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날 더듬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영하10도를 웃도는 새벽의 강치는 아침까지 눈발흩뿌리고 있다. 오늘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오랑케에 포위당한 날이라 거길 갈까 망설이다가 눈이 그처 발길을 덕수궁으로 돌렸다. 고종도 이맘때쯤 경복궁을 탈출한 아관파천생각이 문득 떠올라서였다.

 

망루만 남은 러시아공관

 

중전을 시해한 무리들이 나를 위협하고 있소. 단발령(斷髮令,고종도 일본의 강압에 의해 단발했다)으로 나라 안이 뒤숭숭한데 그들이 나와 내 아들을 죽일지도 모르겠소. 우리가 비밀리에 아관으로 갈 테니 보호해 주기 바랍니다.”

러시아공관 앞의 정동공원,

 

을미사변이후 고종은 신변의 위험을 절감하고 있던 차 친일개화파내각의 갑오개혁에 강한 불신감까지 더해, 불안한 궁궐을 벗어나기로 마음먹고 러시아 베베르공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었다. 사전에 친러파인 이범진 등을 통해 고종의 파천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고 카를 베베르 러시아공사의 내락을 받아냈던 것이다.

대한문

 

18961227일 새벽6시경, 고종과 왕세자가 여장(女裝)을 하고 두 대의 가마에 나누어 탔다. 가마 앞에 상궁이 한 명씩 타서 뒤쪽의 고종과 왕세자의 가림막이 됐다. 평소 여인이 탄 가마검색을 소홀이 하는 수문병은 엄 상궁이 미리 수문군(守門軍)에게 약발을 처놓긴 했지만 그녀의 가슴팍은 사시나무떨리듯 했다.

  

덕수궁돌담뒷길과 연결된 영국대사관 쪽문, 이번에 개통됐다

 

염려 놓으세요. 제 가마는 늘 군말 없이 통과시켰으니 이번에도 별일 없을 것이옵니다.”라고 아뢨던 궁녀 엄 상궁(嚴尙宮)의 말대로 수문병은 별 말 없이 궐문을 열어 주었다. 무사히 건춘문(建春門)을 빠져나온 고종일행은 궁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 군대가 재빨리 가마를 둘러싸 보호하며 공사관으로 직행했다.

고종의 찻집 겸 휴게실인 정관헌, 외국사절들과 접견한 곳이다

 

특히 아관파천 하루 전인 10, 베베르공사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군함에서 수병 100여명과 포1문을 서울로 불러들여 공사관 주변을 경비하게 했다. 일본에 선수를 빼앗긴 러시아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참인데 고종이 손을 내미니 얼씨구나 했던 거다.

 

 

그리하여 고종이 18961227일부터 이듬해 220일까지 1년 남짓 정동의 아라사(俄羅斯,러시아) 공사관에 이어(移御)하니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한다.고 황현은 그의<매천야록>에 기록헸다. 사실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공사관에서 요리한 음식이나 캔 음식만 먹고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한 '고종의 길', 122년만에 개통됐다.

 

앞서 일본의 미우라`고로공사는 부임하자마자 명성황후를 없애는 무서운 음모를 꾸몄었다. 1895108(음력820) 새벽, 미우라는 일본 불량배들을 궁궐에 잠입시켜 명성 황후를 참혹하게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어찌 고종이 왜놈들의 포악과 강압의 불안에서 고뇌하고 탈출하려 궁리하지 않을수가 있었겠는가.

 

복원된 덕수궁 뒷길, 영국대사관저를 휘돌아 시청쪽으로~

 

더는 아관파천 이전인 18951127일 밤, 고종을 정동의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 했던 춘생문(春生門) 사건이 있었다. 이범진(李範晉), 이재순(李載純), 이윤용(李允用), 이완용(李完用), 이하영(李夏榮), 윤치호(尹致昊) 등 서양 외교관친목단체인 정동구락부소속 인사들이 김홍집 내각을 제거하는 친위 쿠데타를 도모하다 실패한 사건이다.

일제36년간 홧병으로 속 타버린(?) 회화나무가 덕수궁뒷길을 사수하고 있다

 

쿠데타에 가담했던 어윤중(魚允中)과 안경수가 내각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에게 밀고 누설한 탓이다. 연루자들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종신유형(終身流刑)이나 징역형을 받았다. 그 춘생문사건 판결이 선고되던 날 단발령이 내려지자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거세졌고 의병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1906년 영국언론인 메킨지가 찍은 대한제국의병,

단발령직후의 스산한 시국을 엿보게  엿보게 한다 

 

 

의병진압을 위해 관군이 지방으로 이동하는 통에 한양경비가 허술해지는 틈에 아관파천을 단행했던 것이다. 고종은 처음부터 갑오개혁을 불신하여 이범진, 이윤용 등과 더불어 러시아의 힘을 빌려 김홍집 등을 제거하려 했었다. 아라사공관의 고종에게 국가주권회복을 위한 조속한 환궁여론은 백성들과 유생들의 상소로 빗발쳤다.

복원된 뒷담길, 환구단찻집 앞에 어느여인이 스냅사진을~

 

1897220, 고종은 1년간의 이어(移御)를 끝내고 러시아공관을 나와 경운궁돌담뒷길을 이용 경운궁(慶運宮,덕수궁)으로 환어(還御)한다. 경복궁보다는 경운궁이 러시아공관이나 미국 공사관과 가까워 일본을 견제하기에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함녕전 후원

 

고종이 경운궁에 들자 신하들은 황제의 나라가 되자는 상소를 올렸다. 글고 1012일에 군사들이 경운궁부터 환구단까지 길게 늘어서고 백성들의 집과 관아에는 전날 밤부터 등불을 켜 내걸고 태극기를 계양하며 황제의 즉위식을 기도했다. 고종은 환구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다.

석어당

 

고종은 황색 곤룡포를 갖춰 입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대한제국을 선포하니 조선은 이제대한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은 신식훈련을 시킨 군인양성과 최초태극기사용, 국가(國歌)를 만들어 근대 국가로 나아갔다. 한편 김홍집 내각을역적으로 규정한 조칙을 발표한 고종은 친일관료들 체포령을 내린다.

 노거수 향나무 사이로 석조전이~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는 광화문 경무청 앞에서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고, 군부`조희연(趙羲淵), 내부`유길준(兪吉濬), 법부`장박(張博), 훈련대대장우범선(禹範善), 이두황(李斗璜) 등은 일본으로 도피했다. 우범선은 일본으로 귀화해 그곳에서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禹長春) 박사다.

 

탁지부`어윤중(魚允中)은 귀향하다 용인주민들에게 맞아 죽고 외부`김윤식(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됐다.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이범진, 이완용, 윤치호 등을 중심으로 새 내각이 구성되면서, 친일파는 힘을 잃고 친러파가 득세하였다. 이에 주도권을 잃은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니 다시 일본세상이 도래한다.

 

  중화전

 

19051117, 총칼을 든 일본 군인들이 시가지행진을 하며 공포에 떨게 만든 그 시각 중명전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맺자며 고종 황제를 압박한다. 고종 왈,

“아무리 황제라도 중요한 나랏일을 멋대로 결정할 수 없소. 대신들과 상의하고 백성들의 생각을 물은 후에 결정할 것이오.”

 

 준명전


“백성이 반대한다면 군대로 막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두 나라의 우정을 위해 현명한 결정을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겁박하며 뱉어내곤 숙소로 돌아가서 대신들을 불러 다시 겁박했다. 글고 오후에 총칼을 든 일본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대신들한테 조약체결을 찬성과 반대로 결정하겠다며 다그쳤다.

 

 

즉조당과 석어당


“여러분의 의견을 말하시오. 조약 체결에 찬성이요? 반대요?” 여덟 명의 대신 중 한규설과 민영기가 반대, 이하영과 박제순이 어영부영하자 이토 히로부미가 핀잔을 햇다.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은 조약에 찬성하니
이토 히로부미는 찬성이 많으니 조약은 체결됐다고 외쳤다.

석조전

 

“····천만 뜻밖의 오조약이 어찌하여 나왔는가?····단군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고 만단 말인가. ,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을 통탄하며 오늘 하루 목 놓아 우노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사람들은 읽고 또 읽으며 통분했다.

 

하얀잔설이 깔린 준명전 뜨락에 고엽된 홍단풍이 낙엽되지 않은 채 매달려 한기에 바르르 떨고 있다. 치욕의 현장을 까발려보여주고 싶질 않음일까? 우리가 겪은 치욕의 역사는 늘 단합되지 못한 위정자들의 사분오열과 포용 없는 독단 땜이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앞 분수대와 배롱나무

 

오늘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임금은 결국 칸(누루하치)에게 삼두고구두레를 하고, 단 아래 대신들은 누루하치가 내깔기는 오줌세례도 모자라 인질로 끌려가는 치욕을 당했다. 김상헌을 비롯한 주전파들이 주화파 최명길과 머릴 싸매고 묘책을 강구했으면~? 아니 광해의 등거리외교를 귀감했어야 했다.

 

지금 미`중의 고래싸움에 우리 위정자들은 진보`보수헤게머니 쟁탈전에 잔꾀 부리고 있을 땐가? 남북대화도 미`중 눈치보느라, 아니 그들의 비위 거스르지 않으려 몸 사리다가 꾸정물만 마시게 되는지 모르겠다. 사드로 멍든 상처 주한미군방위비 곱절로 동티나는 건 아닌지? 말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밀당에서 떡고물 찾는 묘책은 없을까?  

2018. 12. 13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석조전

국립현대미술관

정동공원 동문으로 '고종의 길'이 복원 됐다

1959년 영국대사관이 들어서며 패쇄된 덕수궁뒷길 100m가 이번에 개통 됐다

덕수궁연못

석조전과 미술관을 잇는 회랑

의병처형장 모습

조선저축은행

고종

엄상궁, 고종의 비 였으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어머니로

1906년에 진명 여학교, 명신 여학교를 세워 여성교육에 힘쓴 여걸이었다.

1911년에 사망, 1929년에 위패를 뫼신 덕안궁이 칠궁에 합사되어

자신이 세운 학교가 바라보이는 곳으로 돌아왔다(아래사진)

칠궁은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연우궁(延祐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이 육상궁과 덕안궁(德安宮)이다.  

덕안궁

영국대사관

 

 

 청나라 서예가 하소기(何紹基)가 쓴 중명전 현판.  옥호의 중간 자 '명'자가 원래 글자였던 밝을명(明) 자가 아니라, '눈밝을명(?)' 자를 쓰고 있다.  중명은 '광명이 이어지라'는 뜻이다.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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