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궁전 - 경복`창덕`창경궁 2020.12.13
커튼사이로 하얀 빛이 날름댄다. 동 트기 전인데 유난히 밝은 서기라 얼른 커튼을 젓혔다. 시야가 눈부셨다. 세상이 변했나? 정물들은 은백색외투를 걸쳤다. 아파트뜰 깨벗었던 수풀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하얀꽃으로 단장했다. 서울에선 보기 어려운 설국이 펼쳐졌다.
진선문에 들어서자 하얀비단을 깔아놓은 광장에 검정카펫의 어도가 숙정문과 일직선을 이뤘다. 당당하게 글고 좀은 조심스럽게 걷는다. 회랑의 열주들이 흡사 근위병같았다. 우쭐해진다. 인정문을 들어선다.
효명세자가 재위에 올라 대리청정 3년만인 1830년 윤 4월에 갑자기 각혈을 한다.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혁파하고 왕권을 다지던 세자는 현명하여 조정의 샛별이었다. 병세가 위급하자 5월1일 측근 정약용을 불러 처방과 탕제를 받았지만 닷세 후 영면한다. 22살로 요절한 세자는 부왕순조의 비탄을 넘어 나라의 큰 상실이었다. 희정당 앞 소나무들은 세자의 푸른 꿈일 듯싶다.
창경궁매표소 뒤 멋진 전각은 중희당(重熙堂)이 있던 동궁(東宮)이다. 왕세자는 떠오르는 태양 같은 존재여서 동쪽에 처소를 짓고 동궁이라 불렀다.
1847년 헌종이 후궁(경빈김씨)을 위해 지은 낙선재는 왕비의 처소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가족들 - 이방자 여사와 고종의 막내 딸 덕혜옹주가 1989년까지 생활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사당을 춘당지 건너편 경모궁에 뫼시고, 잘 보이는 이곳 언덕에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었다. 정조의 효심이 눈꽃으로 만발했다.
풍기대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했다. 깃대 끝에 깃발을 매어달아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 지금은 초록깃발이 남쪽을 향해 미동하고 있다. 모처럼 핀 눈꽃을 망가뜨려선 안되겠기에~!
왕세자가 태어난 태반은 영구보전했다. 창경궁의 성종태실비는 창경궁건립의 첫 삽을 뜬 임금이 성종대왕이어서 일테다.
춘당지는 애초에 궁궐내 논이였다. 농정국가에서 벼농사는 기본산업이라 영농은 국정의 상식이었다. 왕이 손수 벼농사를 지은 '내농포'라는 왕실논을 일제가 파내고 호수로 만든 게 춘당지다. 지금은 원앙과 온갖 새들의 안식처가 돼 창경원의 으뜸 관광명소가 됐다.
성종 원년(1470년)에 연못 옆에 세운 석탑으로 8각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쌓았다. 찬찬히 들여다 보면 8각의 면에 얕게 새긴 안상(眼象)이 있다. 내 보기엔 참으로 아름다운 탑이다.
1909년,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장하면서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온실이지 싶다. 온실 앞의 정원도 다분히 서양식이다. 일제가 조선혼맥의 흠집내기 일환으로 창경궁전각들을 헐고 세웠다.
춘당지 옆의 얕은 구릉을 자연그대로 수초를 가꾼 화단으로 만들어 여름철엔 갖가지 화초를 접할 수 있는 자연학습장이다.
▲창경궁 우측 끝으머리 집춘문 언덕을 향하는 숲 속에 아담한 쉼터정자가 관덕정이다. 나는 창경궁에 올때면 꼭 여기서 망중한을 즐긴다. 그때마다 고양이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는데 내깐에 고민한다. 입가심꺼릴 줘야 하는지? 말이다. 궁궐내에선 먹거리 섭취가 금지인데 놈들이 힐끔힐끔 처다보는 건 나 같은 얼떨떨이가 있어서 일것이다.▼
흑백의 겨울창경궁 속으로 빨강과 노랑의 원색치장을 한 채 입장한 여인의 치기(?)는 특이하다기 보단 멋있어 보였다.
영조는 홍화문 밖에 나와 백성들과 대면정치를 했고, 정조는 어머니회갑 때 백성들에게 쌀을 손수 나눠줬다. 어쩜 오늘날의 청와대에서 거드름 피웠던 어떤 독재자들 보다 트인 민주군왕이었다.
사도세자의 비명을 간직한 회화나무. 사도세자의 비명을 듣고 가슴앓이로 비뜰리고 몸틀도 휘어버린 채 버티고 있단다.
임진난 후 광해가 지은 그때 그대로의 정전인 명정전. 단아하다. 광해는 임진난에 소실 된 궁궐복원에 애썼는데 그게 인조반정의 불씨거리가 됐다
▲창경궁과 낙선재를 경계하는 돌담장과 꽃계단의 아름다움은 언제 어느때나 일품이다▼
통명전일대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시기 저주하려 흉물을 숨겨 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음흉한 희빈에게 뿔다구 난 숙종이 사약을 내렸는데 음복을 거절하자 희빈을 멍석에 말아 궁녀들더러 밟아 죽이게 한다. 한 때는 좋아서 보듬고 날 새우면서 죽고 못 산다는 연인이었는데~?
성정각(誠正閣)은 왕세자가 자기훈련을 하던 동궁이다.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으로 학문을 대하는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한다. 성정각 현판 글씨는 정조 (正祖)의 어필이다.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기 위해 궐내에 세운 관청이 궐내각사다. 창덕궁 궐내각사는 약방, 옥당, 예문관, 내각, 봉모당, 규장각 등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 진전(眞殿)이 선원전(璿源殿)이다. 궁궐 안의 왕실 사당인 셈이다.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란 뜻으로 '옥 같은 왕실'을 의미한다.
경복궁의 정궁 출입처인 근정문(보물 제812호)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수문병들의 교대식이 볼만하다.
근정전(국보 제223호)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로 좌우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건청궁(乾淸宮)은 경복궁의 깊은 후원에 있다.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쓰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빈궁이 됐다가 일제 때 헐리고 다시 복원됐다.
신무문 옆 집옥재는 고종의 어진과 고종이 청나라에서 사들인 서양 관련 서적, 왕실의 장서를 보관하는 장소로 아관파천 때가지 3년간 머물렀다.
집옥재는 협길당(協吉堂), 팔우정(八隅亭)과 나란히 배치되어 건물사이를 복도로 연결했다. 왕실 장서의 보관, 어진 봉안, 왕의 집무 공간을 하나의 영역으로 조성하기 위해서 지은 건물로 청나라 건축형식을 취했다.
광해군15년(1623.3.12), 창의문을 출발한 반정군은 신무문을 통과 인조반정에 성공한다. 이귀,이괄 등 서인일파가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광해 대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을 왕으로 옹립하니 인조이다. 훗날 영조는 인조반정을 기념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에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았다. 문루에 걸린 현판을 보고 싶으나 출입금지라서 볼 수가 없다.
그날 밤 창덕궁에서 유흥 중에 내시에 업혀 도망간 광해를 의관 안국신의 집에서 붙잡아 반정군이 묻는다. "우리가 뭣땜에 반정을 했겠는가?"라고. 광해가 대답한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김개시가 ‘별일 없다’고만 해 그런 줄만 알았다"고.
나인 김개시(金介屎.똥屎)는 선조의 섹스상대로 얻은 이름이다. 어릴적의 광해를 돌봐 왕이 된 광해의 신임하에 국정을 농락했던 여자였다. 어쩜 박근혜를 농락한 최순실이 김개시를 룰모델 삼았지 싶은 거다. 김개시는 반정군 이귀와 내통하여 목숨을 구걸한 요녀했지만 죽임을 당한다.
창의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는데 외침이 아닌 반란군에 의해 두 번 열렸다. 인조반정 때의 공신 이괄이다. 이괄은 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또 다시 창의문을 부수고 침입하여 이틀만에 패주했다. '이틀천하'였다. 이괄의 이틀천하에 경복궁은 무법천지가 되어 망가질대로 망가졌다.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허나 나는 경회루에 오면 인왕산치마바위 생각에 쪼잔한 임금 중종을 경멸하게 된다. 경회루에서 인왕산중턱에 널려있는 빨간치마를 보면서 애간장만 태워야 했던 임금이어서다. 조강지처 하나 지키지 못한 왕이 왕인가 말이다.
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7일만에 왕후 신씨를 폐위시킨다. 장인 신수근이 반정을 반대했데서다. 인왕산 아래 민가로 쫓겨난 폐비신씨는 중종이 그리워 경회루쪽 바위에 붉은 치마를 널어놨다. 중종은 경회루에서 그 치마를 보면서 연연만 했지 신씨를 복원시킬 엄두도 못 냈다. 그렇게 영원히 헤어져야 했던 부부였다. 그리워함 뭐하나? 쪼잔한 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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