 꾀하였다는 죄로 유배를 당한다. 1418년(태종 18)에 경기도관찰사와 성부유후(開네명이府留後)에 복직해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역임했다. 다음해 한성부윤(漢城)과 공조참판(工曹參判),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분이다. 1421년(세종 3) 4월4일 총제(摠制)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
강산차일두장백(江山此日頭將白) 여기서 오늘날 나의 머리 희려하니
골육하시안갱청(骨肉何時眼更靑) 형제를 어느 때에 다시 반갑게 볼 것인가
험로험이증역식(宏路險夷曾歷識)벼슬길 험난한 줄 일찍 알았다면
시신천지일부평(是身天地一浮萍) 이 몸은 천지의 한낱 부평초인걸
- 통계공 김회중의 시 -
"임진강 흘러흘러 / 잠시쉬어 가는가
백학이 깃을 트니 / 오룡이 날았던가
오래된 미래처럼 / 연화부수 보이네
육백년 세월에도 / 그모습 그대론데
분단의 비극역사 / 연잎에 비친이슬
시절운수 돌아오니 / 한 후손 찾아왔네"
<연화부수(蓮花浮水)> - 이동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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