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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있나.”- 인왕산에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있나.”- 인왕산에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푸념이 아니라 호랑이가 인왕산을 모르면 호랑이도 아닌 때가 있었단다. 그만큼 인왕산은 신격을 갖춘 서울의 진산(鎭山)이었다. 하여 인왕산은 통제구역이 많기도 했는데 며칠 전에 문대통령이 금단의 옛길을 개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치마바위

 

몇 년 만에 나는 그 인왕산을 찾기로 했다. 안산자락길엔 아기똥풀이 노란똥꽃을 산자락마다 쏴놓았다. 싱그럽다. 집을 나서 안산자락길을 살짝 밟곤 요새 만들어진 무악재하늘다리를 건너 인왕산둘레길에 발 내디뎠다. 인왕산과 안산이 본래처럼 이어진 셈이다. 곧장 선바위쪽을 향했다.

 

한양도성답사길의 문대통령 (사진;청와대제공)

 

기이한 선바위형상은 서울장안의 토테미즘의 본산일 듯하다. 일제가 남산에 신사(神社)를 세우며 위에 있던 국사당(國師堂;무신당으로 굿을 행하는 곳)을 선바위 곁으로 옮기면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의 정점이 되었다. 스님 두 명이 장삼을 걸친 모습이라 선()자를 빌어 선바위[禪巖]란데 오늘도 여인네들의 기도가 한참이라.

 

선바위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보단 자식 없는 사람이 치성 들면 손()을 잇고, 더는 작은 돌을 붙이면 자손이 번성하다고 해 돌 붙인 자국이 많아 붙임바위라고도 한단다. 그 선바위에 비둘기들이 안주해 더욱 멋진 그림을 연출하곤 한다.

 

선바위 후면

 

선바위일대의 꼬부라진 거송들마저 탄성을 불러일으키는데 중절모 두 개가 놓인 모자바위, 돼지바위와 코끼리바위를 휘돌아 범바위에 이르니 여인들이 부산떤다.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보살님, 이 바위는 무슨 바윕니까?”라고 물었다. “호랑이 바위요. 워쩧게 기가 세던지 유명한 바위라요

범바위

 

바위 아래에 이름푯말이 있음 좋을 텐데~?”

공원 허락을 얻어야 해요

보살님이 공원담당자에게 건의해 보시지요. 쪼그만 이름표가 있음 얼마나 좋겠어요. 큰 돈 들지도 않을 텐데-”

그러게요여인은 히죽 웃었다.

 

범바위 아래 치성단

 

당국은 관광지나 공원의 나무, 별명이 있는 바위에 이름푤 달아 관광객들에게 서비스하는 세심한 배려를 하면 좋겠단 생각은 비단 나만이 아닐 테다.

유명바위들에 눈길 뺏기면서 소나무자태에 감탄한 채 한양도성까지의 아기자기한 골짝은 몇날며칠을 뭉그적대도 좋을 듯싶게 멋지다.

 

꼬불꼬불 굽은 거송들한테서 눈을 떼기란 여간 메몰 차야 한다. “인왕산암송을 모르는 소나무나 바위도 있을까?” 정도전이 경복궁을 북악산 보단 인왕산 아래 세우라 할만했다. 이윽고 한양도성을 끼고 인왕정상을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서울시가지가 인왕의 신록프레임 속에 한 컷씩 파노라마 친다. 도성너머 숲 속에 두 귀를 쫑긋 세운 독수리가 비상할 폼이다. 매바위가 안산쪽을 주시하며 먹잇감을 여수고 있다. 한양도성도 왜침방어용으로 쌓았지만 유용하게 써먹은 적이 없다. 왕과 관료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시가지 뒤로 남산타워가 가물댄다

 

빡센 능선을 맨몸으로 오르기도 징한디 담 쌓느라 죽기 아님 살기였을 불쌍한 백성들 생각이 났다. 한양도성은 아니지만 남한산성은 얼마간 버텨줬다고 자위해 본다. 정오쯤 정상에 섰다. 산 전체가 화강암인 인왕산은 정상(338.2m)에 삿갓바위가 있다.

 

매바위

 

조선개국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다. 미세먼질까? 서울시가지가 뿌옇다. 어슴어슴한 바깥으로 호랑이가 슬금슬금 거동하기 딱일 것 같다. 일제 때까지도 인왕산엔 호랑이가 살았단다.

 

 

고려시대서울은 호환(虎患)에 벌벌 떨었다. 그때 이곳 판관이었던 젊은 강감찬장군은 호랑이와 대적하기 위해 노승으로 변신해 놈들을 찾아 나섰다. 드뎌 호랑이대장을 만나 호통을 치자 호랑이들은 모두 도망을 갔단다. 조선조 때 김자겸대감의 호랑이 퇴치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집 태운 격이 됐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폐허가 된 왕궁에 호랑이가 먹일 찾아내려오곤 했다. 1865년 경복궁중건 할 때까지 300년간 서울은 호환으로 공포에 떨었다. 궁궐에 임금() 대신 호랑이가 왕 노릇한 셈이다. 인왕산 호랑이라는 명실상부한 한양의 왕이 된 거였다.

기차바위 뒤 북한산원경

 

하여 호랑일 잡아달라는 백성들 청원이 빗발쳤다. 인조 때 김자겸대감은 호환을 없애려는 고민으로 날을 샜다.

호랑이 몇 마리를 잡아 해결될 일이 아니다. 호랑이 서식지를 없애면 된다. 한양도성근교의 산에 나무를 없애면 될 게 아니가?”

만개한 팥배나무 너머로 홍은동, 불광동시가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김자겸은 명을 내려 북한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근교 산의 나무를 몽땅 베라 했다. 근다고 누가 별 필요없는 나무를 힘들어 벨 것인가? 더구나 여차하면 구설수에다 치도곤을 치룰텐데~? 김자겸은 골 터저라 아푼 머릴 싸매고 고민에 고민을 하다 무릎을 쳤다.

 

치마바윌 조망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의 두 소나무와 바위

 

한양뿐만 아니라 온 나라의 호환을 막기 위해 마을주변의 산에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토록 했다. 그럴라치면 방에 구들을 놔야했다. 따신 온돌방생활을 권장하면 땔감으로 산의 나무는 자연히 베어질 것이다. 나무 없는 산에 호랑이는 살지 않을 테니 호환은 이제 끝이라.

 

 

하여 온돌방이 생겨 따듯한 생활을 하게 됐는데 만만찮은 후유증이 도지기 시작했다. 온 산이 민둥산이 되고, 사람들은 따신방에 처박혀 몸이 유약해져갔다.  하산길에 성벽 우측으로 20m쯤 튀어나온 바위벼랑에 숨어들었다. 선바위 두 개가 토끼귀 마냥인데 소나무 두 그루를 보듬고 있는 은밀한 쉼터다.

 

치마바위

 

아니 치마바윌 완상하는 최적의 자리일 것 같다. 나는 치마바윌 쳐다보며 기갈을 해소한다. 편편한 바위에 많은 주름이 잡혀있어 치마바위가 된 건 아니다. 한 많은 어떤 여인이 궁중에서 입던 홍치마를 무시로 바위에 널어놓고 경복궁을 응시하던 그리움이 그대로 바위에 주름살이 된 사연일 것이다.

 

 

15088, 남편은 왕(중종)이 된지 2년차 됐지만 여인은 폐비가 되어 서촌의 정현조 집으로 쫒겨났었다. 그 여인 친정아버지(신수근)가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숙청당해 자신마저 폐비로 전락한 신씨였다. 중종과 폐비신씨는 금슬 좋은 부부였다.

 

 

그런 신씨가 인왕산에 올라 경복궁이 보이는 바위에 홍치마를 펼쳐놓고 그리움을 삭혔다. 오매불망 중종도 경회루에서 그 홍치마를 보며 신씨를 연민했다. 이를 눈치 챈 공신들은 신씨를 인왕산에서 먼 죽동궁으로 쫓아내버렸다.

 

 

신씨는 치마바위마저 오를 수 없는 한 많은 세상을 71살까지 버텨야 했으니 기막힌 일생을 뉘가 알아나 줄 텐가? 공신들 손에 왕이 된 중종은 정녕 바보왕(?)이던가? 치마바위가 대답할 듯싶었다. 자릴 털고 기차바윌 잠시 탔다가 빠꾸하여 수성동(水聲洞)골짝을 더듬기로 했다.

 

 

처음 밟는 계곡은 등산로정비를 하고 있었다. 물소리가 낭창하다하여 수성골짝이라 했다는데 치마바위 아래서 발원한다. 거기에 만수천약수터가 있고 이 물은 청계천의 시원이 된다. 조롱박으로 약수 한 바가질 퍼 마셨다. 폐비신씨도, 겸재선생도, 안평대군도, 삼봉도, 이성계도 마신물이라.

 

만수천약수터

 

신록우거진 수성계곡은 여기가 서울도심일까? 하고 의심케 한다. 물길따라 한참을 내려오면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의 인왕제색도>를 그린 장소, 뷰포인트가 아닐까싶은 곳에 서게 된다. 겸재선생은 인왕산바윌 위에서 보고, 아래서 처다본 풍경을 묶어 그렸다 했다. 

 

청계천발원지

 

그 자리가 안평대군의 집터자리께일 것이다. 겸재선생은 여행을 하며 직접 눈으로 본 산천을 그린 우리나라 최초의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다.

인왕산부근에서 동문수학한 이병현을 위해 ()5월에 친구의 죽음 앞두고 그린 인왕산바위를 이쯤에서 감상해 봤다.

 

기린교와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터

 

아니 여기는 안평대군이 살던 무계정사(武溪精舍) 터가 있던 곳이라. 근년에 복원 된 돌다리 기린교가 걸쳐 있고 아래엔 정자가 날아갈 듯 물가에 있다. 형 세조는 안평의 무계정사를 방룡소흥지지(旁龍所興之地)라 생트집 잡아 사약을 내려 처형한 집터였다.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왕기가 서린 곳'이라고 핑계거리로 삼았던 곳이다. 상춘객들의 희희낙락소리가 물소리에 실려 합창한다. 그림과 글씨, 가야금 등 예술방면에 뛰어난 안평대군의 집터도 수성골짝이니 인왕산은 명산임에 틀림없다.

 

 

기린교 아래 정자

 

난개발로 사라진 선조들의 족적이 서린 옛터와 옛길이 복원되어 후예들에게 되돌려주겠다는 문대통령의 다짐은 신선했다. 온고이지신이라 했다. 한양도성을 낀 인왕산등산로 주변요소요소에 경비병과 초소들이 눈에 띈 것도 볼썽사나웠다.

 

겸재선생이 <인왕재색도>를 그렸을만한 장소

우측아래 송림 속에 한옥이 있었음직 하고?

 

수성천을 따라 경복궁에 이르는 길목은 깔끔하고 고풍스런 분위길 한껏 자아내 쇼핑객들로 붐빈다. 서울의 걷고 싶은 길 하나다.

이런 길이 많이 생겨 시민이 행복하길 기대해본다.

2018. 05. 06

 

<인왕재색도>위 인왕산사진과 비교해 봤다 

 

국사당

 

모자바위

범바위

인왕정상, 삿갓바위

기차바위

 

수성천계곡

 

늑대바위

만개한 애기똥풀 꽃

노랑꽃과 도랑속의 꽃이파리물길

돌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