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감-그 미지?

합죽선(合竹扇) 앞에서

합죽선(合竹扇) 앞에서

인보화백이 '언제나 푸른 빛' 표제를 붙여 제작한 단 하나뿐인 합죽선

인보화백이 새해벽두 한국미술관 초대작가 전시회에 출품작 중 부채 두 점을 선물하겠다고 하여 손사래 쳤는데 대한(大寒) 하루 전날 기어이 내 품에 안겨줬다. 막바지 한파를 따뜻한 정기(精氣)가 밴 부채바람에 묻으라는 듯~! 작년 정초엔 손수 그린 합죽선을 선물해줘 내 책상책꽂이위에 두고 이따금 ‘전가의 보도’처럼 펼쳐보며 부채에 녹아든 심정삼매경에 빠져들곤 하는데!

 합죽선 뒷면은 한지를 붙이지 않고 댓살 그대로다

댓살에 한지를 바르고 순무한 여백에 묵화(墨畵)와 시제(詩題)를 그려 넣은 예술품은 옛 선비들이 사랑하는 첩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애장품이기도 했다. 인보화백은 쪽빛이파리를 무성하게 단 노송을 그리곤 ‘언제나 푸른 빛’이란 표제를 붙였다. 일찍이 화두처럼 던졌던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는 초심을 잃지 말자는 뜻일 거라고 나름 생각한다. 옛 선비들이 그런 심정을 심어 놓은 합죽선을 휴대하고 펼쳐서 바람결에 수염을 날리는 멋과 품위를 고매한 품격이라 자랑삼았던 것이다.

2021한국미술관 초대작가 개인전 출품작(부채)

합죽선은 반드시 대나무 껍질 두 개를 맞붙인 살로 만들어야 한다. 속살 하나로 만든 것은 합죽선이 아니다. 우리나라 대나무는 사계절을 견뎌내 육질이 단단하고 치밀하여 대껍질로만 부채 살을 만들 수 있다. 부채 살에 붙인 한지가 헤지면 교체해야 해 부채 살 앞면에만 한지를 붙인다. 일본이나 중국의 대나무의 질은 우리의 것과 비교가 안 돼 합죽선의 원조는 우리나라였단다.

2021한국미술관 초대작가 개인전 출품작, 석류-완숙한 아름다움을 위해 금색을 칠했다

합죽선은 다수의 세공들이 108번의 공정을 거치는 수공예품이라 가격이 몹시 비싸다. 성종 때엔 면포 8~9동(현 시세로 대략 1천만원) 이었으니 방귀깨나 끼는 양반네가 아님 그림의 떡이었을 테다. 합죽선은 특히 중국고관들이 좋아해서 울`나라에 온 사신들은 합죽선매수에 정신이 빠졌단다. 금과 은, 귀금속보다 무게가 가볍고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어 싹쓸이한 통에 품귀현상을 빚어 호남지방의 대밭은 황폐화될 지경이었단다. 

2021한국미술관 초대작가 개인전 출품작

그런 합죽선은 전주 선자청(扇子聽)에서 만들어 최상품은 임금께 진상했다. 글고 단오엔 임금이 신하들에게 합죽선을 하사 했는데 이를 단오선(端午扇)이라했다. 합죽선은 사대부 양반네들이 한껏 자랑 떨며 멋스럽게 살 수 있게 했던 ‘전가의 보도’였다. 사대부는 합죽선살수가 38개고, 왕과 중전은 살수는 50개였으며, 과거급제 못하면 선추를 못 달았단다. 합죽선에도 계급이 있었던 거다.

2021한국미술관 초대작가 개인전 출품작, 상사화 - 꽃과 잎이 영원히 마주하질 못해 하트 밖을 잎색을 칠하다

인보화백이 내게 선물한 합죽선 살도 38개고 선추는 고리만 있다. 내게 마땅한 합죽선이었다. 기왕 합죽선을 소장했으니 선추에 멋스런 소품을 달아 신분상승을 해볼까 싶은 생각을를 한다. 선추를 단 합죽선 갖고 다니면 사람들이 가짜 벼슬아치란 걸 알아 볼랑가? 비웃으면 얼른 부채살 펴 가리지면 될 것이다. 옛 선비들은 어디서 못 볼 것이라도 맞닥뜨리면 부채를 펼쳐 살짝 가려 못 본채 했고, 모르는 여인과 마주칠 때도 합죽선으로 얼굴을 가려 품위와 위엄을 지켰다.

뜨건 볕에선 햇볕가리게로, 모르는 남녀사이엔 얼굴을 가리면서 은근슬쩍 곁눈질하다 시선이 마주쳐 전기가 통하면 역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시조창에는 장단을 맞추는 소도구요, 외줄타기 광대한텐 중심을 잡는 장대였으며, 판소리무대에선 효과를 극대화하는 추임새로 오케스트라의 지휘봉격이었다. 아랫사람들을 일 시킬 때는 접어서 지휘막대로, 손아래 사람들 옆을 지날 때도 접은 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치며 헛기침을 하면 길을 비켰다.

이번에 선물 받은 부채는 설날 애들한테 선물하련다. 사라져가는 부채 이야기를 하며 선현들의 고매했던 풍류와 애장품으로써의 자부심을 유추하면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교감하는 거다. 그리고 나는 금년여름에 합죽선 들고 외출하련다. 그때까지 마스크를 쓸지 모르나 부채바람으로 코로나19바이러스의 침입을 차단하면서, 시원한 바람결 속에 옛 선비의 자랑에 빠지는 낭만을 즐겨보고 싶다. 합죽선속에 깃든 인보화백의 미소가 곱다. 따뜻한 시선에 행복하다. 우리 ‘언제니 푸른 빛’으로 여여 하기를 기원한다.         2021. 정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