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서 보름간의 기행(紀行)
8) 불세출의 악녀 서태후(西太后)의 이화원
청안방(淸晏舫).원래 석방(石舫)이란 이름을 서태후가 개축하면서
'강물이 맑고 바다가 평화롭다'는 뜻으로 청안방이라 개칭했다
자금성에서 신무문을 나서면 거대한향난무연리목이 앞길을 막는다. 아니 발길을 떼놓을 수가 없는 사랑의 고리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이화원을 서태후가 만들었기에 그 나무도 그녀가 심었지 싶은데 그녀의 사랑은 나무부지깽이만도 못했다. 부지깽이만도 못한 여인네가 빚은 욕망의 끈끈한 헛물을 보겠다고 나를 비롯한 세계의 관광객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으니 인간은 참 요상하다.
연리목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만주족관리의 딸로 태어나 16세에 애인 영록을 차버리고 궁녀가 될 꿈으로 자금성에 들어간다. 그녀는 환관들을 꼬셔 황제(함풍제)에 접근 몸뚱일 비벼대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함풍제가 31세에 요절하자 유일한 후계자가 된 것이다. 6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광서제가 10년간 유패됐던 명대 앞
황제의 궁 양쪽 동쪽엔 동태후, 서쪽에 서태후의 거처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동치제는 생모보다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고르자 뿔따구 난 서태후는 환관들을 시켜 아들을 홍등가에 출입케 해 성병들어 죽게 하고, 임신한 황후까지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손자도 눈엣 가시였던 것이다.
직사각형의 자금성을 휘돌아 판 해자, 폭52m 깊이6m다.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과 지 여동생 사이에서 난 네살박이 광서제를 골랐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였다. 1889년 서태후는 광서제를 결혼시키고 자금성 북쪽에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수렵청정은 더 드세졌다. 광서제가 장성하면서 철이 들어 위안스카이(원세개)와 손잡고 황실을 개혁 서태후의 수렴청정을 끝내려했다.
이화호선착장, 건너편에 낙수당이 있다
근디 위안스카이가 그 얘기를 서태후의 애인 영록에게 고자질한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잡아다 자금성 영대에 유폐시켜 버리니 무술정변이다. 이젠 서태후의 입과 손짓에 세상이 놀아난다. 그녀의 한 끼 음식은 128가지라. 돈으로 치면 백은 100만 냥 어치였다. 중국 농민의 약1년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산해진미식도락의 서태후가 젖이 잘 나오는 두 여인을 선별해 몸에 꼭 붙는 진홍색 상의를 입히고 유두만 드러낸 채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그녀는 침상에 누운 채로 젖을 빨아먹었다. 그런가하면 어느 늙은 태감에게 자신의 대소변을 강제로 먹여 노인은 이 일로 그만 목숨을 끊게했다. 정작 자신의 조카이며 황제인 광서제에겐 과식은 만병의 근원이라고 굶겨 죽이면서 말이다.
서태후 옷은 3000여 상자여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고, 비취장식머리, 비취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팔찌에 손톱에 비취보호판을 달았다. 비취식탁에 비취식기들을 사용케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였다.
이화원 남호도엔 서태후의 침실인 낙수당이 있었다. 미청소년들을 강제수용시킨 섬(미남섬이라 했다)으로 매일 밤에 한명씩 불려나가 서태후의 침소에 들었는데 아침엔 사라졌다. 날이 밝자 소년은 “너는 어제 밤에 뭘 보고, 무슨 일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곤 죽어나갔던 거였다.
그녀의 하룻밤 섹스노리개였던 게다. 하여 중국엔 미남자 씨가 말랐단다. 미남자는 왕궁에 끌려가 불귀의 객이 된 탓에 탓이란다. 그런 세기의 악질녀도 노쇠하여 생일에 동티가 난 게 이질로 번져 죽고 만다. 10년간 명대에 유폐되어있던 광서제가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독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한지 며칠 후였다.
광서제가 독살되자 그녀는 또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세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였다. 서태후의 죽음에 이어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도 망한다. 쑨원(손문)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한 거였다.
어린 아들을, 조카를 황제에 앉혀 수렵청정하다 끌어내 죽였으며, 며느리와 뱃속의 손자까지 죽여가며 황제를 탐했던 세기의 악녀-서태후는 중국의 돈벌이요녀(?)로 둔갑했다. 죗값을 하고 있는 걸까? 역사는 어쩜 추잡하기도 하다. 추잡한 역사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이화원은 1998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화원에서 역사의 숨바꼭질을 엿봤다.
2017. 10
해자를 만들기 위해 파낸 흙으로 경산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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