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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두 형제 왕을 치마폭에 넣고~ 우왕후

두 형제 왕을 치마폭에 넣고 국정을 농락한 우왕후

 

 

고구려8대신대왕(伯固)은 슬하에 네 명(첫째男武,둘째勃岐,셋째延優,넷째罽須)의 아들을 두었다. 그가 죽자 큰아들 남무가 왕위에 오르니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왕은 조정의 실세인 연나부(椽那部)세력 중 우소(于素)의 딸을 비()로 맞으니 그녀가 55년 동안 두 명의 왕을 치마폭에 싸고 국정을 쥐락펴락한 전무후무한 여걸이다.

 

고구려벽화 수박도

 

우왕후의 처족인 연나부세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는데 고국천왕13년에 왕은 이들을 혁파하고 을파소(乙巴素)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개혁정치를 펼쳤다. 모쪼록 선정을 펴던 고국천왕195월 왕이 갑자기 병사하자(서기197) 우왕후는 권력의 화신이 돼 요부로 변신한다.

 

귀부인도

 

왕의 죽음을 숨기며 비밀리에 취수혼(娶嫂婚)제도를 따르는 척 한밤중에 둘째왕제(王弟)인 발기의 집을 찾았다.

취수혼이란 제도는 망형(亡兄)의 처()와 결혼하는 순서는 형제의 연령순이고, 미혼자가 우선 이였다. 따라서 우왕후는 시동생과 재혼할 수가 있기에 최우선 순위인 발기를 꼬셔 결혼을 하면 되는 거였다.

 

고구려벽화 '달의 신'

 

근디 기혼자인 발기가 할 게 분명해 연막전술을 쳤다. 느닷없이 찾아가 밑도 끝도 없이 나에겐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왕위를 계승하시오라고 제안을 했으니 아닌 밤에 홍두깨격인 왕위계승권유에 발기는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었다. 무안한 척하며 우왕후는 그 길로 셋째 시동생연우를 찾았다. 야밤에 형수이자 왕후를 맞은 연우는 예를 갖춰 모시며 주안상까지 차렸다.

 

무용총가무 배송도

 

술잔을 주고받던 왕후가 애통한 심정으로 다정하고 낮은 소리로 연우에게 속삭였다.

아까 대왕이 승하하셨소. 아시다시피 우리에겐 후사가 없잖습니까. 하여 왕위를 계승해야할 둘째발기를 찾아갔더니 나를 의심하며 오만무례한 폭언을 하지 뭡니까. 하 분해 황급히 서방님을 찾아온 게요. 그대는 미혼이구요

 

무용총사냥도

 

연우는 우왕후의 심지를 꿰뚫고 있었다. 황송했다. 왕후이며 형수에게 오늘밤 잘만 보이면 발기형님 대신 자기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겠단 생각에 극진히 대접하며 성심을 다했다. 연우가 주안상의 고기를 썰다 손가락을 살짝 베어 피가 나자 우왕후가 허리띠를 풀어 싸매 지혈을 시키며 바짝 붙었다. 여인의 지분냄새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연우~!

 

고분 승천도벽화

 

숨결이 거칠어지자 교활한 우왕후가 허리춤을 슬쩍 빼면서 욕정의 불을 지피며 궁궐까지 바래다줄 것을 요청한다.

왕후와 왕제, 형수와 시동생은 순간 커플이 되어 손을 잡고 한밤중에 구중궁궐을 향했다.

다음날 아침, 우왕후는 고국천왕이 승하했다고 신하들에게 알렸다, 글고 대왕이 발기가 아닌 미혼인 연우에게 왕위계승을 했다, 는 유언도 밝혔다.

 

고구려장군총

 

<삼국사기>엔 아래와 같이 기술돼 있다.

[(;우왕후)가 말하기를 고국천왕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장()이 되어 의당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나더러 이심(異心)이 있다하고 포만무례(暴慢無禮)하므로 지금 숙(叔,아제;연우)을 보러 온 것이오.]

 

 

연우가 10대산상왕에 오르고 우왕후와 결혼하자 발기는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선왕의 후손이 없으니 의당 왕위계승은 자기인데 배신 불충한 연우를 죽이려고 발기는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향했다.

선왕의 대를 이어 내가 왕이 되고, 형인 내가 죽어야 동생인 네가 왕위를 계승해아 하거늘 왕도를 어겼으니 마땅히 내 칼을 받아야한다,”고 호령을 했다. 

 

 

꿈쩍도 않는 성문밖에서 발기는 자길 따르는 군사를 이끌고 3일간 대치했다. 허나 동조하는 신하도 없고, 따르는 군사도 하나둘 뺑소니치자 발기는 식솔을 거느리고 철수 요동후한(後漢)태수 공손도(公孫度)를 찾아갔다. 태수에게 왕도를 어긴 동생을 지탄하며 군사3만명을 원정해 주기를 간청한다. 태수는 고구려를 속국으로 만들 기회란 동상이몽으로 발기의 청에 응했다.

 

 

그러나 후한군사들은 발기가 자기네대장이란 게 역겹고, 더는 형제지간의 싸움에다 고구려군사는 산상왕과 발기의 동생인 셋째 계수가 선봉장으로 출정했다. 지리멸렬한 태수원정군을 이끈 발기는 동생 계수를 죽여야 하는 번민과 자괴심에 후퇴하여 자결한다. 계수는 적장이자 형인 발기의 시신을 초분(草墳)하고 우왕께 상신한다.

 

 

애당초 잘못은 산상왕께서도 있으니 아량을 베풀어 형인 발기의 장례식이나마 치러주면 백성들의 칭송을 받지 않겠습니까, 라고-. 산상왕은 계수의 간청에 감동한다.

글고 발기의 시신을 수습하여 왕의 예로 장례를 치뤘다. 정세는 안정을 찾았으나 재위에 오른지 7년이 되도록 후사가 없었다. 선대왕 때도, 지금도 생산을 못했으니 불임은 우왕후의 몫일테다.

 

 

산상왕7315(서기203)

내가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터이니 안심해라라고 천신이 꿈에 나타나 말한다. 현몽한지 5년이 지난 1211일 산상왕이 제천재 재상에 올릴 교시(郊豕,돼지)가 달아났다. 관리들이 그 돼지를 잡으려 쫓다 주통촌(酒桶村)이란 마을에 이렀을 때 후녀(后女)란 처녀가 잽싼 돼지를 잡아주는 게 아닌가.

 

 

산상왕이 그 얘기를 듣고 이상히 여겨 밤에 아무도 모르게 그 처녀집에 암행을 나갔다. 글고 수행한 신하를 시켜 그 처녀와 하룻밤자고 싶다고 물었다. 어찌 대왕의 분부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산상왕은 주통촌처녀와 하룻밤 살을 섞었다. 이 얘길 들은 우왕후가 투기하여 밀사를 보내 후녀를 죽이려했다.

 

수박도

 

붙잡힌 후녀가 밀사를 향해

나를 죽이라고 명한 분이 대왕이냐 아님 왕후냐? 지금 나는 임신 중이거늘 나를 죽이면 왕자를 죽이는 것이니 그리 알라!”고 일갈하니 그냥 돌아갔다.

그 뒤로 우왕후는 어떻게든 후녀를 죽이려 애를 썼지만 산성왕이 선수를 처 마침내 9월 득남을 한다.

 

산상왕능

 

산상왕이 교시꿈을 꾸고 후녀를 품어 득남했대서 아들이름을 교체(郊彘)하고 후녀를 소후로 삼았다. 재위 13년 일이고 4년 후엔 교체를 태자로 명했다. 재위31년쩨 산상왕이 죽고 태자교체가 왕위를 계승하니 11대왕 동천왕(東川王)이다(서기227). 우왕후는 동천왕의 속내를 떠보려 별짓을 다했지만 왕은 우왕후를 왕태후로 봉해 예를 다했다.

 

견우직녀도

 

동천왕89월 왕태후는 임종시 유언을 남긴다.

내가 일찍이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많은 과오를 범하였으니 저세상에서 어찌 고국천왕을 뵐 수 있으리오. 하여 내가 죽으면 산상왕릉 곁에 묻어주오”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게다.

 

 

 

소수림왕능

 

왕태후가 산상왕 곁에 묻히자 지하의 고국천왕이

어제 우씨가 천상에 온 것을 보고 분함을 어쩌질 못해 우왕후와 싸웠다. 그렇게 다툰 후 생각하니 안후(顔厚)하여 차마 나라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으니 조정에선 어떤 가림막을 처서 나를 가려주라.”라고 했단다. 하여 고국천왕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안악묘벽화

 

우씨는 왕후로 48, 왕태후로7년 합55년 동안 3대 왕에 걸쳐 막강한 권세를 누린 여걸이며 간부였다. 취수혼을 핑계 삼아 형(고국천왕)과 동생(산상왕)을 품에 안고 국정을 농락한 희대의 여장부였던 우왕후, 이후 왕위계승은 장자상속으로 자리매김한다.

 

씨름도

 

남자는 세상을 움직이고 그 남자를 조종하는 건 여자다라고 한 금언은 영고불변 하는성싶다. 뭐 하나 특출함도 없는 박근혜한테 빌붙어 하수인노릇 하며 국정을 말아먹은 헛똑똑이 남정네들을 보면서 우왕후를 생각해봤다.  

2018. 07

 

태수내조도

광개토왕비

# 위 그림 중 춘화도는 조선시대작품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