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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아

잊혀지는 슬픔 앞에서

잊혀지는 슬픔 앞에서

 

 

내가 부모님산소를 찾은 지가 일 년 반은 넘었지 싶다. 억새 난발한 봉분 앞에 서니 세월의 무서움에 놀라게 된다. 자연은 한시도 쉼 없이 제 갈 길을 가면서 변화를 일구고 있다는 사실에 미력한 나의 존재와 시간의 덧없음에 자조하게 됐다.

 

억새벌초 후의 산소, '등잔거리명당'이라 석물을 세울수가 없단다

 

불효막심 뉘 볼 새라 후딱 벌초부터 해야 했다. 정읍누나 댁에서 가져온 낮으로 봉분의 억새를 베면서 두서없이 부모님생전의 모습들을 회억한다. 나는, 아니 울 십남매들은 두 어머님보다도 아버님생전을 기억하길 즐긴다. 선친기일(어머님도 합제)때마다 선친얘길 주로 하는 까닭은 그만큼 우리들의 삶에 선친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땜이다.

 

 

내가 당시엔 가묘(假墓)였던 부모님묘역을 처음 찾아 알게 된 건 중학2년 여름방학 때였다. 선친께서 나를 데리고 집에서 1km쯤 떨어진 방마산에, 그것도 시늉뿐인 산길을100m이상 빡세게 올라가 초라한 묘 앞에 서서 봉분의 내역을 얘기해 주시는 거였다. 자그마한 가묘는 선친님께서 묻힐 자리라 하셨다.

 

 

아랫마을 옆 쌀곡재에 우리사유임야가 있었는데 수은강씨(睡隱姜氏)문중산인 방마산칠부능선에 가묘까지 해두신 것은 명당자리여서라 하셨다. 명당을등잔거리라 부르셨는데 유명한 풍수쟁이를 불러 찾은, 이만한 자릴 찾기란 쉽지 않다고 하셨다. 명당자린 탐내는 자가 많아 야밤에 가묘주인 모르게 이장하는 예가 더러 있어 가끔 살피러 오시곤 한다고도 하셨다.

 

억새봉분의 산소

 

선친님은 등잔거리명당해설을 해주셨는데 문외한인 내가 이해한 때는 훨씬 나중에 선친께서 작고 음택(陰宅)하면서였다. 풍수지리에 식견 있는 분들이 장지(葬地)에서 명당예찬을 하면서였다. 묘좌향(墓坐向)은 불갑산떼꼬봉을 향하고 좌우로 방마산능선이 휘돌아 감싸며 묘아래 들판엔 불갑천이 흐르는 전망이 일품인 자리인 곳이다.

 

 

그런 선친의 명당묘소 덕인지는 모르되 나는 여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음이다. 다만 내가 게으르고 효심이 부족하여 산소마저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쪼잔하게 살고 있음이라. 곰곰이 생각할수록 부모님께 죄송스러운 건 내가 죽은 후엔 뉘가 성묘하러 올 후손도 없지 싶고, 더 참담한 건 부모님생전의 모습을 아니 일생을 기억할 사람도 없을 거란 안타까움이다.

 

 

사람이 죽음보다 더 비참한 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영원히 잊혀져버림이다. 해서 범부들은 묘를 쓰고 비석을 세워 후손들을 동반 성묘함인데 각박한 세상은 그 일마저 염두에 두질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깔끔하지는 않아도 억새를 다 벤 묘소는 이발시늉은 났다. 묘 앞에 소나무가지를 꺾어 놓고 과일을 차린 채 재배를 올렸다.

 

산소서 조망한 가을들판 뒤로 멀리 불갑산연실봉

 

파란하늘에 흰 구름 한 떼가 떼꼬봉을 향하고 있다. 1년이었을 때다. 광주에서 유학하던 나는 집에 왔다갈 때면 시산재를 넘어 묘랑에서 광주행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당시엔 불갑~영광읍버스가 가뭄에 콩나듯 해 광주행버스는 시산재를 넘어 하천을 건너는 샛길이 편리했던 것이다.

 

 

시산재를 넘어 하천에 닿으니 어제 내린 폭우로 물길이 세고 깊어졌다. 당시엔 하숙비도 현물()로 계산하던 시절이었다. 멜빵끈으로 쌀포대(40kg)를 등에 맨 선친은 하천건너 둑에 내려놓고 다시 돌아와 나를 등에 업혀 건너 주셨다. 선친허벅지까지 넘실대는 깊고 센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운 하천을 조심스레 건너시던 위태위태한 정황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선친의 향학열은 대단하셨다. 당시 130여명 되는 초등학교 졸업생 중에 광주로 유학 보낸 학부모는 선친님이 유일했지 싶다. 유학에 앞서 광주서중에 진학시키려고 6학년담임(정교석)선생님이 학교부근에서 하숙하고 계셨는데 나를 그 하숙집에서 담임선생님과 같이 하숙을 시키면서 과외(그땐과외란 말이 없었다)공부를 시켰었다.

 

'등잔거리묘소'에 어떤 석물도 놓아선 안된다는 풍수쟁이 말에 흙복토만 해야 했는데 그마저도 이젠 뜸해지는 불효다

 

당시 광주서중은 입학정원 480명 중 300명은 광주시내우수초등생들을 무시험입학으로, 나머지 180명은 타지시골출신들을 시험전형으로 선발하고 있어 시골놈은 서중입학이 하늘별 따기였다. 하여 서중에 입학시킨 시골학교의 명예는 대단했었다.

 

동구릉이태조의 억새릉

 

그 명예에의 도전은 나와 선친, 학교의 공동목표이기도 했던 것이다그런 소이로 담임선생 곁에서 밤11시반~새벽4시반까지만 취침하곤  2학기내내 과외수업을 했으나 서중입학은 낙방하고 말았다. 어린 나로썬 너무 과로했던가? 시험이틀째 음악`체육실기시험은 몸살을 앓아 아버님등에 업혀 고사장을 찾아 수험을 봤던 것이다.

 

 

담임선생과 학교보다도 아버님 기대를 저버린 게 한없이 죄송하여 선친 앞에 나서질 못했었다. 당시 선친님은 학교사친회장, 면의원, 향교전의, 수은강문중고문 등 지역유지였으니 시류에 상당히 트인 어른이셨다. 결국 2차 전형으로 북중에 입학했으니 순전히 아버님의지로 광주대도시에 유학한 셈이다.

 

 

허나 그 이후엔 선친은 내게 공부닥달은 안 하셨다. 촌놈이지만 식자(識者)아들이란 행운아였던 나는 면학보단 노는데 재미를 붙여 세칭 일류교에 진학을 못하다보니 사회열등생이 된 셈이라. 뒤늦게 불효막심함을 깨달았으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통한뿐이었고 지금은 성묘할 후손마저 난망이니 그저 막연하다.

 

 

추석 때 동구릉의 이태조건원릉을 찾았던바 무성한 억새봉분이었다. 함경도고향에 묻히고 싶었던 선친태조를 방원은 굳이 건원릉에 뫼시면서 잔디대신 고향의 억새를 파다 심었던 거다. 이태조의 억새묘가 아니더라도 봉분이 꼭 잔디여야 할 이유는 없다. 후손들이 잊지 않고 성묘할 때 봉분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고향에선 인구에 회자됐던 선친께서 알량한 내 존재 이후론 잊혀 질 어른이 될 거란 명제 앞에 난 자괴감에 처연할 뿐이다. 훌륭한 자식 만들기에 혼신을 쏟는 부모의 심정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속에 가문의 명예가 살아남길 바라서일 테다. 어버이만한 자식 없단 소린 날 두고 생긴 말이라. 선친이 기대했을 명예는 고사하고 이름 석 자도 불원간에 잊혀질 거란 절망에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산소를 내려왔다. 이젠 언제 성묘 올 수 있을까? 불확실성은 나이와 비례하는 성싶은 데 서울에서의 성묫길도 그럴거라 그 또한 슬프다. 기생넝쿨식물인 담쟁이가 단풍을 이 나무 저 나무에 옮겨문지르고 있다. 며칠 후면 나무는 붉게 불타 나목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것이다. 금년꼬리가 한 치나 남았나? 나이 먹으며 늙어 죽는날이 가깝다는 확실성 말고는 장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지 싶다. 그게 노년의 애잔한 삶일 테다. 

2018.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