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음산의 삽화들 (명성산) ★


오늘 울음산에서 궁예의 한 서린 눈물에 흠뻑 젖었던 몸을 씻겠다고 샤워를 하고 자리에 들다 책상위의 어제날짜 신문을 가져와 훑다가 산행기 아닌 잡기를 끌쩍대고 있다.

1100년의 세월은 강산도 110번은 변하게 하니 우리들 머리통도 상당한 변천(진화)을 거듭하여 눈부신 물질문명을 이뤘겠다. 허나 제수 없게도 어떤 놈은 진화를 너무 세게 하여 날 넘었던지 아님 후퇴를 하여 생각이 애초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도 있는성싶다. 그 수준이하의 일부 사람들이 결코 청와대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아니기를 주문처럼 외어보지만, 신문엔 고위 비서관들의 머리통이 자기수준에 갇힌 채 후삼국시대 이전으로 돌아선 것 같아 씁쓸하다.


“그대가 어제 밤 사람들을 모아 역모를 획책했다는데 사실인가?”

궁예의 흉심을 꿰뚫고 있던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그러자 궁예가 시치미를 때고 다그치며 묻는다.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대의 마음을 이제 보리라.” 그 유명한 독심술을 토하며 궁예는 뒷짐을 지고 하늘을 보고 있을 때, 최응이 옆에 있다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 그걸 줍는척하며 왕건에게 귀엣말로 속삭인다.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듣고 있던 왕건은 얼른 역모를 시인한다.

“사실은 제가 모반을 획책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궁예가 껄껄 웃으며 말한다.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로다.”라고 칭찬하면서 말안장과 굴레를 하사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대게 승자의 편에서 기록함인데도 말이다.


궁예는 왕건을 죽이려 맘먹었다면 능히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왕건을 자기사람으로 삼기위해 충성심을 시험하고픈 거였다. 그 후 왕건은 불안감이 고조 돼 마침내 군사를 모아 궁예의 왕성으로 진입하는 반정을 꾀하고(918년), 궁예는 승산 없음을 판단하고 싸우지 않고 변장하여 명성산으로 피신하였다.

초목근피로 비참한 은거생활을 하며 눈물로 왕성(철원)을 내려다보았을 궁예의 비탄과 통곡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그 통곡을 고스란히 싸안은 산이기에 울음산이라 했음을 나는 오늘 산행 중에 곱씹었고, 나아가 오늘의 위정자들을 생각해 봄은 비단 궁예의 얼굴을 몰라서만은 아닐 테다.

근데 신문칼럼에 청와대의 얼굴이 촘촘히 그려져 있다. 엊그제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고위 비서관에게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의 의미를 묻자 “1700여 명의 서울대 교수 중에서 겨우 124명이 아니냐?”고 코멘트를 했단다. 그들은 ‘고 노전대통령의 조문객도 500만이니 겨우 10%밖에 안 되지 않느냐’ 라고 그 먹통비서관들은 곡학아세의 변을 떨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난 슬프다 못해 울화통이 난다.

겨우 10%도 안 되니 신경 쓸게 없다는 먹통들을 거느린 MB가 시종일관 경제와 안보 얘기만 주문처럼 외고 있음도 이해가 될 것도 같다. 허나 괴팍하고 잔인한 궁예도 당시엔 왕건을 따르는 자가 10%에 턱없어도 고스란히 대세를 포용했다.

싸워봐야 백성만 희생 되고 나라만 결단 날게 뻔하니 스스로 변장을 하고 명성산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근데도 지금 푸른 집 안에 웅거하고 있는 자기 안에 갇힌 먹통들은 소통을 틀리가 없겠거니 MB가 어떻게 소통의 묘안을 생각하겠는가.


며칠 전, 웹 서핑을 하다 명성산행을 한다는 열린산악의 고지를 접하고 카페 접수창구를 두들겼더니 이미 문 닫았기에, 나는 ‘아니면 말고’식의 배짱으로 창구에 낙서를 했더니 엊그제 총무님께서 전갈이 왔었다. 회빌 입금 시키란다. 하기야 ‘열린’을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는 생뚱한 내게 그럴 만도 하겠다 싶어 입금을 시키고 오늘 그들의 꽁무니를 따라나서 게 된 건 궁예 땜 이였다. 인구에 회자되는 그는 천의얼굴이어서 호기심이 당겼던 바고, 명성산은 그의 말년의 비통의 울음을 싸안은 곳이라 해서였다.

am10시반을 넘어 철원군 강포리 다리에서 산행에 들었는데 궁예의 눈물일 것 같은 빗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궁예봉을 향한다. 허나 길이 없다. 빗속을 헤치듯이 가파른 오름길을 오직 위를 향해 오르고 있다. 한 시간 남짓 길을 내며 올랐을 때 선두가 멈췄다. 궁예봉 팔부능선 쯤에서 바위벼랑에 맞닥뜨려 진전을 할 수가 없어 급경사 골자기로 하산하여 우회하잔다.

빗속에서 돌너덜을 덮은 낙엽 위를 내려오느라 빠지고 미끄러지기 일 수라. 그러면서도 짜증이 아닌 즐거운(?) 비명에 신바람을 내는 산님들 이였다. 누가 시켜서 할라치면 배 째라고 악을 바리바리 쓸지도 모른다. 반시간을 죽기 살기로 내려와 약물계곡 골짜기 청정수 울음소리에 시간 반의 생고생을 묻었다. 등산로에 접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한 시간쯤 빡세게 올랐을까? 진초록 관중이 맘껏 활개를 펴고 군락을 이뤘다. 좀 있다 암봉은 안무를 걷고 발아래 깔린다. 걷어낸 안무가 약물계곡을 구름바다로 만들었다.

pm1시 반쯤 명성산(923m)정에 올랐을 땐 궁예도 한 많은 눈물을 거뒀다. 협곡분지 저편 첩첩 산릉 허리엔 DMZ이 흰 구렁이처럼 기다가 안무 속으로 사라진다. 뱃속을 채운 우린 삼각봉을 향한다.

좌측 야산은 군데군데 포탄에 맞아 도장밥처럼 하얗고 협곡분지엔 민달팽이가 지난 자국마냥 하얀 미로가 엉키고 설 켰다. 포전차길이라나! 최전방에 있다는 걸 실감하는 산행이다. 이곳의 등산로 주변은 벌목을 한 탓으로 시계가 막힘이 없다. 아까 죽을 고생을 하다 우회한 궁예봉이 구름에 휘감겨 신바한 자태로 우릴 위무하는가 싶다. 능선 주변은 비비추가 지천인데 얼마 있음 꽃대를 뽑고 탐스런 웃음 활짝 펴얹혀 산님들을 즐겁게 할 것이다.


이름모를 야생화가 숲 속에서 무리지어 인사를 한다. 토질은 검정 부엽세토여서 식물성장에 알맞겠다. 궁예가 이곳 명성산에 은거할 땐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음직한 산이란 생각이 든다. 그가 여기를 떠나 평강에 갔을 때 주민에 붙들려 최후를 맞게 되는데 그 때 명성산이 꾀나 그리웠을 테다. 삼거리에 닿았을 땐 pm3시가 됐다.


나는 열린 산우 세 분과 책바위 능선을 넘어 산정호수로 가는 완주코스를 택했다. 경기도 포천으로 향하는 산세여서인지 여기서부턴 벌목이 안돼 울창한 수풀 속의 등정길이라. 바위와 소나무가 공생을 하며 한껏 멋을 부리고 양편에 거대한 황백의 바위산이 맨 얼굴로 천길 단애를 이뤄 클라이머들을 유혹하고 있는 거였다. 오늘 책바위능선을 포기한 산님들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독심술에 정통한 궁예에게 물어볼 일이라. 필시 혀를 몇 번은 찼을 테다.

소나무와 바위사이로 살짝 선뵈는 산정호수를, 그 호반에 붙박이 된 시가지는 너무 평화롭다. 오늘 날씨가 흐려서 호반 속에 뜬 또 하나의 그림을 볼 수가 없어 서운했다. 가을엔 단풍든 산자락과 시가지가 저 속에 옮겨 있으려니 생각하니 그걸 감상하는 궁예의 미소가 궁금해진다.

책바위능선 막바지 내림 길은 가팔라 철재계단공사가 한창이다. 허나 내 보기엔 밧줄로도 충분히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 정도의 경사로였다. 꼭 거기에 철골을 세워야 하는 등산로일까 의구심이 앞선다. 그곳 지자체 관계 분들은 미륵산을 답사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철재계단 등산로가 아름다운 산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무릇 모든 공공의 건축구조물은 실명제를 실시하여 사후의 평가를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책바위 등산로 공사가 맘에 갱킨다. 악독하다는 궁예도 거기에 철못을 박는다면 지하에서 또 한 번 통곡할는지도 모른다.

굳이 폭포라 하기도 낯간지러운 비선폭포 소리가 결코 시원하지만은 않다. 거대한 바위가 마치 수중보처럼 계곡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로 샤워를 하며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궁예도 그쯤에서 멱 감았을지도 모르겠다.

약속된 시간 오후 5시가 아직 이다.

09. 06. 07

#.열린산악횐 인심이 좋다. 아니다, 나눔의 멋을 즐기는 것 같았다.

먹거리도 그렇지만 "행운 롯또 뽑기"란 이벤트가 맘에 들었다.

#. 아래 스냅사진은 내가 박은 유일 '열린산우님'들인데솜씨가 영이라 -.

저와 한나절을 같이 한 산우님들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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