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스위스 취리히호수에서의 황당(荒唐)
새벽5시반에 기상하여 취리히호수강변 트레킹 후 아침식사를 든든히 하자고 했다. 10시에 울`식구들은 보트를 타고 취리히호수 100리(40km)길 종단에 나설 참인데 점심식사가 어찌 될 줄 몰라서였다. 호텔에서 예약해준 보트는 리마트강변에 정박해 있었는데 나이 지긋한 선장이 반갑게 맞아줬다. 5시간여 전세 낸 보트는 울`식구만 태우고 콰이다리를 통과한다. 아치형 콰이다리는 통과높이가 낮아 보트가 웅크리고(?) 기어갈 땐 아슬아슬 조마조마했다.
다리를 통과하면 취리히호수다. 유람선부두와 쉼터와 호수 뷰`포인트들이 즐비하다. 즐비한 건 백조와 청둥오리와 갈매기와 가마우지를 비롯한 바다조류들이 수면을 누비며 난장판을 이루는 풍경연출이다. 놈들은 사람들이 다가서도 도망은커녕 얼른 비켜서지도 않는다. 선장이 인사말을 한 후에 보트는 요란스런 물방귀를 끼면서 속력을 내도 놈들은 살짝 자리만 옮긴다. 호수는 그지없이 잔잔하다. 정기유람선 외에 망토 뒤집어쓴 보트들은 긴 잠에 빠진 듯 꿈적도 않아 호수는 구름과 하늘을 담은 거울이다.
바나나모형의 취리히호수는 남북의 길이가 40km, 너비3km, 수심이49m인데 젤 깊은 곳은 143m가 넘고 여름철 평균수온이 20°C여서 호수는 각종 축제로 북적댄다. 스위스에서 세 번째 큰 호수라는데 내륙속의 바다 같다. 연안에 정박한 헬 수조차 없을 보트들이 닻을 달고 물살을 가르는 호수의 풍경은 상상을 절한다. 선장은 멋진 풍광 앞을 지나칠 땐 잠시 스톱한 채 관광가이드가 됐다. 호수가 연안은 워낙 수심이 얇아 보트진입이 안된단다.
잔잔한 호수를 질주하는 보트는 차가운 물바람으로 일으켜 정신을 빼앗는다. 병풍처럼 휘두른 산록에 걸친 안개들이 하늘로 빨려들고 있다. 검푸른 산록에 그림처럼 붙박힌 집들이 장대한 병풍이 됐다. 파란하늘이 회색구름을 헤치며 웃는다. 만년설의 알프스산릉이 멀리서 얼굴을 드밀고! 바닷새들이 수면을 박차고 비상한다. ‘장미의 도시’라 불리는 라퍼스빌(Rapperswil)이 첨탑을 치켜세우고 '동화의 나라' 마냥 다가선다. 그림엽서에 등장하는 조그만 궁전의 요새마냥이다.
라퍼스빌은 호수남서쪽에 있는 중세도시였고 성안에는 폴란드박물관이 있단다. 보트를 나와 상륙한다. 2시간동안 라퍼스빌을 산책할 참이다. 시골선착장 같은 부두엔 너도밤나무 가로수가 퍼레이드를 펼친다. 성으로 향하던 발길은 끼니를 때우고 차분히 관람하자고, 우린 식당가를 찾아 피자전문식당 산마르코(San marco)에 들어섰다. 직화구이 피자로 유명한 식당인가 이른 점심시간인데 빈 좌석이 없다. 피자 두 판과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점심에 와인을 곁들이는 테이블은 우리뿐인가 싶었다. 방금 구워낸 피자는 침샘을 당겼다. 맛있게 식사를 끝낼 때였다. 서빙 하는 40대 남자가 옆 테이블손님의 빈 그릇을 치우다가 우리테이블의 빈 그릇마저 올려쌓아서 돌아서다가 그릇을 와장창 쏟아 박살이 났다. 그 그릇들이 무너져 떨어지면서 일부가 나의 식탁모서리에 놔뒀던 휴대폰에 떨어졌다. 휴대폰액정이 파손되고 기기까지 망가뜨려져 작동이 안됐다. 낭패였다. 휴대폰이 나의 사진기인데 당장 어찌한다?
서빙남자와 여주인이 사과를 하면서 보상하겠다며 선처를 바랬지만 여행 중인 우리들은 참 난감한 처지가 됐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더구나 숙소인 호텔에서 한 시간여 보트를 빌어 타고 온 이방인한테 묘안이 있을 리 없다. 여주인이 보험 처리할 테니 안심하란다. 보험처리가 하루 이틀 만에 해결된다는 보장도 기대 난망인데 앞으로 여정에서 사진촬영은 어찌한다나? 낙서일망정 여행기를 쓰는 나로썬 심난했다. 황당도 이런 황당이 있을까?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와 아내는 쥬니의 얼굴만 처다보는데 여주인과 서빙남자는 안으로 사라진 후 감감무소식이다. 시간이 빠듯한 우린 애가 탔다. 쥬니가 다른 여종업윈한테 사장을 불러달란 후 한참만에 여사장이 나타났다. 명함을 내밀며 보험처리 하자는데 우리로썬 달리 방법이 없었다. 쥰이 사장과 메모지에 뭔가를 쓰고 다짐을 받았다. 여사장이 약삭빠른 장사치란 생각은 안 들어 그나마 위안이 됐다. 성실한 인상에 다소 진심이 엿보여 안심이 됐다.
쥬니가 담판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여주인 성함과 주소, 전화와 이메일을 확인하고 여주인이 보험처리 하겠다는 보험회사의 확인을 추인했다. 그렇게 구두 약속하여 해결 될 수 있겠느냐? 고 아내와 나는 의구심에 볼멘소릴 했지만 쥰은 여주인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안심시킨다. 관광사업이 스위스의 주산업인데 손님에게 사기를 치는 불상사에 대한 엄벌이 사회적 함의로 존재한다는 거였다. 어쨌거나 쥰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빨리 호텔로 돌아가서 휴대폰업체를 수소문하여 수리가능성 내지 신품구입을 상담해야 한다. 피자집에서 설왕설래할 여지가 없었다. 오후3시에 출발한다는 보트주인과의 약속도 지켜야 해서 후딱 라퍼스빌성당을 일별하기로 서둘렀다. 경보하듯 헐떡거리며 성당관광을 대충 누볐다. 귀로의 보트여행 낭만은 떨떠름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서울에선 우후죽순처럼 늘어선 휴대폰판매점이 취리히시내에선 한 번도 안보였다. 더구나 간판 없는 시내에서 휴대폰업소를 찾는 건 불가능함이라 쥬니는 애초에 호텔 측에 의뢰했다.
호텔 측의 주선으로 삼성휴대폰을 취급한다는 가게를 방문했다. 매장에 삼성 내지 LG휴대폰은 없었다. 주문판매만 하고 있었다. 시내 어디에도 삼성 내지 LG휴대폰 판매처는 없단다. 스위스와 한국의 휴대폰주파수 런칭이 제대로 안 되는 게 원인일까 싶었다. 내 휴대폰은 망가져 사용할 수가 없어 신품을 구매해야 하는데 상품도 내일 볼 수가 있단다. 또한 인터넷사용과 저장된 웹 몇 가지를 다운받아주겠으니 자세한 것은 한국에서 서비스를 받으란다. 나는 사진촬영과 검색창만 되면 된다. 실상 국내에서도 나의 휴대폰사용 메뉴도 단순하다.
아내가 피자집서빙을 생각해서라도 값이 저렴한 구형이라도 좋으니 사진만 잘 찍히는 걸로 하잔다. 가게주인은 60만 원짜리 물건을 내일 가져다 보여주겠단다. 아쉬운 놈은 나다. 사진기 없이 여행을 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우린 호텔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내일 60만 원짜리 휴대폰을 구입하면 피자집여주인은 기꺼이 응할까? 이리저리 핑계 대며 시간 끌기 하진 않을까? 바빠서 몸살 날 사람은 관광온 한국인 우리다. 비싸다고 합의 안 해 줄 수도 있다.
이래저래 잡생각으로 심사 불편한 하루였다. 낼 휴대폰을 보고 결정한 후 만약 피자집주인이 거절하면 어찌한다? 쾌속보트로 한 시간 걸린 곳이 아닌가? 아내와 나의 입방정에 쥬니는 쓸데없는 걱정 말라고 단언한다. 기우이길 간구한다. 지금은 세계인이 소통하는 인터넷 세상이다. 쪼그만 스위스에서 장사 망치려고 작정한 여주인은 아닐 거란 확신이 섰단다. 그렇게 낙천적인 성격의 쥬니이기에 월드비지니스로 성공한 반평생을 살아왔지 싶었다.
여차하면 60만원에 새 휴대폰 산 샘 치면 된단다. 그땐 피자집은 더 큰 손해를 볼 거란다. 와인 한 잔하면서 세미클래식을 듣다가 합창하면서 기우(杞憂) 날려버리자고 쥬니가 아카라카(樂下.AKARAKA) 한식집에 안내했다. 문을 여는 6시에 첫손님으로 들어선 우린 쥬나가 이미 예약을 했었다. 아카라카 (대머리)사장이 정중하고 반가이 우리를 맞아준다. 사장이 우릴 자리에 안내한 후 정중히 인사를 한다. 대머리 스님 같은 40대 후반의 한국인이다.
실내가 참 깨끗하고 단아했다. 벽에 걸린 액자는 고추장단지, 절의 단청처마, 경복궁 등을 담고 있었다. 영판 스님분위기를 풍기는 사장은 무지 바지런하다. 한 팀씩 들어서는 손님에게 베푸는 친절 또한 프로페셔널이다. 스위스에 성악도로 유학을 와서 아내를 만나 졸업 후 취리히 분위기에 미쳐 그대로 눌러앉아버렸단다. 어찌하다보니 한식당을 하게 됐고 아내가 한식의 독특한 맛을 담는 셰프로 정성을 기울리다보니 단골손님도 늘어 20여년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7시쯤 되니 벌써 식당은 만석을 이뤘다. 사장이 통기타를 들고 싱어 송 뮤지선으로 변신하더니 오늘은 고국에서 손님이 참석하셨다고 우릴 소개한다. 그리고 세미클래식에 이어 우리나라가곡을 <봄소식> <고향생각>을 열창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우리가곡을 듣는 감회만으로 울컥했는데 만당한 일부 손님들이 합창을 하자 울`식구들도 덩달아 코러스에 합류했다. 난 눈시울이 시큰해 손수건을 꺼냈다. 얼마나 오랜만에 불러본 가곡인가! 그것도 꿈속에서 그리던 스위스 어느 교포식당에서~!
스위스에서 유학생활을 했다지만 전공이 아닌 엉뚱한 음식장사로 삶의 터전을 일궈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아카라카 사장부부의 노고를 유추해보면서 그들이야말로 참된 민간외교관이란 걸 실감했다. 그래서 이태리출장 때 여길 찾아 인사를 나눈 율은 오늘이 두 번째이고 꼭 엄마아빠를 모시고 싶었단다. 극진한 환대 속에 두 번째 라이브공연에 끼어들어 코러스를 한 울`식구들은 10시에 석별을 했다. 아름답고 멋진 한국인! 앞에서 난 왠지 부끄러웠다. 내 손으로 뽑은 지도자와 회화화 된 나라꼴이~. 쪽팔리는 건 그가 아니라 울들이고 교포들이다. 2022.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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