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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연인보다 부끄러운 춘란의 봄은 떨고~(천관산)


연인보다 부끄러운 춘란에 봄은 떨고~(천관산)


천관산에 걸친 야윈 반달

버선코


만월의 꿈이 있어

서성이는 세월


언젠가 활짝 웃음으로 굽어볼

천관산에 걸친 버선코

반달 -박순길의 ‘신월리’에서-


남도 장흥의 들판은 연둣빛과 진녹색으로 질펀하게 단장하고 봄을 부름인지 보리들이 눈까풀을 비비며 인사를 해오고 있다.

am10시반을 넘겨 관산읍 장천주차장에서 몸을 푼 원우님들이 선인봉, 금강굴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는데 들머리 소공원에 촘촘히 선 동백은 스스로 짠 동백기름으로 인동(忍冬)한 얼굴을 가꿔 윤기 자르르하다. 그 깔끔한 동백이 빨갛게 토혈을 하는가하면 몽땅 떨어지는 동백꽃이 안쓰러워 골자기 물이 수선스럽다. 이 물소리, 재잘거림을 듣기 얼마만이던가?

여긴 오랜 가뭄 뒤에엊그제 해갈수가 쏟아졌단 말인가! 청정수의 노랫소리에 겨우내 찌든 나의 심신의 노폐물도 가시는 듯 하여 심안(心眼)에 눈 뜨려는데 한 아름도 훨씬 넘길 적송 하나가 길가에서 버티고 서 나를 붙잡는다.

600살을 거뜬히살아온 소나문 세월의 무게만큼 구부정 휘어서도 찾아온 손님들을 죄다 품으려 팔을 활짝 벌렸다. 그의 피부는 거북등걸보다 더 고품위라. 거구의 그를 좁은 디카에 가두고 가파른 육산을 오르는데 동백이 떠난 자리에 그를 닮은 사스레피나무가 당당하게 버티고들 있다.



그들 틈새로 노각나무(피부가 모과나무와 비슷함)가 비단구렁이나무가 되어 하늘로 솟구치며 눈길을 뺐지만 정작 보고 싶은 봄의 전령사는소식이 없다.

한 시간 반을 오르니 능선에 보현봉과 구정봉이 바위동네를 이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계곡 저 쪽 바위벼랑엔 지맥을 뚫은 물길이 햇빛을 머금은 채 흘러 은빛 띠를 몇 개나 둘렀다. 그 은빛물길 알갱이가 아지랑이처럼 피어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 해안 바닷물을 쓰다듬곤, 올망졸망한 남해의 다도해를 애무하며 혹한에 멍든 감청바닷물을 치유하고 있다.

따스한 햇살까지 스며드는다도해는 지극히 평온하다. 봄이 깊었다면 오수에 졸고 있다는 표현이 딱 일 것 같다. 그 졸음을 쫓는선선한 해풍을 만끽하며 보현봉에 이르렀는데 오른편 거암에서 인기척이 나 김대장과 난 거기로 몸을 틀었다. 바위틈을 빠듯이 기어 나온 아주머니 왈, “양변기 바위라요.”라며 호들갑을 떤다. 김대장과 나도 거대한 두 바위사이로 난 틈새를 포복 기어들어(배낭은 벌써 벗어 놨다)갔다. 더 큰 바위가 막아 일어선다. 몸뚱이 하나만 세울 수 있는 공간의 거암들 속에서 보이는 것은 한 뼘의 하늘이라. 사지로 바위를 붙들고 바둥거리며올라서니 두 바위가 넓은 마당을 이뤘다. 그러나 기어들 때 막아선 바위는 여기서도 막아서서 윗면을 보여주질 않고 있다. 다만 그도 둘로 갈라져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틈과 구멍을 만들어 저쪽의 세계를 망원경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 거대한 네 바위가 일군 한 바위마당에서 조망하는 시야는 일품이라. 바위 옆에 소나무가 푸른데 바위 어디에 뿌리를 뻗었는지 볼 수가 없다. 아까의 아줌마의 말 ‘양변기’는 얼토당토다. 필시 아줌씨는 여자의 자궁을 달리 표현했음 직 하다. 하늘과 바다와 산만이 아우른 극락 같은 안온한 자리를 털고 아래로 간신히 내려가서 다시 낮은 포복으로 산도(産道)를 헤집고 나와야 사바세계인 것이다. 김대장과 난 그 산도를 왕복했던 것이다. 그 바위군은 ‘자궁바위’라 불러야 제명이라 하겠다.


소나무 자리가 하도 궁금하여 옆을 기웃하니 개량한복의 한 사내가 가부좌를 하고 있다. 깜짝 놀란 나는그의 좌선을 방해하는가 싶어

“미안 합니다”하고 되돌아서는데

“괜찮습니다.” 라고 내 뒤통수에다 일침을 넣는다. 돌리려다만 고개를 원위치 하고

“좌선하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되묻는다.

“아니요, 시상에 빠졌습니다.”

“아니, 그럼 시를 지으신다?”

“예, 시인 입니다.” 내 돌대가리 머리론 이해가 갈라다 말라다 하여

“여긴 자주 오십니까?”라고 묻자, 자칭시인 왈,

“예, 매일 오다시피 하죠. 이 밑에 주차장 마을에 삽니다.”라고 본격 말을 건 낼 셈이라. 시인은 필시 무료감에 빠져들다 우연히 화자(話者)를 낚았다는 듯한 반색의 표정이라.

난, 시집을 몇 권이나 내셨고, 시집 제목은 뭣이며, 달리 하시는 일은 없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시간 없고, 더는 그의 심심풀이 말동무가 되기도 싫어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 자궁바위는 소나무와 초야의 시인을 건사하느라 옆구리바위까지도 붙들고 있었던 게다.


시루떡 같은 널판바위가 차곡차곡 장서마냥 쌓였다 해서 붙은 대장봉(臺藏峯;722m)에 발을 들여놓으려다 왼발 종아리에 쥐가 났다. 통증에 한 발도 움직이기 거북하다. 처음일이라 당황하고 걱정이 지핀다. 김대장이 놀라 원우님들이 준비한 구급약을 찾는다. 물파스를 뿌리고 맛사지를 하며 아스피린을 삼켰다.

pm1시 반이 지나쳐있어 모두가 정상에 점심자리를 깔고 식도락에 빠져있었다. 김대장과 나도 넓은 바위에 자리를 깔았다. 점심시간이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른거리는 다도해의 묵화 한 폭을 묻혀오는 바람은 따스한 햇볕까지 실어 최상의 점심자리를 마련해줬는데 지피는 걱정 땜에 맛이 별로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깡그리 비웠다. 그 바위마당은 알고 보니 용알 터였다. 크고 작은 9개의 용알 터가 있다 해서 이름 한 구룡봉(九龍峯: 675m)이 바로 옆인데, 내가 앉은 바위에도 서너 개의 용알 터가 있다. 더는 바로 아래 바윈 큰 용알 터에 옥색물이 가득한 옥정(玉井)이라! 이 용알 터에선 옛날 가물 땐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란다. 근처 사람들이 모두 올라와서 용알 터에 촛불을 켜고 하느님께 치성 드렸던 곳, 그러니까 신성한 제단에서 난 점심을 즐긴 거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위백규(魏佰珪. 1727~1798)는 그의 저서 지제지(支提誌)에서 천관산을 영묘하고 기이한 산이라 했다. 흰 연기 같은 이상한 기운이 솟는 산, 산정상의 옥석(玉石)이 천자(天子)가 쓴 관(官) 같다 해서 천관산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의 시쳇말로 만능박사였다.

경학에서 천문, 지리, 병동, 수학에 이르기까지 백공기예(百工技藝)에 통달했다. 그가 9세 때 여기 천관산 정상에 올라 시를 읊었으니 가히 천재라. 후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정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한 번 입궐하여 사회폐단을 논한 ‘만언상소문’을 올리곤 낙향하여 장천제(長川齊)메 머물며 저술과 후학양성에 몰두 하며 시문을 교류했다.

장천제는 지금도 관촌에 실재하며 그의 <농가(農歌)> 한 소절을 옮겨본다.


-전략-

-<아이는 낚시질 가고 집사람은 절이 채(갓 버문 푸성귀) 치다.

샛밥 익을 때에 새 술을 거르리라

아마도 밥들이고 잔 잡을 때 호탕한 흥에 겨워하노라.

취하는 이는 늙은이요, 웃는 사람은 아이로다.

어지럽게 술잔을 돌려 탁주를 고개 숙여 권할 때에

흐르는 장고, 긴 노래에 누가 자기 차례의 춤을 사양하여 미루는가.>-


두시가 가까워진다. 자리를 털었다. 종아리 통증은 좀 가셨지만 걷기란 여간 불편하다. 오르막과 평길에선 더 불편하다. 억지로 발걸음을 때는데 김대장이 줄곧 동행한다. 천관산 연대봉(723.9m)을 어슬렁 옆 돌다 불영동쪽으로 하산한다. 내리막길엔 통증이 없어 다행이지만 마음이 무겁다. 절름발이 걸음으로 한 시간 반을 하산하니 탑산사 쉼터에 닿았다. 안도감이 긴장을 내쫓는다. 여기서부터 주차장까지는 갖가지 돌탑들의 행렬이다. 천관산 주변 주민들과 단체들이 불심을 쌓았다. 그들이 쌓아올린 몇 십개의 정갈한 탑들이 연륜까지 더하면 훌륭한 명소가 되리란 믿음이 솟구친다. 그 탑골에서도 압권은 문학 동네였다. 유명시인들의 시를 바위들에 음각하여 시촌(詩村)을 이뤘는데 고샅길 시비(詩碑)아래서 춘란과 마주쳤다. 그는 천만근의 봄을 이고 꽃망울을 세우느라 애처롭다 못해 신비스럽다. 그 춘란의 질긴 생명을 나의 무명의 눈으로 어찌 저장할 수 없어 감각 없는 디카에라도 담아야 했다. 천관산에서 엿본 유일한 봄을, 생명의 신비를 목도하는 환희의 순간 이였다.


ㅡ<설 한파 살얼음 속에서

온 몸을 냉동시키면서도

놓을 수 없는


바위보다 무거운 천만근

봄을 이고 일어서는

결코 멈출 수 없는


우주의 신비를 가득 안은

풀리지 않은 생명

수줍은 미소여


내 연인보다 더 마음을 뺏는다.>- -춘란을 응시하며 끌적거려 보았다-


귀로, pm5시 반쯤, 어느 휴게소에서 배설의 쾌감에 전율하고, 꾸벅꾸벅 밀려드는 피곤을 떨궜나 싶어 총무님은 마이크를 잡고 카페고지(告知)에 이어 ‘남김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책 소개를 한다. 덧붙여 나의 맨트가 이어졌는데 이 순간의 타이밍을 택하느라 김윤철회장은 마음을 씀이다.

그의 후의에, 총무님의 수고에, 원우인들의 호응과 격려에 감읍할 뿐이다.

09. 03.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