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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천유(天遊)를 꿈꾸고 싶은 참성단 (마니산)★

★천유(天遊)를 꿈꾸고 싶은 참성단 (마니산)★


오전 11시를 넘겨서야 356번 도로는 초지대교를 내놓는다. 강화섬이다. 저만치 대명포구는 몇 년 전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난 아내와 몇 번인가를 찾아 싱싱한 횟감에 입을 바쁘게 했었고, 2년 전엔 잠원동 애들 땜에 마니산행이 운전수노릇만 진탕한 씁쓸 뿌듯했던 추억이 새로워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날은 마니산등정을 하겠다는 내게 아내가 따라나섰고, 둘째가 맞장구를 치더니 큰애마저 손을 들고 나서 난 또 고개 숙인 가장이 돼야 했었다. 큰애는 이제 갓돌지난 어린애가 딸린 참인데 일주일 내내 근무하다 쉬는 날 바람 좀 쐬겠다고(유모는 토·일요일은 귀가한다) 손들고 동참하겠다는데 갓난애와 하루 종일 씨름하라고 뿌리칠 순 없었던 게다.

애비 된 죄로 고스란히 보듬고 정수사 입구까진 갔었다. 등산은 거기까지였다. 또 대명포구에서 바쁜 입만 혹사시키느라, 아내와 아내의 친구들(딸들)의 수다와 포식을 거드느라, 난 소주 한 잔도 못 한 채 운전기사노릇으로만, 가족들 여흥에 고수노릇 하는 걸로 땜질했었다. 그 마니산행을 오늘에야 송운산악회가 안내를 해주고 있다.

함허동 주차장은 휴일 탓에 차량으로 빼곡하고 산 입구 여기저기선 시산제 올리느라 좋은 자린 다 산님들이 점령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시산제 운운’한 입간판과 현수막은 또 하나의 새로운 직종이 등장했단 광고였다. 일자리가 생기는 건 좋은데 산님들이 자꾸만 늘다보면 정작 인상 찌뿌리는 것은 산일 테니 안산도 좋지만 산 사랑도 하자고 제문을 지어 봉독해야 함이다.


진달래능선을 오른다. 겨울눈에 물기가 도는지 뾰루뚱해졌다. 그는 꼬부라진 잔가지를 무수히 내뻗고 뒤엉켜 훌륭한 세필화를 그리고 있다. 그 세필화는 산을 온통 회색으로 덧칠했다. 마니산 능선에 오르니 정오를 넘었다. 회색의 산릉에 흰 바위가 성벽처럼 쌓여 능선을 잇고 있다. 바위능선 양 켠은 가팔라 천연성벽이라. 그 바위들을 징검다리 건너듯 뛰고 보듬고 기어오르다보니 정상(469.4m)이 발아래 깔린다. 왼편은 서해가 엷은 해무로 얼굴을 가리고 갯벌에 담구고 있는 발목만 보이고 있다. 오른편은 김포와 악수를 하고 있는 강화의 얼굴이 다양하다. 1시가 지났다. 서해의 시원한 해풍을 포식하련지, 봄 전령이 궁금해선지 능선은 산님들로 띠를 이었다. 바위길이기망정이지 육산이라면 인파에 산은 살점을 뜯기며 먼지를 일으켜 또 다른 황사를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pm1:30쯤 돌로 정교하게 쌓은 참성단(사적136호)에 이르렀다. 돌단을 10척 쌓아 위는 모나게[땅] 아랜 둥글게[하늘] 만들었다는 단 앞엔 성화채취의 큰 화로가 안치됐다. 1953년 체전부터 성활 채취했으니 반세기를 넘겼고, 단군께 향배를 올린지도 4천여 년을 넘긴 유서 깊은 곳이다. 저녁노을님과 난 우선 점심자릴 물색했는데 천행으로 그 북새통 속에서 성벽 위 수호수(소사나무) 아래에 최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또 하나의 행운은 오늘이 3.1절이어서 참성단을 개방했다는 게다)





팔방으로 뻗은 이 호위수는 몇 백 년이나 살아오면서 참성단을 수호하고 있을까? 모질게 크는 성질에 풀 한포기 얼씬 못하는 여기에서 온갖 풍상을 이겨내느라 담금질 된 몸짱은 가히 일품이라! 그만이 강화의 슬픈 역사를 오롯이 기억하고 있을 테다. 그렇다 해도 그는 고려말의 목은(牧隱-이 색;李穡. 1328~1398)선생을 기억하진 못하리라.

600여 년 전, 선생은 틀림없이 여기에서 향배를 올리고 만감에 젖어 시 한 수를 읊었으리라. 선생은 우리조정은 물론 원나라에서도 급제하여 벼슬을 한 요즘으로 치면 국제적인 학자며 정치가였다. 선생은 원에서 성리학을 면학하여 려말에 김종직, 권근, 변계량이란 걸출한 후학에게 전수시켜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케 했으며, 올곧은 성품은 무릇 학자들의 귀감이 됐고 벼슬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1389년 이성계의 느닷없는 위화도 회군으로 사직이 간두에 처했을 때(우왕을 강화도로 쫒아내고)도, 이태조의 부름을 몇 번이나 거절하며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고려을 위한 명분을 결코 회절하지 않았다. 선생이 여기서 읊은 시는 아마 우왕이 이곳으로 쫓겨났을 때 참배하고 작시했으리라.


-<향 피우고 앉아 시 읊으며 머리를 갸우뚱하니

한 방이 비고 밝은데 작기가 배(舟)같네.

가을빛을 가장 사랑하여 지게문을 열어 들이고

다시 산 그림자 맞아들여 온 뜰에 머물게 하네.

몸은 가뿐하여 때(후)가 없으니 봉황을 탈 생각하고

마음은 고요하여 기심(機心)을 잊었으니

갈매기를 가까이 하려 하네.

단(丹)을 만들어 신선되기 구할 필요 없다.

육착(六鑿)만 제거하면 바로 14천유(天遊)일세. >-


선생의 체취야 돌통인 내겐 가당치도 않지만 발자국에 덧 씌워 밟을 순 있잖은가!

선생의 시구처럼 기심을 잊고 육착을 놓으며 우국충정한 정치가가 많았다면 뒤의 삼전도의 굴욕도 아니, 이곳 강화에서 발생한 근세의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요호사건(1875)에 이은 임오군란과 제물포조약에 그리고 을사보호조약도 없었을지도(유효하게 대처 했을지도) 모르고, 오늘 3.1절의 독립만세도 필요치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근세의 형극을 몸소 지킴이 했을 수호수을 담으려 디카를 꺼냈다. 2시가 넘었다. 917계단을 내려온다. 기도원 못 미쳐 쉼터에서 저녁노을님이 빚은 커피 한 잔을 들려는데 송운회장님이 소걸음으로 다가선다. 워낙 거구(90kg이상)에다 성씨가 황씨여서 별칭이 항소란다. 그러고 보니 워낭대신 삐삐만 들었을 뿐 황소회장이 제 옷일 것 같기도 하다. 그 황소회장님과 수인사 겸 선문답을 잠시 건넸다. 얘기 중 <남김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홍보 얘길 나눴고, 산님들이 버스통로에까지 점령한 초만원인지라 다음기횔 마련하자는 나의 의견을 황소회장은 어찌 한 번 해보자는 거였다.

난 고마웠다. 초면에 더구나 만원 북새통 속에서 책 홍보를 해보라는 후덕에 미안할 뿐 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귀로에서 체증에 걸려 황소걸음을 하는 버스에서 황소회장은 맨 앞에서 마이크로 나를 소개하고, 난 후미에서 마이크를 넘겨받아 홍보판촉에 들었다.

그리곤 황소버스는 관광버스가 되어 질주를 시작한지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무렵 뜻 밖에 LSJ님이 찾아와 상찬에 이은 사인을 부탁한다. 얼굴이 마주 닿을 것 같은 면전에서 초면의 숙녀분으로부터“문장이 넘 아름답다.”는 칭찬을 듣기도 첨이라 내 맘은 금새 풍선을 탓겠다. 기분이 붕 뜨긴 했는데 풍선 바람 빠지긴 순식간이여서, 더구나 낙서수준의 내 글이기에 겁도 슬그머니 났다.

그 숙녀분이 책 한권을 보내달라고, 반드시 사인을 해서 말이다.

버스 천장이 없었으면 난 붕 떠서 천유(?)라도 했을지 모르겠다. LSJ님으로 해서 마니산행 피날레까지도 멋진 마무리가 됐다.

황소회장님, LSJ님, 제 짝궁님, 저녁노을, 햇살, 개나리님, 정답게 보듬어 준 송운산님들에게 고마움을 드린다.

09. 03.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