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의 눈물

“낙타란 동물의 눈이 참으로 슬퍼 보이지 않는가”라며 순종은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탈바꿈한 창경원을 거닐며 한숨을 쉬었다. 일제가 이완용의 친일내각을 앞세워 민족혼말살의 일환으로 창경궁을 동`식물원으로 개조하여 문을 연 1909년11월(순종3년)의 일이다. 그렇게 조선의 심장에 삽질을 한 일제는 1944년 태평양전쟁말기에 동물원의 큰 동물은 모두 죽여버린다.

패전으로 도망가는 판에 오기 시퍼런 해코지였을 테다. 죽임을 당하는 낙타의 눈물은 마지막임금 순종이 창경원 개장시 한숨을 쉬며 목도했던 애처로웠던 그 눈물을 떠오르게 했지 싶다. 열사(熱沙)의 동물인 낙타의 눈물이 우리나라에서 흘린 눈물은 생태학적이기 앞서 비명의 탄루(歎淚)였을까? 낙타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마자 흘려야했던 비탄의 눈물은 어쩜 숙명적일 만치 잊을 만하면 이어져 반복된다.

고려태조 왕건은 거란이 화친명목으로 보낸 낙타50필을 굶겨 죽인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꼼수를 묵과할 순 없다는 왕건의 민족혼의 발동이었지 싶다. 고구려-발해를 잇는 고려의 개국이념은 북방정책에 걸림돌이 된 거란이 못마땅해 거란의 사신30명을 유배 보내고 낙타를 만부교각에 묶어 아사시킨 이유였다. 이른바 ‘만부교사건(942년 태조25)‘이다. 이때의 낙타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

태어났을 때부터 사람들의 노예로 끌려 다니며 온갖 고초 다 겪다가 멀고 먼 이국땅 어느 다리 밑에서 굶어 죽어야 할 기구한 운명의 설음이었을까? 아님 이역만리에 남겨두고 온 새끼에 대한 모성애 눈물이었을까? 낙타는 400kg의 짐을 싣고 400km이상을 걸으면서도 물 한 모금 안 마시는 동물이기에 유목민들의 필수 이동수단이 됐다. 실크로드무역을 꽃 피운 일등공신이면서 고기와 젖까지 제공하는 이동하는 식량인 셈이었다. 가죽과 털은 물론 오줌은 삼푸대용으로, 똥은 연료로 쓰이는 보물중의 보물이었다.

하여 거란이 큰 맘 먹고 친교선물로 보냈는데 내처 굶어죽게 했던 왕건의 흉중은 두고두고 역사의 숙제로 남기도 했다. 당시의 낙타 한 마리가 5백여 년 후인 1486년쯤엔 벼400석과 맞먹었고, 또 다시 5백여 년이 흐른 오늘날의 화폐로 치면 상상할 수 없는 거금이었던 것이다. 왜냐면 성종(17년)이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낙타를 구입해 오라면서 흑마포60필을 내주었다가, 대사헌 이경동의 반대로 없는 일로 했다는 기록이 <성종실록>에 있어서다.

다용도 일꾼인 낙타가 전쟁 때 유용하게 사용될 걸 안 성종이 궁리 끝에 내린 어명인줄 잘 알면서도 이경동은 "태조(왕건)가 거란의 간계를 꺾고, 후세의 사치하는 마음을 막으려고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 했던 고려 말 이재현의 말을 인용하며, 흑마포600필은 궁핍한 백성들에게 더 필요하다고 충간함에 성종은 내심 탄복했던 것이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애초에 내가 낙타를 귀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알았다. 그만두마.” 현명한 성종은 흔쾌히 가납했던 거다. 이렇게 어진 임금과 현명한 신하가 있어 반만년을 이어 온 오늘날에, 권세와 이권을 챙긴 대통령과 부화내동한 간신이 독버섯처럼 생겨 죗값을 치루느라 옥살이 내지 형 집행중지 중이란 사실에 통곡한다. 낙타의 똥만도 못한 위인(?)들이라. 낙타의 똥은 연료로 쓰이지만 부패한 범법자들은 죽어가면서도 혈세만 축내니 말이다.

낙타의 눈물 중엔 새끼를 낳고 흘리는 모성애의 눈물이 젤 짠하다. 어미낙타가 진통 끝에 분만한 새끼를 멀리하면서 젖을 주지 않고 흘리는 눈물이다. 새끼를 굶겨 죽이려는 비탄의 눈물일까 싶어서다. 자신의 노예일생을 자식에겐 되풀이하게 하고 싶질 안 해서다. 낙타의 마음을 돌리려고 사람들이 별 짓을 다해도 소용없던 어미낙타는, ‘마두금’이란 유목민들의 전통악기에서 나는 구슬픈 선율 속에 마을할머니가 낙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간절히 기도하자 닭똥 같은 눈물을 짜낸다.

“낙타야, 나는 너의 마음을 안다. 네가 살아온 험난한 일생을 새끼도 반복할 거라 생각하니 얼마나 비통 하겠니! 나처럼 살 바엔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지. 이 할미도 새끼들 키워봐서 안다. 그렇더라도 너는 지금 튼튼하고 잘 생긴 새끼를 낳았구나! 장하다!”라고 주문처럼 외는 할머니의 기도에 낙타는 눈물을 흘리며 새끼에게 다가가 젖을 물리는 다큐멘터리방송을 잊을 수가 없다.

권세와 이권에 혹해 온갖 술수로 범법행위를 한 위정자와 간신배들은 낙타가 새끼를 낳고 흘리는 눈물을 상기해야 한다. 국민의 지탄속에 법정에서 치졸한 변명을 늘어놓는 가증스런 모습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게 자랑스런 애비인가를 말이다. 자식에게 치사한 아비의 삶을 전수할 텐가? 1695년(숙종 21년) 4월에도 한양은 낙타소동이 벌어졌다. 청나라 사신이 낙타에 짐을 싣고 와 국경 의주에 뒀다가 병 든 한 마리를 버리고 귀국했었다. 그 놈을 대궐노비가 끌고 오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기민한 노비는 돈 받고 낙타구경을 시켜줘 떼돈을 벌었다. 그 소문을 들은 숙종이 거간꾼을 시켜 사람들 몰래 대궐마당에 낙타를 끌고 오게 했다. 동물애호가인 숙종은 애완동물로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대로 단념했다. 신하들의 간언에 물러선 왕이었다. 이에 앞서 광해도 명나라장군이 선물한 낙타가 1년도 안 돼 죽었고, 인조는 후금이 보낸 낙타를 일본으로 선물하기도 했었다. 모두 우리나라에서 낙타는 오래 살지를 못한 불운한 환경이었던가 싶다.

“낙타가 수천,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짐을 싣고 갔다. 털은 짧고, 머리는 말처럼 생겼는데 조금 작으며, 눈은 양과 같고, 꼬리는 소와 같다. 가려고 할 때는 반드시 목을 움츠렸다가 드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날아가려는 백로와 같다. 무릎은 두 마디이고 발굽은 양 갈래이다. 걸음걸이는 학처럼 발을 떼고, 거위와 같은 소리를 지른다.” 연암 박지원이 1780년(정조4) 청나라 사신에 동행하여 쓴 <열하일기>의 한 구절이다.

금년도 11월이 저문다. “낙타란 동물의 눈이 참으로 슬퍼 보이지 않는가”라고 이맘때 창경궁을 거닐며 낙타에 연민을 느꼈던 순종임금의 한숨이 문득 생각난다. 수백km떨어져 있는 새끼를 찾아 밤낮을 걸어가는 낙타의 모성애에 권세가들이 다가서야 한다. 이권에 눈 먼 MB는 감옥에, 권세에 눈 먼 DH는 또 법정에 선다.그 죄인의 출두에 전송나온 졸개들 면면을 보기가 슬펐다. 머리 조아리며 뫼신 대통령이 수의(囚衣)걸치게 협조한 자랑스런(?)간신배인 줄 모르는가? 코로나19로 우울한 지금 누가 마두금이라도 연주해 줬음 싶다.                 202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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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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